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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n 15. 2022

사랑받는 이름

그냥 살지 말고 잘 살기 위해서

한때 유명한 광고 제작자의 책이 유행하면서 ‘자존’이란 단어가 급부상했다. 이전에도 자존은 존재하는 단어였지만, 자신감과 자존감의 한 끗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느낀다. 나도 그 책을 읽으며 자존이 무엇인지 깨우쳤고, 평소 스스로를 바닥에서도 저 구석에 몰아넣는 원인이 빈약한 자존감 때문이란 것도 알게 됐다. 


자신이 싫어지는 데 이유가 어디 한두 가지일까. 어릴 적부터 자신이 싫었다면 누가 이해할까. 어린 나이부터 자신과 환경이 싫고,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어 안달인 아이를 예뻐할 사람이 없었던 건 너무 당연한 인과였을까.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 설명하는 게 막막했던 나는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이름마저 겉돌았다. 아버지의 본가에서 아들은 영, 딸은 연 돌림자를 썼다. 형제가 많아 그 자식들도 워낙 많았던 집안이라 딸도 많았다. 연이 들어가는 여성의 이름은 어지간하면 다 있었다. 


물론 지으려면 예쁜 글자를 붙여 얼마든 돌림자를 쓸 수는 있었다. 예를 들면 연수, 연지처럼 그럴듯한 딸 이름을 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시적이거나 깜찍한 이름을 상상하는 게 도통 어려웠던 건지 엄마는 내게 돌림자를 주는 걸 포기했다. 엄마는 뜻이 동일한 다른 한자를 넣어 내 이름을 지었다. 나름 큰언니와 내 이름의 뜻이 똑같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신 듯하다. 

문제는 돌림자 대신 내 이름에 넣은 한자가 우리나라 옥편에서 사라졌다는 거다. 만 18세가 되고 신분증을 발급하러 주민센터에 방문해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나처럼 한자가 사라져 당황하는 이가 많았는지 주민센터 아저씨는 익숙하게 다른 한자를 제안했다. 

“음은 같은데 다른 뜻의 한자를 넣으면 돼. 보통 이 글자와 이 글자를 주로 쓴단다.”

아저씨는 한자 두 개를 추천해주셨다. 황망하게 바라보는 나를 부추기기도 했다. 

“음, 뒤에 글자가 아름다울 미니까 이 한자 어떻겠니? 두 글자 이어서 보니까 뜻도 예쁘고 좋네. 이걸로 하렴.”


딱히 선택지도 없어 주민센터 아저씨가 급조한 한자를 넣어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신분증을 내밀었다. 노발대발할 줄 알았던 엄마는 대답조차 없었다. 

“엄마, 내 이름 뜻이 완전히 바뀌었다니까?”

“알았어.”


알았어라니. 돌림자를 못 써서 어떻게든 뜻이라도 맞춰가며 지었다는 내 이름이 증발했다는데 알았다니. 그날까지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본적인 대우라도 기대했던 나는 마음속에서 희망을 싹을 잘라버렸다. 


그렇게 나답지 않은 이름을 갖고 살았다. 그나마 이름이 예쁘기라도 하면 위로라도 되건만. 태어날 때부터 불려 온 이름이자 상황에 맞게 주민센터 아저씨가 넣어준 한자로 조합된 단어는 촌스럽고 흔했다. 뚜렷하게 기억에 남을 이름도 아니고 어디에나 있지만 예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이름이었다. 


이름처럼 나 역시 그저 그렇고 흔한 사람이란 기분에 사로잡혀 살았다. 어디에나 있는 나. 딱히 기억에 남지 않는 나. 그저 그런 나. 대충 살다가 대충 결혼해서 남들처럼 비슷하게 대충 살아갈 나. 그런 나를 예견하는 듯한 못난 이름이었다. 


한 번쯤 개명을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개명 절차가 워낙 복잡하고 개명 이후 통신사와 은행이며 곳곳을 다니며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거다. 그런 이야기를 토로할 때마다 가족들에게 돌아오는 말도 한결같았다. 

“그냥 살아.”


그냥 살아야 했다. 복잡한 절차에 손도 대지 못할 바에야, 인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그것을 그냥 혹은 대충 살라는 무심한 말에 대꾸도 못할 바에야. 나는 그냥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삶을 어떻게 대충 살아. 삶을 왜 그냥 살아. 삶은 그냥, 대충 살면 안 되는 거잖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잖아. 왜 내 삶을 그냥 대충 살아도 되는 것처럼 대하는 거야?”


