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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Oct 18. 2024

노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어요

갭이어 넷째 달

퇴사 후 첫 당황스러움에 맞닥뜨렸다.

고작 넷째 달.

일상에서 벗어났던 여행을 끝내고,

긴 휴가와도 같았던 출퇴근 없는 하루가 특별함이 아닌 일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신체적인 문제에서 시작된 것으로 진단한다.

집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시작되어 여행하는 내내 고통을 주었던 허리와 엉덩이 통증과

날이 따뜻해지는 여행 막판에 시작된 환절기성 비염이 집에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비염에 더해 무엇 때문인지 모를 이유로 수면 중 깨는 순간들이 늘어났고

그래서 잠의 질이 확연하게 떨어졌다.

게다가 아침에 나갈 일이 없으니 몸이 제멋대로 시차 적응의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계속 늘어지기만 해 아침을 훌쩍 지나서도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이 만만치가 않았다.

허리 통증 때문에 매주 2회 하는 운동도 거른 지 꽤 됐다.

덕분에 생활도 엉망이 되었다.

매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뒤적거리면서 하루가 갔다. 볼만한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이제 퇴사 특수도 끝나 약속도 줄어 나갈 일도 거의 없고,

심심해서 죽을 것 같은데 동시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렇게 악순환이었다.


물론 지루한 일상에 단비와도 같은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간혹 엄마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을 하고, 수다를 떨곤 했다.

이때 퇴사 후 처음으로 일하던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여럿 만났는데, 집과 같은 곳에 손님으로 찾아가 식구와 같은 이들을 만나는 그 순간이 내심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내게 달콤한 순간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면 다시 혼자였다.

혼자서는 뭘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심심하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동시에, 그것도 너무 강렬하게 나를 부여잡고 있는 것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한 친구는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지만,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드는 게 왜 자연스러운 건지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다.

그때의 일과를 보면 거의 수면(중이거나 준비 중이거나 깨어나는 중이거나), 식사, 청소로 이루어져 있다. 뭐 하나 진득하니 하는 것도 없고, 이것저것 몸은 종종거리면서 정신은 나른해하고 있었다.




이달의 목표는 늘어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세운 거였는데, 첫 번째가 몸을 일으키기 위한 한강변 따라 걷기였다. 찬 기운을 마시는 상쾌함과 건강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뿌듯함을 느끼기 위해 연말연시에나 하던 걷기를 이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혼자 걷기도 하고,

친구와 수다를 떨며 걷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동쪽으로 갔다.

그때만큼은 바깥공기를 쐬고 햇빛을 받으며 광합성을 하고,

계절에 조금씩 바뀌어 가는 물과 풀과 나무를 눈으로 느끼고,

음식에 감탄하며 식사를 하고,

친구를 통해 시답잖은 바깥 소식을 들었다.

그러다 어느새 날이 더워지고 갈 만큼 갔다는 생각에 가을을 기약하며 걷기를 마무리했다.  

길이 너무 예뻐서 가을엔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는 이탈리아 여행기를 브런치스토리에 주 2회 업로드하는 거였다. 기록이 충실하지 않았던 탓에 기억과 감상이 옅어지기 전에 남겨두어야만 했던 이유도 있다. 몇 편으로 구성할지를 고민하고, 각 편마다 사진을 고르면서 가볍게 내용을 적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작성이 된 후 서랍에 있는 글을 추가 작성과 교정을 함께 진행하면서 업로드 했다. 마음먹은 이후 가능한 매일, 조금씩이라도 책상에 앉아 원고를 열고 끄적거리든 수정하든 무엇이든 하고자 노력했다. 다행히 아직 끈기는 남아있었다.

이탈리아 여행기 


그렇게 업로드를 시작한 후 처음 겪는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저녁 6시 직전에 올린 글이 갑자기 조회수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글을 올린 후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주기적으로 조회수를 확인하던 때였다. 다음에서 유입된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여기저기 뒤져 보니 해외여행 코너에 내가 올린 글이 게시가 됐다.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늘어나는 그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의 놀라움이란! 포털 메인의 힘을 실감했다. 하지만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놀라움과 흥분도 잠시 라이킷은 없고 다른 글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에 다시 우울해졌다. 내 글에 대한 실망감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는 생각을 가까스로 잡아끌었다.


심심함과 게으름, 이로 인한 혼란스러움이 지배하고 있던 이때에 브런치스토리와 걷기라는 목표가 없었으면, 언제 일어섰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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