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과 귀환
오늘 하루는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며 다양한 일정을 소화했다.
먼저 에바 페론이 잠든 레콜레타 공동묘지를 찾아 그녀의 흔적을 되새겼고, 이후 미용실에 들러 뜨거운 태양에 상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점심엔 팔레르모 소호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버거를 먹으며 잠시 여유를 즐겼고, 오후엔 탱고 수업에 참여해 기본 스텝을 배웠다. 그리고 저녁에는 ‘맨션 탱고(Mansion Tango)’에서 화려한 디너쇼를 감상했다.
마침내, 오랫동안 꿈꿔왔던 밀롱가에 발을 들였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곳은 이미 몇몇 커플들이 음악에 맞춰 탱고를 추고 있었다. 엉성한 초보자부터 잘 차려입은 베테랑까지,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이 서로를 껴안고 긴장과 신뢰, 감정의 흐름을 나누고 있었다.
댄스 플로어 한쪽엔 술을 파는 바가, 맞은편에는 라이브 연주를 위한 무대가 있었다. 입장권을 구입하고 무대 바로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를 사러 바에 갔다. 간단한 식음료를 파는 이 바는 가격도 비교적 합리적이었지만,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100달러짜리 지폐를 내밀자 바텐더가 약간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그때 양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왔고, 그는 상황을 듣더니 “잠시만요” 하고 자리를 떴다.
‘복잡해지려나?’ 싶던 찰나, 그는 잠시 후 묵직한 현금 다발을 들고 돌아왔다.
맥주 세 잔 값을 제하고 내게 1,000페소짜리 지폐 100장 넘게 되는 어마어마한 잔돈을 건넸다. 두 손에 쥔 묵직한 지폐 더미에 얼떨떨해졌다. 아르헨티나, 빵을 사려면 돈가방이 필요하다고 하더니, 그게 이렇게 와닿을 줄이야.
자정이 되자 밴드가 무대에 올랐다. 반도네온, 피아노, 바이올린, 베이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팀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금 전 잔돈을 건넸던 그 남자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 팀은 Orquesta Típica El Afronte, 가수는 Marco Bellini로, 부에노스아이레스 ‘Maldita’ 밀롱가에서 자주 공연하는 팀이다.
‘밀롱가(Milonga)’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탱고가 펼쳐지는 공간 자체를, 다른 하나는 그 공간에서 열리는 탱고 이벤트를 뜻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이 독특한 춤 문화는, 원래 탱고를 즐기던 카페나 댄스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 이민자들과 하층민들은 타국의 삶과 계급의 벽 속에서 소외를 경험했다. 그들에게 밀롱가는 단순한 춤터가 아니었다. 밀롱가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마음을 기댈 수 있었던 작은 둥지였다. 이곳 밀롱가에서 춤과 노래, 이성과의 마주함을 통해 그들은 잠시 시름을 잊고, 그렇게 하루를 견디며 내일을 다시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탱고 곡은 영화 『여인의 향기』에 삽입된 "Por Una Cabeza"다.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이 작곡하고, 알프레도 레 페라(Alfredo Le Pera)가 가사를 쓴 이 곡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통 탱고의 매력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편, 누에보 탱고(Nuevo Tango, 새로운 탱고)의 거장 아스트로 피아졸라는 “Libertango”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전통적인 탱고에 클래식과 재즈를 결합해, 완전히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개척했으며, 이를 통해 탱고를 세계적인 음악 장르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https://youtu.be/ayIBq77HvLA?si=ltEOwKVTXi74Q_qq
개인적으로 피아졸라의 ‘Oblivion’을 좋아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몽환적이고 서정적 분위기의 곡으로, 한 번 들으면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Oblivion, 양인모 연주 https://youtu.be/jsXvLooj1OM?si=kkw6gCfb9j3xCxVm
하지만 오늘 밤 밀롱가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우리가 익히 아는 탱고와는 다르다.
"Por Una Cabeza"나 "Libertango"가 4/4 박자 중심이라면, 밀롱가는 2/4 박자를 기본으로 하면서 당김음이 많아 탱고보다 훨씬 경쾌하고 리드미컬하다. 이러한 엇박자의 리듬이 춤을 출 때 발끝의 민감한 반응과 자유로운 움직임을 이끌어내어 더더욱 매혹적이게 한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밀롱가를 상상해 본다.
애잔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반도네온 속에서,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목소리의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 오늘 밤, 나는 그 옛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밀롱가로 모여든 이민자 중 하나가 된다.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마주한 차이감과 소외감에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 모든 감정을 안고, 나를 위로해 줄 둥지를 찾아 이곳까지 흘러들었다. 모두가 낯선 얼굴이지만, 이곳에서는 내 목소리를 내고, 나를 보이고 싶다는 공통점이 있다. 음악에 몸을 싣고 낯선 긴장과 친숙한 설렘 속에서 함께 춤을 추며 이 밤을 보낸다.
낮에 수강했던 90분 탱고 수업조차도 매력적이다.
처음 만난 나의 파트너는 탱고에 진심이었다. 관광객 모드의 나를 한순간에 긴장시켰고, 재밌는 시간이 되겠거니 했던 마음은 그에게 누가 될까 덜컥 겁이 났다.
초보자인 우리들은 스탭과 기본 동작을 배우고 음악에 맞춰 왔다 갔다 했다. 파트너를 바꿔 가며 그가 리드하는 대로 스텝을 밟는다. 여자 파트너보다 남자 파트너가 부담스럽다. 눈을 바라보며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데 눈과 마음, 발이 따로 따로다. 시간이 흐르고 잘하는 초보자들과 진심인 수강생들이 자연스럽게 짝을 이룬다.
이들을 바라보며 탱고의 매력을 발견한다.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느껴졌다.)
“여인의 발끝 놀림과 속도를 통해서 농염함이,
반복되는 남녀의 밀착됨과 거리둠 속에서 긴장감이 느껴졌고,
여인의 솔로 댄스를 바라보는 남자 파트너의 눈빛에서
섹시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탱고는 왠지 다르게 느껴진다.
남녀의 감정과 음악, 그들의 몸짓과 거리, 시선과 고요함이 어우러진 하나의 언어였다. 이 언어를 배우기 위해 중국과 스페인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이들이 몇 달째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
오늘,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 언어의 알파벳을 조심스럽게 배우고, 'Hola'라고 인사 한 번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