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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Oct 17. 2023

위로는 생활필수품

예고 없이 찾아올 아픔에 흉터가 남지 않도록 위로의 근육을 키워볼 것

독서모임에서 애도, 위로와 관련된 책을 몇 차례 읽은 적 있다. 살면서 어느 순간엔 위로와 애도가 분명 필요하고, 위로의 시간을 거르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 위로를 다음으로 미루고 애도를 챙기지 못하면 언제 어떤 식으로든 부작용은 드러난다고도 했다.


위로와 애도. 분명 우리 삶의 필수이긴 하다. 어렵고 슬픈 순간이 다가오는 걸 미리 예지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예측이란 신기루와 같은 이 세상에서, 맞닥뜨리는 고난과 절망에 대응할 방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덧붙여 일상에서 틈틈이 위로가 필요한 순간을 챙긴다. 위로는 그렇게 생활필수품이 된다.


위로라고 해서 반드시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만 써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최근 챙긴 위로는 족욕이었다. 하도 더워서 운동화를 신으면 발에 불이 날 것 같고, 샌들을 신으면 거리에서 굴러들어 오는 모래알에 괴롭힘을 당하는 발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10분 정도 앉아있었다. 물이 닿는 피부로부터 조금씩 파장이 느껴졌다. 온종일 시달렸던 귀찮고 괴로웠던 기억이 조금씩 옅어졌다. 본래 발이 지녔던 생기와 감정이 물이 닿는 피부 위주로 퍼져나갔다. 발은 분명 위로받았다. 발을 위로하는 동안 다른 용건 없이 앉아있던 영혼도 위로받았다.


더워서 고생인 여름에는 특히나 이런 위로의 순간이 많다. 아무리 더워도 강아지 산책은 피할 수 없고,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다녀와도 머리카락 속 구석구석까지 땀으로 절어 돌아온다. 돌아와서도 바로 쉬지 못하고 강아지의 발을 닦고 용품들을 치우고 간식을 먹인 다음에야 어딘가에 앉을 수 있는데 이때도 위로가 필수품이다. 

어떤 위로가 좋을까. 일단 냉장고 음료칸을 연다. 여름철이면 자주 사놓는 게 있다면 바로 과일주스다. 순연의 액체로 부드럽게 목을 타고 흐르는 오렌지주스를 사놓기도 하고, 과육을 그대로 갈아놓은 듯 생생한 딸기 주스를 채워놓기도 한다. 뭐가 됐든, 산책 후 온몸이 땀으로 쫄랑 젖고 몸 안의 에너지도 바짝 소진된 순간 얼른 유리컵에 과일주스를 따른다. 여기에 얼음 세 조각 정도 띄운다. 


그리고 잠시 식탁 의자나 소파에 앉아 그 한잔을 마시며 위로를 한다. 이때 “캬!”, “고생했다!”와 같은 소리를 내 위로하기도 한다. 위로는 대략 3분 정도면 끝이 나고, 다시금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집 청소도 한다.


이게 무슨 위로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위로를 반드시 고통의 복판에서만 할 필요는 없다. 위로는 보살핌을 받는다는 따뜻한 기분이 들게 하고, 가끔 너무 미약하고 흐릿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단단하게 붙들어 매는 효능이 있다. 또 하나 효능이 있다면 타인에게 위로가 필요한 순간을 세심하게 알아채고 끝내주는 위로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위로 능력자라고나 할까?


나의 위로 능력을 가장 자주 이용하는 자는 아무래도 남편이다. 남편의 회사에는 굉장한 골칫덩이 상사가 둘이나 있다. 큰 골칫덩이는 지식이 없는데 자꾸 지시하는 자다. 아는 게 없는데 과시는 하고 싶고, 그러다 보니 업무는 엉망진창에 직원들이 쓸데없는 데 시간과 힘을 계속 소모한다. 그러다 일이 틀어지면 부하직원들 탓으로 돌리고 모른 척하는 인간 말종이다.