그러다 구체적으로 개명을 생각한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 책을 낼 때였다. 별생각 없이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출판사 대표님이 이름을 어떻게 할지 물어왔다. 

“실명이 괜찮으니 실명으로 해도 되고, 온라인 플랫폼에서 사용하던 필명을 그대로 써도 되고 새 필명을 지어도 돼요.”


아, 이름을 새로 지을 수 있구나. 처음 내 작품이 세상 빛을 보는데 새 이름을 지어 집필 활동하며 사용하면 되겠구나. 플랫폼에서 사용하던 필명은 왠지 장난스러워 쓸 수 없었고, 실명은 내가 싫었다. 고민 끝에 필명을 지었고, 그 필명으로 지금도 글을 쓴다. 


그때 손도 대지 못했던 절차가 내 앞에 쑥 다가왔음을 느꼈다. 이름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 새 이름으로 새 출발하는 게 비단 타인의 일만이 아님을 말이다. 필명을 지으며 두근거림으로 꽉 차오른 나날을 상기하며 진지하게 개명을 고민했다. 한 번씩 검색하며 개명 절차를 정리하고, 이름은 어디서 지어야 할지 알아봤다. 


이왕 짓는 이름 발음하기 편하고 내 마음에 드는 한자를 넣고 싶었다. 그냥 살기보다는 크게 잘 살고 싶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며 성공의 맛을 보고 싶었고,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중성적인 느낌이 드는 이름으로 짓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 팬데믹 시대에 접어들었다. 주로 집에서 보내야 했던 팬데믹은 숨 막히는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집에서의 시간을 알차게 보낼 궁리를 한다는 뜻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나는 미뤄뒀던 개명을 준비했다. 


요즘은 온라인과 전화로 작명도 할 수 있다. 미신의 요소가 다분하지만, 사주를 넣어 내게 맞는 이름을 여러 개 받았다. 그중 마음에 드는 이름 몇 개를 골라 남편과 여러 날 불러봤다. 부를 때 어색하지 않고, 발음이 쉬운 것으로 골랐다. 마침 내가 원하는 크고 멋진 의미의 한자 이름이었다. 


그 이름으로 온라인 개명신청을 했다. 개명신청을 할 때는 개명하고 싶은 사유를 적어야 한다. 전과가 있거나 큰 문제가 없다면 거의 허가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면식 없는 공공기관의 누군가에게 개명하고 싶은 마음을 전해야 했다. 구구절절 적어 내리는데 눈물이 흘렀다. 사유의 후반에는 이런 문장을 넣은 기억도 난다.


어떤 이들은 40년 가까이 살아왔는데 귀찮게 이름을 바꾸냐며, 그냥 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살고 싶지 않습니다. 잘 살고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이름을 바꾼다고 저의 내면이 송두리째 바뀌고 살아온 역사가 바뀌진 않겠지만 남은 삶을 제 뜻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습니다. 개명 허가로 저를 응원해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윽고 개명 허가 통보를 받았다. 서른아홉 번째 생일을 막 지난 무렵이었다. 너무 기다렸던 개명이라 통보를 받자마자 서둘러 개명신고를 했다. 신고가 완료된 후에는 아침 일찍 나서 주민센터와 은행, 등기소 등을 두루 다니며 이름을 고쳤다. 나를 증명하는 모든 곳에 예쁘고 단단한 새 이름을 넣었다. 벅차올랐다. 해 질 녘까지 이름을 고치고 다녔다. 지치지도 않았다. 어딘가 실명을 적어야 할 때면 괜히 위축되고 핑계를 대던 나였다. 이제는 누가 불러도 좋을 것 같은 나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 덕분인지 작년부터 더 이상 “나는 내가 싫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늘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며 밤잠도 설치던 나였지만, 이제는 뭘 하든 잘 될 것 같은 자신감도 있다. 이름이 바뀌었다고 성격과 인생이 바뀌는 건 아니겠지만 이름을 바꿀 수 있는 나라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그윽한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냥 살라고, 대충 살라고 말하던 이들에게 ‘난 그냥 살고 대충 살기에 너무나 아까운 인생’이라며 제법 반항도 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개명을 축하하며 낯선 이름을 불러줬다. 적잖은 감동을 받으며 새 이름으로 살기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내 이름이니 여기서 공개도 해야겠다. 


내 이름은 공경할지, 클 우를 쓴다. 이름처럼 공경받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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