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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Oct 25. 2024

사무실 밖의 시간도 빠르게 흐른다는 깨달음

갭이어 다섯째 달

불현듯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깨달았다.

한두 달은 시간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적은데, 서너 달은 왠지 하나의 마디를 이루는 것처럼 크게 느껴진다. 분기별 감각인지, 4박자 감각인지, 공연의 사이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유의미한 완성의 감각을 지닌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완성의 시간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그보다는 무엇도 이루어낸 것이 없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온다. 항상 무언가를 이루거나 달성하면서 산 것은 분명 아니지만, 의의로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런 가운데 드라마에 빠졌다.

나가기도 싫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것도 없고, 청소와 빨래도 아무리 구역과 종류를 구분해서 반복한다 해도 일주일에 이삼일을 넘기기 힘들다. 나가지 않으니 빨래거리도 줄어든다. 게다가 나름의 프로젝트였던 걷기도 끝이 난 시점이었다.

시작이 좋았다. 친구에게 추천받은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를 시작으로 [시그널], [비밀의 숲 1, 2]로 이어지는 시청이 ‘드라마 시청 행위’에 대한 만족감을 최대치로 높여 주었다. 인기도 있고 평도 좋았던 드라마들을 이제야 몰아보는 게 그저 가만히 앉아 눈만 굴리고 있어도 무언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의미는 가끔 만족스럽지 않았거나 재미없는 무언가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되는 말이니 만큼 의미 만으로 표현하기에는 미안하다. 드라마의 타당한 설정, 독보적인 캐릭터들, 치밀한 설계, 적절한 감동과 인간의 유치함, 이상향 등이 응집된, 분명 모든 것들이 치열한 스터디와 고민을 통해 만들어냈을 것이 분명한 여기와는 다른 세상. 그 세상이 재미있고, 흥미롭고, 신나고, 감동스럽고, 가치 있었다.

물론 간혹 성에 차지 않는 드라마가 있기는 했지만, 프로그램이 널리고 널린 OTT 세상에서 심사숙고해 고른 만큼 망작은 없었을뿐더러, 이걸 끝내고 나면 다시 잘 고르면 된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본자세가 세팅되어 있었다. 무리라면 16부작을 이틀에 몰아 보거나 그보다 좀 짧은 시리즈는 하루에 몰아 본다든가, 재미가 좀 없어도 한 번 시작하면 중간에 하차하지 않는 이상한 성격 때문에 눈과 뇌가 쉴 시간이 없다는 것 정도. 책상 의자에 앉아 쉴 새 없이 영상을 보고 있는 모습은 뭐랄까... 마치 일이나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 같아 가끔 나 자신에게 기가 차는 순간들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만족스러운 시청 행위도 몇 편이 끝나고 나면 현타가 찾아오곤 했다. 나 이렇게 집에 틀어 박혀 영상만 보고 있어도 되는 거야? 진정 이게 내가 바라는 휴식의 모습이야? 이런 생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그러면 누군가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백수의 권리야, 그럴 때도 있어야지 라며 솔솔 바람을 넣어준다. 그래, 그래봐야 난 이제 초보 자유인(백수란 말은 스스로 안 한다)이란 말이다! 드라마를 그러다 아주 가끔 영화를 몰아보는 시간은 계속되었다.


반면 사람들은 참 바쁘게 살고 있었다.

내가 일로 바쁘게 살고 있을 때는 나만 바쁜 줄 알았다. 한 다리 건너의 사람들은 어찌나 여유를 잘 즐기며 사는지 부럽고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내가 시간이 많은 상황에 놓이고 보니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많아 여유를 즐긴다 생각했던 사람들도 실은 같은 시간을 쪼개서 사람을 만나고, 흥을 즐기고, 자신을 위한 활동을 하는 거였다. 그만큼 더 바쁘고 꽉 차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다행히 허리통증이 어느 정도 완화가 되어가면서 4월 마지막 주부터 다시 시작한 필라테스가 몸에 활력을 주는데 한몫했다. 그리고 봄이라는 계절답지 않게 해가 이미 뜨거워졌지만 드라마를 보지 않는 시간에는 외출을 위해 간간히 갤러리 탐방이나 영화 시사회, 친구와의 약속 등 일정을 잡았다. 그동안은 먼저 얼굴 보자는 사람과의 약속을 잡으면서 수동적으로 시간을 보낸 편이었다면, 조금씩 이 시간에 익숙해지면서 뭔가 대단하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우연치 않은 계기로 갭이어 멘토와의 정기 모임을 시작했다.

