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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01. 2022

술이 없으면 허술한 게 인생

술은 인생 끝까지 함께해야 하는 존재다.

언젠가 남편이 물었다. 

“평생 못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어. 술이랑 고기라고 치자. 둘 중 포기 못하는 건 뭐야?”

아, 이렇게 잔인한 선택을 꼭 해야만 할까? 술과 고기 중 버릴 수 있는 게 도무지 없다. 그래도 꼭 하나만 포기해야 한다면 나는 아무래도 고기를 포기할 것 같다. 


고기를 대신한 채식 메뉴 중에 맛있는 건 정말 많고 살면서 아직 못 먹어본 음식도 많을 테니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술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인생에 모든 술을 쏙 빼고 생각해 보는 거다. 피자를 먹는데 맥주 없이 내내 콜라만 먹어야 하는 거다. 삼합이나 보쌈을 먹는데 물만 마셔보는 거다. 두툼한 소고기를 구웠는데 와인 없이 탄산수만 먹는 거다. 축하할 일이 있어 여럿이 모였는데 사이다잔을 들고 건배를 외친다. 여행에 가서 바비큐를 해 먹는데 주스와 물만 마셔야 한다. 이럴 수가, 왜 상상만 해도 재미가 없지?


술 없이 모든 음식을 먹을 수는 있는데 뭔가 부족하고 덜 신나는 느낌이 들 것 같다. 그게 바로 술 때문이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술을 마셔야 하는 건 아니지만 술이 없으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같다. 그림을 완성했는데 액자를 주문하지 못해 허송세월하는 느낌이고, 힘들게 등산해서 정상에 올랐는데 생각보다 경치가 별로인 느낌 같기도 하다. 친구들과 화투를 쳤는데 딴 돈이 고작 500원이라든가,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받은 상품이 껌 한 통이라든가. 그럴 때 느낄 허탈함과 허술함이 바로 술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떠들었으니 사람들은 내가 술을 꽤나 잘 마실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나의 주량은 한없이 초라하다. 맥주 작은 캔 두 개면 숙면을 취할 준비가 끝난다. 와인 한 병을 둘이 나눠 마셔도 다 비우기 어렵다. 

최근 맛있게 마신 사케와 막걸리

위스키와 중국술은 입에 대지도 못한다. 그래도 위스키를 아주 소량 넣고 만든 하이볼은 즐긴다. 막걸리는 스파클링 종류만 조금 마실 수 있다. 사케는 시원한 것 따뜻한 것 모두 좋아하고 의외로 칵테일을 마시면 빨리 취해서 자주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뭐가 됐든 도수가 17을 넘어가면 그 종류가 무엇이든 넘기기 어렵다. 


지금보다 나이가 적을 때는 일부러 소주를 고집한 것 같다. 초록색 유리병에 담긴 투명한 그 술이 나를 대변해줄 것 같고, 사람들과 우애를 다져줄 것만 같던 시절이 있었다. 우습게도 소주를 마시며 나눈 대화는 다음날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잘 마시지 못하면서 억지로 여러 잔 마시고는 다음날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오히려 편한 쪽은 맥주였다. 보리의 고소한 맛이 있고 맥주마다 풍미가 제각각이라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 좋았다. 게다가 여전히 못 마셔본 맥주는 세상에 널렸다. 새로운 맥주는 종종 출시되고, 세계에 얼마나 많은 맥주가 지금 이 시각에도 빚어지고 있을까? 나는 단 술을 싫어해서 블랑처럼 단맛과 향이 나는 맥주를 마시지 않는다. 한때 흑맥주가 비릿하게 느껴져 피했지만 코젤을 마셔본 다음부터는 흑맥주도 곧잘 마신다. 보리맥주보다 밀맥주가 더 맛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보리맥주가 좋다. 탄산 빵빵하게 들어있는 라거를 더 좋아한다. 


