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주머니 속 '맥가이버 칼'

by 딸리아

“삐익”

공항 검색대의 요란한 소리에 아빠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낡고 검붉은 맥가이버 칼이었다. 80년대 우리 집에는 이 칼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진정한 '맥가이버'가 살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가전제품 광고에서 흘러나오던 문구였다. 지금처럼 모든 것을 쉽게 바꾸던 시절이 아니었다. 10년을 사용할 만큼 튼튼하다고 말로써 품질을 보증했고, 실제로 우리는 고장 나면 버리기보다 으레 고쳐 썼다.


TV가 잘 나오지 않으면 먼저 여기저기 몇 번 치고, 그래도 안 되면 분해를 했다. 집집마다 드라이버는 기본으로 있었고, 나도 가사 시간에 드라이버 사용법을 배웠다. 네 살 많은 언니는 드라이버를 자주 사용했다. 아빠가 집에 없을 때면 자기가 나서서 직접 분해하고 뚝딱뚝딱 다시 조립했다.


어릴 적만 해도 동네마다 전파상이 있었다. 전기와 관련된 부품들과 가전제품과 관련된 해결사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둥그런 백열등과 형광등에 들어가는 초크였던가, 그걸 자주 사러 갔었다. 어둑하고, 검은 부품 냄새가 가득했던 공간. 집에서 뚝딱뚝딱 고칠 수 없으면, 이곳에서 전문가의 손길을 빌려야 했다.


아빠는 손재주가 좋았다. 목공소에서 나무를 사다가 직접 자르고 재단해서 옥상에 평상을 만들기도 했다.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을 정도로 넓고 튼튼하게 만드셨다. 병아리집이며 개집 할 것 없이 각종 집들을 만드셨고, 마당에 그네도 뚝딱뚝딱 만들어 주셨다. 큼직큼직한 것부터 해서 작게는 부엌에서 사용하는 국자, 깔때기, 냄비뚜껑 꼭지 등등을 만들고 고치셨다.


우리 가족은 아빠를 ‘맥가이버’라고 불렀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주머니에서 맥가이버 칼을 꺼내 돌리고 자르고 끊으면서 뚝딱뚝딱 고쳤다. 비록 모양은 예쁘고 세련되지 않았지만, 아빠의 손을 거치면 언제나 제 기능을 완벽하게 복구했다. 그 칼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아빠의 상징과도 같았다.


낚시를 할 때도, 오이·토마토 지지대를 만들 때도, 각종 술병 뚜껑을 딸 때도, 자전거 체인이 얽혔을 때도... 이 칼 하나만 있으면, 아빠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1985년 ‘맥가이버’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피닉스 재단의 비밀요원 맥가이버는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각종 지식을 동원해 뚝딱뚝딱하며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 우리는 아빠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맥가이버처럼 무조건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아빠는 만능박사였고, 집안의 해결사였다.


우리 아빠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집집마다 맥가이버가 하나씩은 있었다.


아빠의 맥가이버 칼이 사라진 건, 5-6년 전 바로 그 공항 검색대에서 검출되고 나서이다. 그 당시, "삐익" 소리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25년 전에 독일에서 사다 드린 그 칼이 나왔을 땐 반갑기도 했다.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그 칼을 아빠가 아직도 가지고 계셨다니.


딸들은 쉽게 물건을 내다 버리는 시대에, 아빠의 손때 묻은 맥가이버 칼은 '이젠 그만 버려도 돼'라는 잔소리보다도 가족의 울타리였던 ‘아빠의 존재’를 말없이 보여주는 듯했다.


지금은 밖에 나가시는 것도 쉽지 않지만,

맥가이버 칼을 다시 사다 드리면 그 시절, 우리 집의 맥가이버도 다시 돌아오려나...



이 글은 제가 쓴 『아빠와 50년째 살고 있습니다만』의 일부 내용을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하였습니다.


사진출처: UnsplashMaciej Karo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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