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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26. 2023

연애세포가 없진 않다

연애세포는 한때 매력 발산에 열심이었던 시절의 비망록이다.

연애를 끊은 지 어느덧 9년째다. 서른둘 겨울에 결혼해 9년째 살다 보니 연애를 안 한 햇수를 세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연애세포가 활발하게 증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새롭게 알게 된 이성을 향해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끼고 특별한 관계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힘은 전부 연애세포가 발휘한 거였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있다.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마흔이 됐다고 해서 연애를 못 한다거나 안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 와서 세포증식을 한다면 다소 위험하고 조심스러울 일이다. 유부녀인 내가 뭐 하러 안식년에 들어간 연애세포를 깨워 분열을 만들어야 할까. 책잡힐 짓 하는 데 질색인 내게 ‘불륜’이 벌어질 가능성은 0이다. 

도덕적인 이유와 더불어 취향에 따라 불륜이 싫은 부분도 있다. 불륜은 그 모양이 예쁜 게 없다. 불륜은 찝찝하고 소란스러운 연애다. 내가 느끼는 불륜의 외형은 전골 요리를 다 먹고 난 후 냄비 끄트머리에 남은 양념 찌꺼기 같다. 찝찝하고 먹기 싫은 고춧가루 범벅이 들러붙은 모양새다. 싱싱한 전골 요리를 맛있게 먹어놓고 굳이 냄비 가장자리까지 훑어 먹어야겠는가? 그렇게까지 불륜할 필요가 있나 싶다. 


이건 내가 유부녀이기에 남편 외의 연애를 거부하는 이유지만 만약 싱글이라면 어떨까. 마흔의 싱글이라면 세포증식은 하겠다만 그동안 학습한 연애지식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역시 내가 경험해보지 않아 생긴 편견일 터다. 마흔이라도 싱그럽게 연애할 수 있다. 아, 이렇게 꼬리를 물다 보니 마흔의 연애가 궁금하긴 하지만 역시 새 연애는 하고 싶지 않다. 


9년 전 남편과의 연애가 마지막 연애였다. 연애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알고 지낸 시간까지 더하면 좀 더 긴 시간이 있었다. 그 시절 이 사람 없으면 세상에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그런 감정이 있었으니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결혼 후 한동안 연애감정이 지속됐다. 하지만 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여러 역할을 맡게 됐다.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가족으로서, 배우자로서, 가끔은 동생 같은 느낌의 남편이 생겼다. 나 역시 남편에게 똑같다. 연인으로서 서로에게 갖는 감정이 지워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남편과 연애하는 사이라고 말하기엔 머쓱한 부분이 있다. 연애의 지속과 결혼은 동의어가 아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야 남편과 연애하듯 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말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거나 안 한 사람 아닐까. 혹은 대외적 이미지 관리가 아주 중요해서 “난 지금 남편과 매일 연애하듯 살아요!”, “결혼하고도 쭉 연애하는 기분이라 행복해 미치겠어요!”라고 외치는 사람에게서나 나올 법한 말 아닐까. 

문득문득 설렘이 찾아올 수야 있겠지만 매일 남편과 연애하는 기분으로 사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 설렘으로 채워진 감정이 달콤하더라도 때때로 위태로움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나는 과거 몇 번의 연애를 통해 알아버렸다. 


오래전 먼저 결혼한 친구에게 결혼하고도 매일 남편을 보면 설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친구가 진지하게 답했다. 

“결혼하고도 매일 배우자를 봤을 때 두근거리면 그건 병이야. 심장이 안 좋은 거야. 빨리 병원 가서 검진받아야 해.”


그 말을 나도 이제 확실히 안다. 남편과 하염없이 연애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종종 남편이 귀여워 보이고 멋져 보일 때도 있지만 우리의 감정과 지성은 연애할 때와는 다르다. 부부 사이에 사랑한다는 감정은 확실하되 연애할 때의 사랑보다 훨씬 두툼하고 묵직하다. 연애할 때의 사랑이 물감 두어 개였다면 부부가 되면서 느끼는 사랑은 색을 꽉 채운 팔레트다.


연애시절에 비해 우리가 달라진 건 ‘성숙’이란 단어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뜨겁게 연애했지만 뜨거움을 내내 유지하기보다는 시간과 신뢰의 길을 걸어 연애보다 깊은 관계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좀 더 녹진하게 서로를 아끼고, 상대의 찌푸린 눈가나 분주해진 손길만 봐도 뭐가 필요한지 알아채며 부부로서 다져나가는 사랑의 잔근육이 있다.


비록 연애세포가 활약하지 않는 덕에 생일선물이 조금 실용적인 품목으로 바뀌고 함께 외출해도 수정화장을 하지 않는 게으름이 생겼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푸근하고 편안하다. 남편 역시 연애 때와 달리 주말에 세수하지 않은 채 누워 있거나, 추운 날 겉옷을 벗어주던 허세의 싹을 자른 지 오래다. 이밖에도 연애세포가 활약하지 않아 생긴 소소한 부작용은 끝없이 털어놓을 수 있지만 나와 남편의 사회적 이미지를 위해 이쯤에서 마무리하겠다.


이렇듯 기혼자의 입장에 나이가 더해지며 연애를 향한 열의가 떨어진 시절에 도달했다. 그렇다고 내 안에서 연애세포가 박멸했나 자문해 보면 그건 또 아니다. 내 안에 화석처럼 새겨진 연애세포는 한때 매력 발산에 열심이었던 시절의 비망록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있었고, 그만큼 사랑받고 싶었던 시절에 활약했던 세포 한 자락.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리만치 용감하고 성실하게 사랑했던 기록으로써 연애세포는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다.


연애를 하면서 사랑이 달아오르고 활활 타오르다 깨지고 타버리고 재가 되기도 했던 경험을 얻었다. 그런 시기가 있어 지금 내 곁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마흔의 내게 다시 연애를 권유한다면 기혼인 현재의 상황을 차치하더라도 연애세포에 새겨진 기록을 되새기고 간직하는 것으로 새 연애를 대신하고 싶다. 


아마 내 안의 연애세포는 다시 활약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단단히 응고된 연애세포를 굳이 깨뜨리고 싶지 않다. 내 안에 연애세포는 오로라처럼 청연한 빛깔을 뿜으며 가장 사랑스러웠던 내 청춘을 대변하는 데 충실하다. 지금도 그 충실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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