작은 골칫덩이는 감정조절 기능이 고장 난 자다. 자신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위든 아래든 일단 고함부터 지르고 보는 데다 상스러운 말도 곧잘 쓴다. 언젠가 남편이 문서에 ‘3월 매출’이라고 쓴 부분을 자기 취향의 ‘매출(3월)’이라고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몇 시간씩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 바람에 어지간하면 큰소리 내지 않던 남편도 화를 내고 싸운 적 있다. 그 일은 배우자인 내게도 깊은 상처였다(사적 복수 계획 중).

그런 날의 남편은 너무나 위태롭다. 분명한 위로가 필요하다. 이럴 때 일상에서 틈틈이 위로를 챙기던 나의 재능이 발휘된다. 회사에서 골칫덩이로부터 재해를 입었다는 연락을 받으면 즉시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낸다. 분명한 위로에 고기는 효과가 좋다. 저녁 식탁에 화려한 고기 요리를 올릴 준비를 한다. 그리고 알코올을 세팅한다. 함께 곁들일 안주로 남편이 좋아하는 감자칩이나 치즈도 준비한다.


그리고 남편이 도착할 무렵 강아지를 안고 엘리베이터 앞에 대기한다. 땡, 치는 알림과 함께 절인 배추처럼 무너진 남편의 모습이 보이면 나와 강아지가 온갖 호들갑을 떨며 환대한다. 골칫덩이의 재해로부터 살아 돌아온 남편을 진심으로 환대하며 탄성을 지른다. “멋있다!”, “잘생겼다!” 이런 말도 덧붙여주면 좋다.


남편이 샤워하고 나와 식탁에 앉으면 준비해 둔 요리와 알코올과 안주를 차려주고, 그것을 먹으며 골칫덩이들의 악행을 나열할 시간을 갖는다. 이때 나는 위로 능력자로서 남편의 고통에 공감하고 골칫덩이들이 가루가 되도록 욕을 하고 있는 힘껏 빻아 버린다. 남편의 입을 통해 설명된 골칫덩이들은 다시 내 입을 통해 배설될 때 세상에 둘도 없는 쓰레기가 돼 있다(실제로도 그렇다). 이제는 하도 많이 듣고 욕을 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큰 골칫덩이와 작은 골칫덩이가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다.

우리집 힐러

요란한 식사를 마치면 주방을 치우고 남편과 강아지와 셋이 동네 산책을 나간다. 고기 요리와 알코올과 치즈와 같이 높은 열량의 음식을 먹었다면 잘 소화하는 것도 위로에 도움이 된다. 시원한 저녁 시간 세 가족이 산책하면 재해의 잔여물이 마저 씻겨 내려간다. 이렇게 위로를 마치면 남편은 숙면을 취한다. 위로 능력자인 나 역시 세상을 구한 듯 풍요로운 마음으로 잠에 빠진다.


틈틈이 자신을 위로하고 가족이나 지인들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날이 어떤 때는 빼곡하고, 어떤 때는 느슨하다. 일상에서 작은 위로를 습관처럼 실행하다 보면 정말 진지한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어찌할 줄 몰라 사고가 정지하는 일은 예방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살면서 힘을 내고 싶은 순간이 숱하게 찾아오는 데 비해 힘이 딸린다고 느끼는 지점이 더 많아서일 것이다. 위로받고 싶은 순간은 번번이 찾아오지만, 그것을 꼭 타인에게서 얻기보다는 스스로 해야 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 자각이 들어서일 수도 있다. 이 정도 살았는데, 이 나이쯤 먹었는데. 위로는 스스로 충분하고 튼튼하게 하자고 마음의 갈피를 잡는다.


그러니 위로는 스스럼없이, 좀 흔하게 해도 괜찮은 것 같다. 언젠가 예고 없이 찾아올 아픔에 흉터가 남지 않도록 위로의 근육을 키워볼 것. 아니면 1일 1위로도 좋지 않을까?



+ 현 시점, 남편은 이직한 새 직장에서 신나게 일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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