20대 중반쯤 회사를 마치고 저녁 시간에 일본어를 배우러 어학원에 다닌 적 있다. 그때 같은 반에서 친해진 동생과 수업을 마치고 학원 근처에서 맥주를 마신 적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극도로 기분이 좋아져 주량을 뛰어넘는 맥주를 마셨다. 둘이서 무려 5천cc나 마신 거다. 그리고 버스가 끊기기 전 가게에서 나왔는데 둘이 너무 취한 나머지 어학원으로 되돌아갔다. 셔터가 내려진 학원문 앞에는 수업 홍보물을 붙이는 게시판이 있었다. 우리는 홍보물 위에 커다란 글씨로 낙서를 했다. 

‘OOO센세 잘생겼어요!’


사실 OOO센세가 진심으로 잘생겼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날 과도하게 마신 맥주가 나와 동생의 기분을 상승시켰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해줄 수 있는 상태였다. 다음날 퇴근 후 학원에 갔을 때 수업에 들어온 OOO센세는 어떻게 글씨체를 알아봤는지 우리를 꼭 집어 말했다. 

“OO상이랑 OO상, 어제 술 마시고 낙서했어요?”


한글로 낙서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했는지 바로 안 걸까? 교실 안에 있던 모두가 우릴 보며 웃는 바람이 조금 부끄러웠던 기억이다. 낙서한 홍보물은 우리가 치우기도 전에 이미 새것으로 교체돼 있었다.

와인 못참아..

술이란 그렇게 나를 느슨하게 만들기도 하고, 가끔 목격하고 싶지 않은 타인의 밑바닥을 보여주기도 한다. 술을 마시면 우는 사람이 예상보다 대단히 많다는 걸 아는가? 정말 너무 많이 봐서 이쯤 되면 우리 민족은 눈물의 민족 같다. 


그래도 살면서 술과 곁들인 시간과 사람들은 대부분 따뜻했다. 손에 꼽히는 음주 기억으로는 처음 해외로 가던 비행기에서 먹은 맥주와 땅콩, 엄마가 담근 포도주, 오사카역 안에서 팔던 하이볼, 친구들과 어떻게 따는지 몰라서 허둥대다 겨우 마셨던 샴페인, 한동안 푹 빠져있던 럼콕 등이 있다. 


그러니 이런 내 인생에서 술을 삭삭 지우면 너무 심심하고 허술하다. 고기는 지워도 괜찮은데 술을 지우면 몹시 이상해진다. 술이 없으면 모든 자리에서 용건만 말해야 할 것 같고, 그 자리에 등장한 음식들도 매우 애석해할 것 같다. 그러니 술은 포기할 수 없다. 술은 인생 끝까지 함께해야 하는 존재다. 


이런 나지만 요즘은 논알콜 맥주를 더 자주 마신다. 나이 먹고 살찌니 술도 마음껏 못 먹는다. 논알콜 맥주는 맥주라 부르게 애매하지만 주말을 앞두고 자신을 달래는 용도로 마신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마음에 드는 알콜을 마시는 날이다. 


요즘 토마토가 제철이라 방울토마토를 듬뿍 꺼내놓고 술을 마신다. 배가 고프다 싶으면 훈제 닭가슴살을 썰어 먹기도 한다. 고기를 함께 먹는다면 무조건 와인이다. 요즘은 막걸리를 마셔도 전을 먹고 싶지 않다. 차라리 부각을 조금 꺼내먹는 게 낫다. 막걸리엔 물기 많은 과일이 훨씬 잘 어울린다. 회를 먹을 땐 사케가 좋은데 스시를 먹을 땐 맥주가 좋은 이유를 모르겠다. 샴페인에는 생크림 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다. 실패한 안주로는 맥주에 아이스크림, 와인에 오렌지가 있었다. 와인에 포도 꺼낸 날은 내가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다.


냉장고에서 맛있는 것을 조금씩 꺼내놓고 테이블에 물기가 너무 맺히지 않도록 코스터를 꺼내 술잔을 올려놓는다. 이때 음악이 없으면 정말 재미없다. 술자리에 음악은 무조건이다. 집에서 술을 마실 땐 강아지가 먹을 수 있는 간식도 쫑쫑 썰어 작은 접시에 담아두고 옆에 앉혀 술자리에 끼워준다. 아주 좋은 순간이다. 이번 금요일에도 한 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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