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오늘은 이번 생의 가장 늙은 날일 뿐이다.
어쩌다 보니 마흔을 두 번 살았다. 한국 나이는 태어나자마자 1살을 먹게 된다. 그래서 한 번 마흔이 됐다가 그다음 해에 나이 체계가 만 나이로 바뀌면서 또 한 번 마흔이 됐다. 호적상 생일이 1월이다 보니 어영부영 중간에 39살을 끼워 넣을 틈도 별로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생을 구분할 때 크게 초년, 중년, 말년으로 나눈다. 초년은 태어나서 젊은 시절을 보낼 때까지다. 말년은 노년과 비슷한 의미다. 애매한 건 중년이다. 한때 국립국어원에서는 30대부터 40대를 중년으로 정의했다.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어디에서는 40대부터 중년이라 하고, 30대 후반부터 중년이라 하는 곳도 있다.
어쨌든 팔팔한 청년기가 끝나고 기력이 수그러드는 시기부터는 ‘내가 혹시 중년?’이라는 의구심이 들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의미다. 젊을 땐 돌도 삼킨다고들 하는데 중년에 돌을 삼키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정도의 차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중년인가. 자신을 중년에 대입해 보니 ‘중년’이란 단어가 상반신에 커다란 구멍을 내며 파고드는 것만 같다. 중년이라기에 나는 아직 건장한데, 해낼 수 있는 일도 많은데, 내가 정말 중년이라 할 수 있을까. 중년을 기피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나를 중년으로 인정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확실히 중년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엔 몹시도 애매한 나는 지금 마흔에 도착한 것이다.
한때 마흔을 어떤 목표의 경계선으로 삼은 시절도 있었다. 마흔이 되면 서울에 넓은 아파트 하나 장만하지 않을까, 직장생활을 한다면 부서장 직함 정도는 갖고 있지 않을까, 남들 하는 대로 애 둘 정도는 낳겠지, 슬슬 노후대비를 위해 투자 공부에 불을 켜고 있겠지, 그런 세속적인 목표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진로와 실력향상 측면의 목표도 마흔 언저리에 많이 포진해 있었다. 마흔이 되기 전에 책을 꼭 한 권 내고 싶다, 마흔이 되기 전 악기를 배워 그럴싸한 실력을 갖추고 싶다, 남은 생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다양한 취미를 익혀두는 것 등의 목표였다.
두 분류의 목표들을 이제 돌이켜보면 80% 정도는 예상을 빗나갔다. 나는 서울에 살지 않고, 애를 낳지 않았고, 직장생활 대신 프리랜서 생활을 한다. 노후대비는 아주 최소의 단위로 하고 있다. 마흔 되기 전에 이미 4권의 책을 냈고, 악기는 시도도 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맞아떨어진 건 다양한 취미 정도다.
이렇듯 마흔을 대단한 경계선이라 믿었다. 그리고 마흔까지 많은 것을 이뤄낼 거라 기대에 부풀어 살았지만 막상 도착하니 별것 없다. ‘마흔’이라는 단어의 텅 빈 ㅁ과 ㅎ 발음처럼 자칫 허우룩하게 쓰러질 듯 위태로운 나이일 뿐이다. 여전히 배울 게 많은데 머리는 좀체 힘 있게 돌아가지 않아 애를 먹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는 왜 이리 막막한지 두려움만 허겁지겁 들이켠다.
하지만 기대수명이 길어진 탓에 마흔이라고 해봐야 고작 인생에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불안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조바심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럼에도 매번 ‘뭘 해야 할까’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정답을 적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마흔은 포기가 빨라지는 나이다.
나의 마흔도 그런 모습을 띄고 있다. 나는 마흔에 가까워지면서 서재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뭔가를 적어내는 시간보다 창밖을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강아지와 산책 한 번 다녀오면 소파에 기대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할 만큼 체력이 약해졌다. 운동의 목적이 다이어트보다는 체력 유지와 질병 예방이 됐다. 내가 도착한 마흔은 그런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도달했다고 슬프거나 절망적이진 않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오늘은 이번 생의 가장 늙은 날일 뿐이다.
20대 때는 마흔이 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채로 세상의 구석에 방치돼 흐릿해지는 존재가 마흔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고 딱히 방치되지도 않았다. 사는 동안 얼마큼의 경험과 경력이 쌓여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고 다행히 흰머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흐릿하지 않다. 마흔은 나의 존재감을 지워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 없다. 오히려 20대와 30대를 살며 배운 가치들을 좀 더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시기에 도래했으며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언행을 눈치챌 수 있다.
어쩌면 마흔은 불안과 위태로운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수십 년 터득한 지혜를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이 아닐까? 상반되는 감정과 능력이 서로를 건드리며 좀 더 괜찮게 살아보고자 안간힘을 쓰는 경계. 살면서 반드시 만나게 되는 막막하지만 든든한 나이. 그게 나의 마흔이 아닐는지.
그래서 나는 매일 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걱정하면서도 막상 아침이면 툭툭 털고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깨끗이 단장하고 일과를 처리한다. 어찌 된 일인지 매일 할 일이 정해져 있고 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삶이 가진 불변의 특성은 허우룩한 마흔이라는 나이를 위로한다. 그리고 오늘 밤 다시금 위태로운 삶을 걱정하며 잠들겠지.
마흔은 쉽게 다가오지만 쉽게 떠나지 않는 특별한 나이임이 확실한 것 같다. 중년이라는 기준 앞에 차라리 양손을 들고 너그럽게 굴복해 버리는 게 승자의 비법이라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이렇게 매일 위태롭다 희망을 가져보고 또 무던하게 지내며 40대를 부지런하게 살아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