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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Oct 11. 2024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갭이어 셋째 달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삶의 모습이 있지만 내 인생은 어린이, 학생, 직장인 셋으로 구분된다. 막 유행이 시작되던 휴학을 했던 적도 없고, 입사나 이직을 위해 공백기를 가졌던 적도 없어 항상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야 나름 복닥복닥 한 사연이나 감정이 널을 뛰는 날이 없었겠는가만 전체적으로 보면 참 단순하고 나름 안정적이었다. 작년 연말 퇴사를 하고 무소속의 시간을 지내다 보니 그동안 내가 당연하다 느끼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다. 내가 가족과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고 지원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첫 번째는 우습게도 건강보험과 국민연금보험이었다.

건강보험은 직장가입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자연스레 갈아탔지만, 크지 않은 변화에도 놓치는 건 없는지 친숙하지 않은 정보에 신경을 써야 했다. 국민연금보험은 좀 더 고민과 선택이 필요했다. 이 나이에 밑도 끝도 없이 퇴사를 결정한 딸내미가 탐탁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걱정스러우셨던 아빠의 유일한 요청이 국민연금을 계속해서 내라는 거였다. 기금이 고갈되네 마네 하는 국민연금을 계속해서 납입하면 좋겠다는 아빠의 얘기를 들으며 정말 아빠답다고 생각했지만, 밥 먹다 말고 이미 한참 설전을 치른 그 자리에서 하네 안 하네 하면서 언쟁을 이어갈 일은 아니었다. 그러겠노라 약속을 했으니 이어가긴 해야겠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1년인가 일정 기간 동안 제공되는 정부 지원금을 놓치기도 아까웠다. 왜 이런 문의전화는 한 번에 목적지에 가 닿질 않는 걸까. 건너 건너 연결된 전화상담을 통해 보조금 확인과 매 달 납입할 금액을 확정했다. 역시나 익숙하지 않은 정보를 전화를 통해 듣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다. 어쨌든 미션 클리어. 


그리고 납입하던 각종 공과금에서 단돈 몇 십원이라도 자동이체나 온라인 고지서 할인이 있는 것들은 자동이체와 온라인 고지서 수령으로 돌렸다. 그간은 일일이 신청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랬다가는 오히려 뭐가 나가고 안 나가는지 알 수 없다는 나만의 구실을 들어 청구서가 오면 내곤 했었다. 아마도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한 관심을 가진 김에 몇 십원이라도 불필요한 지출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ㅋ 그래가면서 배달음식은 시켜 먹는 이 아이러니라니. 이것도 해결. 


그다음은 연말정산. 직장에 다닐 때도 개인서류는 본인이 채워 넣어야 하지만,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영팀에서 미리 안내가 오고 내가 할 일은 고작 클릭 몇 번으로 끝이었다. 게다가 매년 하는 일임에도 헷갈리는 게 있으면 경영팀이나 주변 동료에게 물어보면 됐다. 그러고 나면 경영팀에서 검토와 마무리가 되고 일정 시간이 지나 돈을 조금 돌려주거나, 빼 가거나 하면 난 공돈이 생겼다며 잠깐 기쁘거나 도둑맞았다며 잠깐 열받거나 하면 완전 끝! 하지만 올 해는 작년까지와 달리 5월에 종합소득신고라는 걸 알아서 해야 했다. 그나마 자애로운 전 동료의 조언으로 1월에 미리 자료를 챙겨놨다가 5월에 신청을 했는데, 생각 없이 있다가 혹여나 잊어버릴까 달력에 표시해 놓고 중간중간 혼자 리마인드를 하고 있다 보니 가이드가 없다는 때아닌 외로움이라니... 그래도 해결. 


하지만 제대로 현타는 건강검진에서 왔다. 멀쩡한 데가 많지만 나이에 걸맞게 어쩔 수 없이 정기적인 추적을 해야 하는 부분도 있는지라 매년 직장에서 추진하는 건강검진은 습관과도 같았다. 매년 업체를 리뷰하고 전년도와 같은 곳에서 할지 변경할지 검토 후 특장점을 정리해 직원들에게 배포하고, 선택 항목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지만 소소하게 상의라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개인이 하자니 비용도 만만치 않고, 널려 있는 업체와 정보를 취합 검토하는 것도 일이었다. 신이시여, 저는 그동안 주변의 보살핌으로 참 쉽게 살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결국 전 직장 관계자 할인을 통해 해결하였으나 업체에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올 해가 마지막이라 하니, 내년에는 정말 멘땅에 헤딩해야 할 꼴이다. 


이 와중에 전세 계약기간도 만료되어 임대인, 임차인도 헷갈리는 마당에 집주인은 월세를 희망하네, 나는 감당이 안되네, 인상액은 얼마를 하네, 이사를 하네 마네, 이사한다면 어디로 하네, 대출을 하네 마네 하는 와중에 직장이 없으니 대출도 일이다. 다행히 서로의 형편을 참작해 조건을 재조정하고 일단 연장계약으로 일단락 지었지만, 퇴직금의 대부분을 남의 통장에 집어넣어야 했고 나는 이사의 수고로움 대신 가벼운 통장의 아쉬움을 감내해야 했다. 이 와중에 거주 비용 증가와 이로 인한 기회비용을 고려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아빠의 제안은 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는데, 자산만 놓고 본다면 타당한 선택이었지만 안 될 말이다. 다행히 엄마도 나와 같은 편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월급을 받는 직장이 없고 보니 정기적인 수입이 없어 은행권 대출이 어렵다 했던 배우나 스태프들이며, 예전에 몸 담았던 곳에서 대표님이 프리랜서 배우들에게 정기적인 월급처럼 출연료를 지급해서 덕분에 대출도 받고 결혼도 할 수 있었다는 사연도 떠올랐다. 

시스템이란 것이 사람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그 틀에 맞춰지지 않으면 열심히 살아도 삶이 참 고단하다. 




이달의 이벤트가 하나 있었는데 몇 년 만에(조카 결혼식은 처음인가? 사실 한 사람쯤의 축하 있어도 없어도 행복에 겨운 결혼식보다는 눈물을 덜어내지는 못해도 한 사람이라도 슬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장례식에 더 비중을 두는 편이다. 지금 기준으로 과거형이라 내일부터는 모르겠지만) 조카 결혼식이라는 집안 행사에 참석했는데, 이곳에서 예기치 않게 갭이어에 대한 응원을 받았다. 젊은이들과 교류하는 일을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워낙 나이에 비해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건지 제일 큰아버지의 제일 큰오빠가 동의와 공감을 표하며 나의 결정을 응원해 주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옆에 앉은 아빠가 같이 듣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반가웠다.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전혀 없으나 설전 이후 단 한 번도 티를 내지는 않지만 아마도 자식 걱정을 하고 있을 아빠에 대해서는 다소 떳떳하지 못했는지도, 아니면 그를 위해서는 타인의 공감 어린 반응이 필요하다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퇴사 이후 나는 부모님과 있을 때 한껏 더 신나고, 힘차고, 당당하고, 수다스러워진다. 나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이달 세운 목표는 아쉽지 않은 이탈리아 여행하기가 있었는데 반은 성공, 반은 실패였다. 가을쯤으로 생각하다가 두 번에 걸쳐 일정이 앞당겨지면서 후다닥 가게 된 여행이었다. 급 조정된 일정으로 확정한 것 치고는 가보고 싶었던 곳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잘 찾아갔다는 점에 있어 성공이었고, 기록을 하기는 하였으나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닌 데다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기록에 소홀했다. 기억과 사진은 남아있으나 세세한 감정에 대한 충분한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 다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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