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굴레에 빠져 전혀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결정이 필요했다.
“저… 잠깐 시간되세요?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퇴사를 알리는 무언의 공기가 있다.
담담한 어조 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떤 결연함.
왜 퇴사를 알리는 첫 장면은 항상 눈물로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우리들은 그랬다. 다음이 준비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시원하기만 하지는 않은 퇴사였고, 답을 찾을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고, 남기고 떠나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그리고 마주하는 동료들의 퇴사 이유는 무엇이든 다 말이 되고, 이해가 됐다.
그게 자신 때문이든, 남 때문이든, 남들이 모인 조직 때문이든 대부분의 결정은 본인을 위한 선택이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료들의 퇴사를 말릴 수 없었고, 말려서도 안된다 생각했다. 그저 그들의 내일을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의 즐거운 순간과 괴로운 순간을 공유하고, 소소한 일상을 함께하던 동료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타격이 크다. 그리고 남겨진 자의 마음과 남겨진 일을 추스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나도 퇴사를 한다면 나의 동료들과 같은 근사한 퇴사의 이유를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뜻대로 되는 건 없다. 머리가 결심을 미적거리고 있는 사이 마음과 몸이 재촉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멈추고 싶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 같은 두 가지가 있었다. 아직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 때.
하나는 결정에 대한 확신이었다.
하지만 확신 같은 건 없었다. 말을 꺼내고 며칠 만에 마음이 돌아설지 알 수 없었다. 머물면서는 복구할 수 없는 상태인가, 지금 힘들다고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하는 건 아닌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공백의 시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끊임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퇴사만이 답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퇴사 후 세 달 정도… 시간이 지나 엄마가 불현듯 물었다.
“아쉽지는 않아?”
“아니, 아쉽지 않아.”
“그럼 됐네.”
그럼 된 거다.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재정상태의 점검이었다.
최대 1-2년은 쉬어야겠다고 여유를 부리려니, 스스로에게 ‘돈’을 이유로 어떠한 조급함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가와 함께 기본적으로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나의 지출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가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시작할 때는 ‘내가 놀 수 있는가’가 가장 큰 관건이었지만, 지내다 보면 경제적인 부분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직장인스럽게 엑셀 파일을 열었다. 지출을 필수항목과 선택항목으로 구분하고, 다시 각각 고정비용과 변동비용으로 구분했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내가 사는 모습에서는 의외로 선택항목 보다 필수항목이 훨씬 많았다. 즉, 항목 자체를 줄이거나 삭제할 꼬다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필수-고정비용은 (가족에게 들이는) 경조사비, 주거관리비, 공과금, 통신비, 보험료, 필수-변동비용은 식음료, 교통비, 문화비, 기타 잡비, 선택-고정비용은 (건강을 담보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운동, 선택-변동비용은 여행과 같은 식이다. 다시 봐도 항목 자체를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문화비를 필수에 넣을지, 선택에 넣을지 살짝 고민하는 정도였지만, 일단은 기존의 생활 패턴을 반영한 항목 구분이기 때문에 필수항목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그간의 지출 규모를 바탕으로 각각의 예상 월 지출액을 산출해 보았다. 필수-고정비에서는 해가 바뀌어 인상 가능성이 있는 규모도 가늠해야 했고, 선택항목은 반드시 유지하고 싶은 항목과 어느 정도 할애할 수 있는지 가늠했다. 어떤 부분은 과감하게 예산을 확보하고, 다른 어떤 것은 대체재를 고려해 야심차게 줄였다.
그렇게 최소한의 비용일 때 1, 2년을 살려면 총액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아니다. 현재 운용할 수 있는 현금을 기준으로 얼마나 쉴 수 있는지 따져 본 건가. 어쨌든 예상 지출규모에서 따지기 시작하는 것과 확실한 자산규모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이리저리 시소 타기를 했다.
결론은? 아무리 논리적인 척 재고 따져보아도 생각보다 줄일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이 정도 일 하다가 휴식을 갖고자 하는 나에게 스스로 짜게 굴고 싶지 않았다는 편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법적으로 보장되는 퇴직금이 있으니 당분간은 문제가 없다. 물론 투자개념 전혀 없는 직장인에게 최소한의 보루인 소소한 저축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한다.
그래도 아니면 다만 내가 퇴사를 앞두고 최소한 이런 행위를 해보기라도 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나름 진지했다.
퇴사 전의 재정 계획은 나름 타이트하고 야심찼지만, 지금까지 실제로 몇 달 살면서 내린 결론은 내가 생각보다 지출이 큰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지출 항목이 최소한인 대신 그 항목에서의 퀄리티를 낮추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저… 잠깐 시간되세요?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듣는 입장이 아닌 말하는 입장이 된 나의 첫마디는 담담했다, 아니 노력으로 담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담담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퇴사하려구요”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생각보다 더 심장이 쿵쾅거리는 일이었다. 마지막이라는 현실이 무겁게 훅 다가왔다.
그렇게 나의 선언은 끝이 났다.
거기에 나의 동료들과 같은 근사한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