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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31. 2022

음악은 내 사랑

음악은 시절과 장소의 동의어

얼마 전 업무에 필요한 영상을 보고 있었다. BGM이 익숙했다. 뭐였더라, 하다가 음원 찾는 앱을 쓴 다음에야 내가 오래전 자주 들었던 음악이란 걸 알았다. 그렇게 많이 들었던 음악인데 가물가물해지다니. 따지고 보니 그 곡을 한참 들은 것도 20년쯤 된 것 같다. 


계절을 따지자면 지금은 늦봄. 신기하게도 그 음악을 듣고 나니 내 주변이 온통 한여름이다. 찰박하게 땀이 묻어나고 매미가 울어대는 여름철, 녹음이 흔들리는 홍대 주변 길목이 떠오른다. 듣기만 하면 주변 풍경을 바꿔버리다니 하여간 음악은 대단한 능력자다.


나는 아무리 가게들이 바뀌어도 홍대에서 합정, 상수역 일대의 지리를 잊지 못한다. 워낙 오래 다녀서 그렇다. 대략 17살 무렵부터 홍대의 공연장을 찾아다녔다.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공연장은 대개 20평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 낡은 의자가 몇 개 있거나, 그나마 의자도 없이 텅 빈 땅바닥만 있기도 했다. 서서 공연을 보는 스탠딩 클럽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 앞에서 공연하는 밴드는 공연을 보는 관객과 1미터쯤 떨어진 앞에서 연주하고 노래를 했다. 마이크 앞에서 한숨이라도 쉬면 바람이 불 것 같았다.

 

그렇게 다니다 보니 많은 게 달라졌다. 좋아하는 밴드가 많아졌고, 새로운 음악을 많이 알게 됐다. 평소에 몇 번 타보지 않아 늘 긴장하게 만들었던 전철을 익숙하게 타게 됐고, 무엇보다 홍대 지리를 구석구석 알게 된 것이다. 


어느 골목에서 어느 골목으로, 어느 장소로 향할 때 가장 빠르고 편안한 지름길을, 맛있는 떡볶이집과 버섯 칼국수집을, 예쁜 액세서리 노점이 놀이터로 나오는 날짜를, 유명인이 운영하는 가게를, 오래도록 앉아 놀아도 편안한 주점을. 열일곱에 시작해 20대 중반까지 나는 가장 익숙한 홍대를 밥 먹듯이 방문했고, 그 반복이 마흔이 된 지금까지 내 안에 남아있다.


그리고 모든 시간의 목적에는 음악이 있었다. 좋아하는 밴드가 많아지고 함께 공연을 본 사람들과 알음알음 취향을 공유했다. 아는 뮤지션과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기회도 많아진다. 정말 많은 공연을 보러 다녔다. 애초에 백지상태였던 나의 ‘취향’ 폴더는 촘촘하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공격적이지 않은 연주를 좋아했다가, 어느 날은 감춰둔 우울의 끝까지 찢어버리는 음악이 좋았다. 좋다고 느낀 음악의 팔 할 정도는 보컬이 여성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조예가 생기진 않았다.


하도 홍대를 들락거렸더니 친구들 사이에 ‘맨날 공연장 가는 애’로 소문이 났다. 그래도 가까운 친구들은 나의 취향을 함께 공유하곤 했다. 서로 좋아하는 씨디를 꺼내 돌아가면서 들었다. 지금처럼 SNS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 어렵사리 구한 고급 정보처럼 좋아하는 뮤지션의 아담한 공연 소식을 전해주며 함께 발걸음한 적도 있다. 


위태로웠던 십 대의 후반부를 취향을 만드는 데 소진한 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졸업을 하고 재수를 하고 대학에 가고, 다시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나는 본업과 귀가 사이 시간엔 늘 홍대 주변에 머물렀다. 행복하지 않았던 가정이라든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사회생활에서 도망가려면 익숙하고 취향이 있는 길목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망칠 곳이 필요하니 익숙한 곳에 갔는데 그곳이 음악의 화수분이었는지도, 그래서 음악이 좋아진 걸 수도 있다. 


사계절을 내리 다녔음에도 내 기억이 생생한 계절은 매미가 울기 시작하는 초여름의 홍대다. 조금 덥지만 옷차림이 가벼워서 어딜 다니든 가뿐한 그런 계절. 신기하게도 그 계절 홍대에서의 나는 3인칭 시선처럼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 지금은 여러 번 재포장한 길이니 그 시절 내가 디딘 땅과는 다른 땅의 홍대겠지만 내게 음악은 시절과 장소와 동일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익숙한 음악을 들었을 때 내가 음악을 기억하는 건지 음악을 좋아하던 나를 기억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뭘 하든 생기가 후룩후룩 넘치고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던 스무 살 언저리의 나와 취향을 혼동하는 건 아닐까? 


이제는 한국 나이로 마흔이 됐다. 그 시절 좋아하던 음악보다는 조금 취향이 차분해졌다. 그래도 스무 살 무렵 흡수한 음악들은 내 안에 있다가 한 번씩 고개를 세운다. 좋아했던 음악이 BGM으로 흘러나오거나, 식사하는 도중에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라든가 그런 음악에 동요되는 걸 보면 그 시절 형성한 음악 취향이 여전히 움직거리는 건 분명하다. 


음악이 합법적인 마약이니 하는 말이라든가, 자신을 위로하는 천국이라는 칭송 같은 건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굳이 정의하자면 음악은 인간을 감화하는 능력을 얼마쯤 가진 무형의 물질 아닐까?


어쨌든 나는 확고하게 음악을 좋아하고 함께 하고 싶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고요한 집안이 좋고 바람에 스스스 소리를 내며 흩날리는 가로수도 좋지만, 대로변을 걸을 땐 음악 한쪽에 숨고 싶고, 잘 풀리지 않는 순간이면 마치 불멍하듯 음멍을 하고 싶다. 이런 삼삼하고 덤덤한 사랑도 사랑이라면, 음악은 여전히 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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