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환영받지 못한 아이, 도망친 청년, 해고된 중년

인생은 전화위복

by 이영
“너 때문에 너네 아빠랑 결혼한 거야. 너만 아니었으면..”


심리학에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삶에 대처하는 태도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성된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유산을 고민했다. 환영받지 못한 최초의 감각은 내 무의식 어딘가에 깊게 새겨져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융은 ‘무의식이 현실을 창조한다’고 했다. 가령 무의식에 어떤 두려움이 자리 잡으면, 우리는 그 두려움을 확인하게 만드는 현실을 반복해서 경험한다. 바람피우는 연인만 계속 사귀거나, ‘부모처럼은 되지 않겠다’ 다짐했는데도 어느 순간 너무나 싫던 그 모습을 닮아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자괴감으로 영원히 괴로워해야 할까? 다행히도 그렇지 않다. 명상, 심리학 심지어 이젠 과학에서도 말한다. “관찰자가 되어 무의식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라. 그럼 억눌린 감정이 풀리고 현실이 달라진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불편해도 서운해도 말 못 하고 참고 참다 갑자기 잠수를 타서 관계를 끊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끝까지 외면했고,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짝사랑에만 매달렸다. 그러면서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비통해했다. 사실은 버림받는 게 두려워 내가 먼저 도망쳤다는 걸 알지 못했다.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환영받지 못한 무의식은 어딜가나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속삭였고 결국 나는 항상 성취를 향한 마지막 문턱 앞에서 자꾸 돌아섰다. 이를 모르고 단순히 노력이 부족했다고만 생각해 더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실패는 반복됐고 ‘어차피 해도 안 된다’는 무의식은 점점 커졌다. 40대에 들어 명상을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이 패턴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추행, 부당해고를 당한 전 직장은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해고될 수 있었다. 사무실도 따로 없었다. 거래처 어느 부서의 남는 책상 하나가 내 자리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나도 그 회사 직원 같았지만 실상은 언제든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외부인이었다.


처음엔 출근할 때마다 눈치가 보였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시방석에 앉은듯한 그 불편한 감정에 무뎌져 아무렇지 않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그날, 직원들은 모두 출입 카드를 사용하는데 나만 혼자 지문을 찍고 외부인임을 확인하며 사무실에 발을 내디딘 그 순간, 너무 익숙해 이젠 느껴지지도 않던 어떤 감각이 불현듯 알아차려졌다.


'이 느낌, 낯설지 않아. 뭐지..?’ 그러자 떠올랐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버림받을까 두려운 무의식을 알아차리고 풀어주기 위해 언제든 해고(버림)당할 수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거였다. 엄마 뱃속에서 느꼈을 환영받지 못하는 그 느낌을 매일 되새기면서도 알지 못하다 4 년 만에 비로소 처음으로 의식한 순간이었다. 억눌린 감정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게 이거구나! 머리에 상쾌한 바람이 스쳤다.


이젠 나도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회사를 그만둘 순 없었다. 대안을 찾으며 계속 다니다 보니 어느새 2년이 흘렀다. 그랬더니 이번엔 회사가 나를 버렸다. 처음엔 분하고 억울했다. 경제적인 걱정도 컸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선 묘한 해방감이 들며 흥미롭기도 했다. 늘 내가 먼저 버리고 도망쳤는데 내가 가시방석을 못 버리니까 삶이 버려주잖아!


물론 40대 중반에다가 꼭 돈을 벌어야 하는 형편임에도 백수인 지금 상황이 좋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아니 어쩌면 진짜 안 좋아졌을 수도 있다. 혹시 이번에도 현실에서 도망치려 ‘40대 중반에 백수? 이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만들 수 있어!’하고 자기 최면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매일 나를 점검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전과 다르게 회사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늘 참기만 했던 분노를 고소로 드러내기도 했다. 확실히 난 달라졌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제 먹고사는 문제만 남았는데, 어딜 가든 근로기준법 적용조차 안 되는 전 직장보다는 나을 테니 전화위복 확정이다!

keyword
이전 22화자궁근종이 알려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