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는 자연인의 영역을 제외하고 직장인으로서의 라이프 사이클이 있다.
그곳에서의 새로운 모든 것이 흥미로운 시기를 지나, 업무에서 스스로 책임지는 영역이 조금씩 생겨나고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 그리고 업무의 프로세스를 단순히 진행하던 것에서 역할 비중과 완성도가 높아진다. 자신의 성취감과 만족도 향상은 물론 조직의 성장 또는 안정화에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루틴이 된다. 혹자는 어느 정도 반복되는 업무를 수행하고 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나는 사람에 따라, 경험에 따라 그 수행 퀄리티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완성체는 없다. 나 스스로도 그랬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그랬다. 다만, 그걸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몇 년의 경력이 쌓이면 사람마다 방향성이 나뉘는 조직이 있다고도 한다. 업무에 매진하며 직장 내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할 것인지, 아니면 평탄한 직장생활을 바탕으로 가족과 개인생활에 더 비중을 둘 것인지. 그 갈림길에서 개인은 선택하게 된다고. 고작해야 사회생활 몇 년 차에 친구에게 들은 그 얘기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무엇이 좋은지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생각이라 할 수 있지만, 개인의 가치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도 할뿐더러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 조직을 어느 한 가지로 정의 내리거나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운이 좋게도, 나에게는 몇 년 단위로 도전 과제가 있었고 그래서 주기적으로 씁쓸함을 필수로 동반하는 재미와 성취를 지속해 갈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를 협업자로 온전히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저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역할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덧 팀장이라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팀장이 되기 위해 달린 시간은 아니었지만, 절대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었다. 하나의 마디가 끝난 뒤 변화를 필요로 하던 시점이었고, 그때 만나게 된 새로운 과제이자 도전이었다. 변화는 꾸물거리며 오기도 하지만,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들이닥치기도 한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감당할 수 있는 변화가 있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도 있었다.
사람이 모인 조직에도 역시 라이프 사이클이 있다.
한창 젊은 조직으로 쌩쌩 돌아가며 성장하는 시기를 지나, 안정화 시기를 지나, 성장하고 성숙한 사람들의 일부가 빠져나가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는 시기가 있다. 그러면 또 그들에 의해 조직은 가열차에 돌아간다. 그렇게 사람들의 들고남은 계속해서 파동을 일으키고 변화를 불러오며, 이것이 반복된다. 바람직한 조직은 우상향 계단 형태로 변화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바라건대 올라서는 그 한 계단의 높이가 너무 높거나 너무 낮지 않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고대 제의에서 시작되었다는 연극은 인간의 기원(祈願)이기도 하고, 그 기원의 형상화(形象化)이기도 하다.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너무나 아날로그적인 연극판은 그 어느 산업과 장르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곳이다. 기술적인 면이 아닌 사람들의 의식과 감수성이. 때로는 힘겨운 이 변화가 분명 옳은 곳으로 세상 사람들의 인식과 감각의 변화를 이끄는 것이고 그걸 증명하는 것이라 믿었다. 내가 있는 곳은 연극이 전부인 세상이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걸 깨달은 이후부터는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기 위한 너와 나의 타협, 내 안의 타협이 필요했다. 얼마만큼의 이해가 그리고 얼마만큼의 인정이어야만 충분한 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경계 안과 밖의 문제는 아니었다.
모든 일, 직장, 사람은 각자 나름의 사연이 있다. 사연의 크고 작음, 무겁고 가벼움은 비교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우리들에게도 이러저러한 사연들이 많았다. 개개인의 사연이기도 하고, 크고 작은 공동체의 사연이기도 하고, 국가 차원의 사연이기도 하다. 나의 일이 너의 일이 되고, 그들의 일이 나의 일이 되고, 너의 일이 우리의 일이 되기도 하면서 섞이고 꼬이다 보면 이게 시작은 어디인지, 매듭은 어디서 풀고 어디서 맺어야 하는지, 그 끝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상처와 위로를 주고받는다. 그 와중에 가장 다행인 것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상처만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이곳에서의 시간은 지구가 자전하며 만들어내는 하루 단위가 아니라, 공연을 만들어내는 ‘완전한 몰입기 3개월’이라는 단위로 셈이 된다. 펼쳐지는 시간이 아니라 마디의 시간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공연 제목으로 불린다. 그 시간들을 무작정 사랑했다. 그러다가 팀장이 된 후에는 이 '완전한 몰입기 3개월'이 계속해서 중첩되어 쌓이면서 뭉텅이 시간이 되어 버렸다.
드디어. 어느 순간.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른 직장인들도 그렇다면 할 말은 없다.
나름 사람을 꽤 잘 살피고, 일도 꽤 하는 프로듀서였지만 좋은 팀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난 마당에 너무 후할 필요도 없고, 너무 자책할 필요도 없으니 반의 성공, 반의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다. 아니다. 51의 성공과 49의 실패로 믿고 싶다. 무엇이 되었든 나의 다음을 위한 동력은 필요하니.
팀장이라는 역할 놀이를 해야 했다.
우리 팀이라는 의리, 사람에 대한 책임감으로 많은 것에 애를 쓰고 무리를 했다.
우리 안에 너와 나의 경계를 명확히 인지해야 했고,
세상과 사람의 변화와 다름을 보다 인정해야 했고,
다름과 상처에 좀 더 단단해야 했고,
직업을 직업으로 볼 줄 아는 거리두기도 알아야 했다.
조금씩 서툰 과정과정에서 감정 소모는 많았지만, 그걸 채울 감동의 순간과 만족감은 줄어들었다.
그렇게 내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현장의 최전방에 있지는 않지만, 전체를 보고, 방향성을 제시하고, 의미를 공유하고,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지원하면서 팀을 운영하는 팀장이라는 역할에 있어 이전과는 또 다른 재미와 가치를 느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함이 점점 사라지고, 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일하는 시간에서 행복의 흔적을 점점 찾기 어려웠다. 팀장이 되지 말아야 했던 걸까, 아니면 그럴 때가 되었던 걸까.
나는 연극인이었지만, 예술가는 아니었다.
그저 예술의 어느 끝자락에 살짝 고리를 걸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 끝을 무디게 할 수 없었던 것은 나의 허영이었을까, 갈망이었을까, 열망이었을까.
조금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허영,
나는 조금 다르다는 자만,
막연한 것을 향한 인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자그마한 감정들에서
이제 깨어나기로 했다.
달콤쌉싸름하고 긴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