구성원은 단 둘 뿐이었지만 2주에 한 번씩 만나 그간 경험하거나 생각한 것에 대해 나누는 시간이었다. 소스가 일상생활이든 영상물이든 책이든 과거의 기억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했다. 시작은 하도 말을 안 하니 사용하는 단어가 줄어들고 소리가 머리와 가슴에서만 웅웅 거리다가 사라져 버리는, 뭔가 퇴화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는 나의 토로였다. 내 말에 우리끼리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을 만들어 볼까요 라며 스스럼없이 나의 멘토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속으로는 쑥스러움에 잠시 머뭇거린 것도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퇴사와 갭이어, 드라마와 직장 생활, 글쓰기와 피아노 연습, 저속노화와 인간의 죽음, 멘토의 프로젝트 등 주제는 만날 때마다 언급되는 것도 있고 달라지기도 했지만, 매 시간 충분히 풍성하고 살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퇴사 후 깨달은 게 있다.

나도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것을, 대화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라면 가끔은 발화하여 얘기하는 것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일을 하면서는 필요에 의해서 해야 하는 많은 말들이 있었고, 그게 아니라면 보통은 듣는 편에 속했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대화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끝이 났다. 이건 성향 탓이기도 하고, 개인사가 단조로웠고,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충분히 흥미로웠던 탓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은 이상하리만치 발화하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는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적절한 반응을 하는 것조차 삐걱거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더 듣기에만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되짚어 보면 나도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분명 대화를 깊이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달의 목표는 4월에 업로드를 시작한 이탈리아 여행기를 일정대로 끝내고 브런치북을 출간하는 거였다.

미션 클리어! 여행기 [보석상자 같은 이탈리아] 

번외의 얘기지만, 올봄에 다녀온 이탈리아의 소도시들이 얼마 전 방송을 시작한 [텐트 밖은 유럽-로맨틱 이탈리아]에서 출연자들이 다녀온 곳이다. 예고 보면서 낯익은 장면에 괜히 반가워 방송을 챙겨봐야겠다 다짐.ㅋㅋ


다음 목표는 처음으로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하는 것으로 세웠다. 여행기를 쓰면서 가능한 매일 비슷한 시간에 글쓰기를 했는데, 연재는 그런 하루하루의 루틴이 모여 일주일에 리듬감을 주는 행위이자 노력이었다. 브런치 스토리에서는 구독자와의 약속이라고 했지만, 미미한 나의 시작에 그건 다소 거창하고 나의 습관 들이기였다. 처음으로 정해진 날짜에 글을 한 편씩 올린다는 것은.

글은 몇 년 전 지인에게 매주 한 번씩 이메일로 보냈던 내용으로 정했다. 이미 지난 시간에 쓴 글이지만, 바쁘게 살던 직장인의 하루가 들어 있거나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한 단상들이라 비단 지난 시간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메일의 유일한 수신자였던 이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더니 너무나 흔쾌히 동의와 함께 응원을 더해주었다. 누군가에게 읽힌 글이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니 손 볼 곳이 눈에 많이 띄어 결론은 일주일에 두 번 업로드하기 위해 꾸준히 책상에 앉아 글을 들여다봐야만 했다. 의지를 갖고 행한, 단 한 번도 귀찮지 않은 조용한 루틴이었다. 그리고 그 소소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흔적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자 감사의 대상이었다.  

첫 번째 연재 브런치북 [나래에게 보내는 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내 시간은 꽉 조여있는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잠깐의 여유를 통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는데 지금의 시간은 뭔가 헐겁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헐겁고 스트레스라고 느낄 만한 어떠한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복에 겨운 소리인지, 얼토당토않은 소리인지 가끔은 그게 오히려 나에게 스트레스이다. 이렇게 스트레스 없이 지내도 되는 건가... 싶은 스트레스. 물론 그런 생각은 찰라이기도 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그 필요는 어디에서 오고 누가 판단하나요) 말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양손 가득 움켜쥐고 있는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하염없이 흘러나가는 느낌처럼 빨리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기는 했지만, 그건 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놀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아까운 거였다. 그리고 다행히 지난달의 무기력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나의 일상은 슬그머니 안정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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