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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Oct 04. 2024

노는 게 세상에서 가장 쉬웠어요

갭이어 둘째 달

다른 달에 비해 날이 적기도 하고, 중간에 음력설까지 있어 더욱 짧게 느껴졌던 2월이자 갭이어 두 번째 달은 그 덕분인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당시에는 눈앞에서 시간을 도둑맞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름 꽉 채워 한 달을 보냈다. 그간 바쁘다는 이유로 못 만났던 이들은 못 만났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만나던 이들은 자주 만나왔기 때문에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거의 하루 걸러 약속이 있었다. 어떤 때는 연이은 약속으로 한 주를 매일 외출했다. 무수입 기간에도 큰 비용을 할애해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던 필라테스는 주 2회를 빼먹지 않았고, 겨울이라는 계절과 다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뤄두었던 병원 순례와 커튼 빨래까지 해치웠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로 시간을 채우며 잠들지 않은 밤과 깨어있지 않은 아침을 즐겼다. 

예상치 못한 밤 시간에 아파트 단지에 들어왔다 이내 빠져나가는 오토바이 소리로 야식을 시켜 먹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그래봐야 짐작이지만), 이미 햇빛이 방을 채운 시간에 눈을 뜨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의 느긋한 아침을 내일도 누리리라 생각했다. 덕분에 이때부터 지금까지도 일주일에 하루 오전 6시부터 9시까지만 가능한 재활용 쓰레기 배출이 큰 난제다. 출근하면서 내놓으면 되었던 별 거 아닌 일이 쓰레기를 내놓기 위해 기상시간을 당겨야만 하는 상황인데, 그 한두 시간이 여간 어렵지가 않은 거다. 결국 제시간에 못 일어나 한 주, 두 주 더 쓰레기를 집에 묵혀 두거나, 눈 뜨자마자 겉옷만 대충 걸치고 후다닥 내려갔다 올라와 다시 잠에 든다.


적지 않은 시간 걱정을 넘어 두렵기까지 했던 ‘내가 잘 놀 수 있을까?’가 참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누군가 그랬다. 노는 건 적성도 체질도 필요하지 않은 거라고. 이제야 그 말을 믿게 되었다. 


연말이면 항상 찾아오는 올 한 해 일 외에 개인적으로 한 게 너무 없다는 허무함(분명 있었을 텐데 왜 그 시점만 되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사람 우울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에 몇 년 전부터 이번엔 달라지겠다는 알량한 목표를 세우고 했던 걷기. 사실 걷기가 뭐 목표까지 세우고 할 만한 행위인가 싶지만 운동을 제대로 한다는 느낌으로 다리와 발에 무리가 되지 않는 하의와 신발을 갖추고,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이어폰을 챙겨, 음악과 운동 어플을 켠다. 일단 시작하면 금세 만족감과 흥이 나는 걷기이지만 집을 나서기가 왜 이리 어려운 건지 한 열 번은 다짐을 해야지만 한두 번 나가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차갑고 맑은 공기가 뇌를 씻어주는 느낌이라 겨울의 걷기를 좋아한다. 어쨌든 2월 여느 겨울과 마찬가지로 몇 번 걸었다. 


이 달에 가장 좋았던 것은 너무나 여유롭고 온전히 부모님과 보낸 설 연휴였다. 며칠을 매 끼니, 메뉴를 요리조리 구상해 챙겨 먹으며 함께 했다. 이 나라의 수많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공연일을 하는 이들에게도 휴일이나 연휴는 달력의 구분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최근에야 설과 추석에 공연을 쉬기도 하지만 (라떼는 말이야...>.<) 명절에도 당일 하루 또는 반나절 쉬어가는 게 전부였던 기간이 더 길다. 심지어 토요일에는 두 번 공연하던 것이 당연하던 때도 있었으니까. 명절은 시간 맞춰 치러야 하는 행사였고, 운이 좋아 시간이 좀 더 나는 경우에는 몸도 머리도 혼자만의 휴식이 최우선이었다. 그러다 시간을 길게 할애할 있는 때가 되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여행을 가곤 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이번에 갭이어를 보내면서 부모님과 시간을 가능한 많이 보내자는 바람도 있었던지라, 그 시작이었던 음력설은 조금 유난을 더하자면 마치 어렸을 때의 명절 같았고, 마음먹었던 소박한 모습의 명절다웠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혼자 또는 사적 관계에서만 지내자니 

생크림을 위에 올린 카페라떼를 책상 위에 쏟아 핸드폰과 키보드를 거쳐 뒤범벅된 커피와 생크림이 탁자 밑으로 흘러내려 거실 바닥을 적시고,

점심을 챙겨 먹는다며 삶은 메밀면을 찬 물에 씻다가 앗차 하는 순간 면이 개수대로 넘치고(난 음식물쓰레기를 병적으로 괴로워한다),

가습기 세척하다가 손을 베어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나서 

이제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지 생각한 사고 많은 날. 혼자 이 상황을 수습하면서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그저 매 순간 어이없음과 나의 어설픔에 웃음이 날 뿐이었다. 


게다가 나의 감정과 생각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는 선배 또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그들의 공감과 격려와 응원이 

생애 전환기를 맞이한 것과 같이 들떠 수다를 주체할 수 없는 나를 살아나게 했다. 오랜만에 신이 났다. 


갭이어 두 번째 달을 맞으면서부터 매달 개인적인 목표를 한두 개씩 세웠는데, 그 첫 번째가 브런치스토리에 내 글을 오픈하는 거였다. 

2월 초부터 여행지에서 적어둔 내용을 바탕으로 글을 하나하나 올리기 시작했고,

2월 중순 작가 신청을 해, 2월 말 작가 등록을 수락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드디어, 마지막 주가 시작하는 일요일 첫 글을 브런치스토리에서 발행했다. 

혼자만의 첫 번째 미션 클리어! 기념비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좋았던 것은 설 연휴였지만, 가장 벅차올랐던 순간은 수락 메일을 받았을 때와 라이킷 1이 되었을 때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다. 나의 갭이어가 성공적일 거라는 신의 계시 아니 우주적 신호를 찾은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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