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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26. 2022

사랑하는 작은 숲

오늘은 나가야 한다, 숲으로.

아직 여름이 채 오지 않은 4월이건만 집 밖으로 나가니 금세 정수리가 따끈해진다. 본격적으로 더워지는 건 대개 5월이었지만 4월에도 이런 시기는 늘 있었다. 작열하는 햇볕이 내리쪼이고, 몇 번의 봄비가 스친 다음 숲 냄새가 짙어지는 시기 말이다. 


이날은 집을 나서는 순간 예감했다. 여름은 아닌데 여름을 당겨 쓰는 것처럼 녹음을 즐기게 될 것을. 수채화처럼 옅었던 숲이 유화의 묵직한 녹음이 될 것을. 이것은 마치 레시피와 같다. 작열하는 햇볕에 봄비를 여러 차례 뿌려 잠시 숙성, 그리하면 짙은 녹음이 될 것.


그 녹음은 아주 깊이 그것도 많이 마실수록 좋다. 녹음을 깊이 마시며 걸으면 뱃속이 얼얼해진다. 사랑스러운 녹음의 청량함이다. 하지만 나는 도심에 산다. 운전도 못 하는 신세다 보니 대중교통 없이는 꼼짝도 못 한다. 그러니 버스든 전철이든 즉시 탈 수 있는 도심에 살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 숲을 곁에 넉넉히 두긴 분명 어려움이 있다.

같은 장소의 봄과 가을

그래서 이사를 올 때 집 주변에 공원이 많은지, 산의 능선이 보이는지 꼼꼼히 둘러봤다. 지금 사는 집은 남편과 퇴근길에 들러 식사를 하던 식당이 많아, 아담한 골목이 많은 동네였다. 오래된 신도시 특유의 키 큰 나무와 아기자기한 공원이 많았다. 


이사 갈 동네를 정한 뒤 집을 보러 다닐 땐 창밖으로 산이 잘 보이는지, 지도에 표기된 공원의 수를 세봤다. 그렇게 옮긴 지금의 집은 거실 창으로 정발산이 가까이 보인다. 날씨가 좋을 땐 인천의 계양산까지 보인다. 그리고 주방 창으로 고봉산이 보인다. 창문 가득 초록이 채워질 정도로 가까운 산이다. 


이사를 온 뒤 매일같이 오후에 내가 한 일은 강아지와 숲을 찾으러 다닌 거였다. 일단 지도에 표기된 공원을 가까운 순서대로 찾아갔다. 가장 가까운 공원은 숲이라기엔 놀이터 같았다. 아담한 놀이터에 나무가 둘러싼 수준이었기에 숲으로 인정하는 데는 실패. 

1호숲 축구장의 겨울

그다음으로 가까운 공원은 차도에서 봤을 땐 아주 작아 보였지만 밑으로 내려가는 지대가 있어 꽤 큰 숲이었다. 숲 사이로 좁은 오솔길이 있고 그 주변에 오래된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 있었다. 경사진 오솔길을 내려가면 축구장이 있었는데 축구장 주변도 온통 나무로 덮여 있었다. 일단 가장 가까운 1호 숲을 만난 것이다. 특히 이곳은 인위적인 가꿈이 없어 마음에 쏙 든다.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날에도 1호 숲에서 강아지와 뛰어놀았다. 


그리고 단풍이 들던 가을에는 2호 숲을 만났다. 주방에서 보이는 산 방향으로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무작정 걸어갔던 날이었다. 걷다 보니 육교가 나오고 인적이 드문 숲길이 나왔다. 그곳은 콘크리트나 돌로 다듬은 길도 없다. 그저 사람들이 자주 밟아 다져진 흙바닥이 길이다. 이는 내가 싫어하는 인위적인 가꿈이 없다는 뜻이다. 나무들이 아주 제 잘난 맛에 취해 열심히들 자라 있었다. 정갈함을 배워본 적 없는 나무들의 공동생활이었다. 

2호숲 인근의 습지공원

무질서한 나무와 수북한 낙엽 사이 흙길을 걸어 올라가면 아담한 정자가 나온다. 그곳에서 항상 강아지와 물을 마신다. 가방에 담아온 강이지 물병과 내 물병 두 개를 꺼내 목을 축인다. 그리고 반대편 흙길을 내려간다. 이 길 역시 무질서하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나무들로 채워져 있다. 


2호 숲을 만난 뒤 나는 집 근처에 이토록 있는 그대로의 숲이 있다는 데 뛸 듯이 기뻤다. “우리 동네에 작은 숲이 있어.”라며 지인들에게 자랑도 했다. 2호 숲에 다녀오는 날이면 내 운동화와 양말, 강아지의 밝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그렇게 2호 숲을 다니다 보니 작은 갈래의 길을 여러 개 발견했다. 겁도 없이 그 길을 다녀보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는 막다른 길이어서 허무하게 돌아온 적이 있었고, 하나는 아주 가파른 산으로 이어져 눈물을 머금고 기어 내려온 적도 있다. 또 하나의 길은 잘 다듬어진 인도로 연결됐는데 건너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습지공원이 있었다. 그리고 습지공원의 뒤편으로 산이 있었다. 우리 집 주방창으로 보던 바로 그 산이었다. 

비온 날과 화창한 날의 산책로

그렇게 이사를 온 뒤 약 반년 정도 보내며 집 근처 숲들을 찾았다. 자주 가는 건 아무래도 1호 숲과 2호 숲이고, 숲은 아니지만 나무가 울창하고 한없이 길게 이어진 공원도 있어 산책을 자주 나간다. 차를 타고 10분쯤 나가면 정발산이라는 아담한 산이 있어 숲에 대한 갈증은 시원하게 해소되는 편이다. 


그리고 숲이란 매일 매시간 다른 냄새와 외모를 뽐내는 법이다. 게다가 작열하는 햇볕과 봄비가 지나간 요즘 같을 때는 종일 숲에 나가 있어도 좋고, 또 그게 아니더라도 잠시나마 들러도 충분한 소득을 거둬들일 수 있다. 

어쨌든 오늘은 나가야 한다, 숲으로. 

녹음이 짙은 숲으로 나가자. 

“모카야, 나가자!”

눈치 빠른 강아지가 낮잠을 자다가 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난다. 오늘 같은 날이면 숲은 탄산수 같은 청량감을 머금고 있다가 내가 지날 때마다 온 힘을 다해 뿌려댈 것이다.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두근거린다. 

서둘러 걸어야겠다. 사랑하는 작은 숲으로.


+ 4월에 쓴 글이었네요.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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