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열지 마! 그 냄새가 나기 전까진
보글보글, 도도도돌, 두둘두둘.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당최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당장 열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열면 특유의 향이 날아갈지 몰라, 놀라서 달아날지 몰라.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시간을 벌어보다가 괜히 칼을 쥐어 보고, 싱크대 위 부스럼을 정리하기도 한다. 정확히 몇 분 후라고 말하기엔 어렵지만, 여하튼 그 냄새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냄비 뚜껑을 열어 볼 시간이 말이다.
맛있어져라!
그 냄새의 역사는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감자, 당근, 양파, 양송이, 닭가슴살을 크게 크게 썰라는 R언니의 주문이 이어졌다. 그때만 해도 난 요리에 관심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칼질 조차 하지 못했던 때라 채소를 요리조리 옮겨보면서 칼을 대는 시늉을 했다. 옆에 있던 B언니가 어휴! 이리 줘! 라며 칼을 가져갔다.
"이렇게 크게?"
"응, 아니 아니 더 크게. 아주 큼지막하게, 그러니까 (손가락 마디를 내보이며)이만하게"
물러난 나는 하릴없이 뒤에 서서 고군분투하는 두 언니들을 바라보았다. 제일 막내인 내가 이래도 되나 싶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얍!"
두 언니가 번갈아가면서 주문 아닌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더 맛있을 거라고 했다. 흡사 마녀가 기괴한 수프를 끓이다가 손을 휘휘 젓는 것 같았다.
"안돼! oo야, 아직 절대 열지 말고 기다려! 응?"
그새를 못 참고 뚜껑을 열어젖히려던 나를 향해 R언니가 다급하게 말했다.
조금 뒤, 투명한 뚜껑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자 R언니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냄비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드디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카레가루를 물에 개어 냄비 안에 넣고 휘휘 저었다. 냄비 안이 금세 카레 빛깔로 노란 물이 들었다. 물이 든 건 냄비만이 아니었다. 너무 반가운 그 냄새, 아니 그 향은 집안 전체의 공기를 물들였다. 그리고 인생 카레를 먹었다.
그 후엔 가장 자신 있는 요리로 꼽을 정도로 카레는 내게 친숙한 음식이 되었다. 덩어리는 무조건 크게 썰고, 절대 그 '냄새'가 나기 전까지 열어보지 말 것, 그리고 뚜껑을 닫고 맛있어지라는 주문을 욀 것.
카레를 끓일 때마다 늘 같은 과정과 생각을 반복한다. 그러다 칠 년이 지나고서야 이 알 수 없는 과정의 정체가 비로소 명확해졌다. '마크로비오틱' 요리법을 배울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재료들이 냄비 안에서 '합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죠. 다른 땅에서, 다른 기운으로, 다른 농부가 기른 이 식재료가 한방에 있는데 적어도 통성명할 시간 정도는 주는 게 맞지 않겠어요? 열어보지 말고 기다려야 해요."
"그리고 지금, 이 냄새를 잘 기억하세요. 집집마다 식재료와 집기가 달라서 이 냄새가 나는 시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뚜껑을 여는 시점은 이 냄새가 나는 순간! 지금이다! 이리 오셔서 맡아봐요."
그 순간, 마침내 잃어버린 한 조각의 퍼즐을 찾아 그림을 완성한 느낌이 들었다. 노란 빛깔과 각종 채소가 어우러진 먹음직스러운 카레 그림을.
냄비를 열어보고 싶은 이유
급한 내 성격은 주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기어코 뚜껑을 열어보려는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가 다급히 쫓아와서는 '아직!'이라고 외치는 건 예삿일이다. 사실 뚜껑을 열고 싶은 여러 이유가 있다. 냄비 속 내용물이 잘 섞이고 있기는 할지, 쪼그라들어 타버리진 않을지, 열이 고르지 않아서 아래위로 저어줘야 할 타이밍은 아닌 지. 그건 한 마디로 명료하게 설명하기엔 아주 복잡하다. 어떤 호기심과 궁금증, 우려와 걱정, 조바심이랄까. 참을성 없기로는 자타 공인인지라 나를 좀 아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호기심도 많고, 의욕도 많은 나는 일을 잘 벌이는 축에 속한다. 성질이 급해서 일단 벌여 놓고, 호들갑을 떠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좀 변태 같긴 하지만 더 솔직히는 호들갑을 떨어야 맘이 좀 편해진다.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일. 뭐든 호들갑부터 떨고 보는 내게 남편이 가끔 해주는 말이다. 이럴 땐 오빠같ㄷ...
이런 아름다운 일화의 궁극의 목적(?)대로라면 '급한 내 성격이 달라졌어요' 정도의 후기가 있어야 할 텐데, 애석하게도 주방 밖에선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산다. 나는 여전히 급한 성격에 쉽게 뜨거워지고 차가워지면서 일희일비하는, 호들갑을 떠는 데엔 일인자다. 그래도 주방에서 만큼은 평정을 찾으려는 내 모습에 스스로 대견해진다. 적어도 주방 안에서는 아래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 중이다.
우직하게 그 앞을 지키고만 있으면 된다
다른 것들이 만나면 '틈'과 '뜸'은 필수다
조바심은 금물이다
생각보다 그 안은 평화로울 것이다
희한하게도 카레는 하루가 더 지나야 맛있다
그 후로 수프만 생각했다
유난히 고요한 이른 아침, 냄비 뚜껑을 닫고나니 별안간 난데없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레와 수프는 매우 닮아있다. 양파를 볶아 달큼한 물을 내고, 거기에 각종 채소를 넣고 그들끼리 어우러져 나온 수분을 감칠맛 삼아, 다시 또 무언가를 넣고 뭉근히 끓여내는 것이 말이다.
갑자기 책 한 권이 떠올랐다. 냄비가 펄펄 끓고 있는 사이 책장으로 가서 찾아보았다. '2015년 봄이 오기 전 겨울, 나도 '수프'만 생각할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는 첫 장의 메모가 눈에 띈다. 사실 줄거리는 희미하고, 소설 마지막 장에 있는 '이름 없는 수프 만드는 방법' 부분이 떠올라서 다시 찾아보았다. 그 사이 냄비 안 채소는 어느덧 합방을 마치고 그 '냄새'로 나를 재촉했다.
그러니까 열어보지 말 것, 궁금해하지도 말 것, 주문을 외기만 하면 될 것, 다 잘되고 있을 테니까.
그 후로 카레만 생각했다
제일 좋아하는 카레 조합입니다. 이렇게 하면 실패는 없어요!
냄비를 달구고 기름을 살짝 두릅니다. 이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양파를 넣습니다. 토마토를 넣으면 더 맛있어져요.
코가 싸한 내가 없어지고 달큼한 냄새가 나면 감자, 당근 등 단단한 채소도 넣어줍니다.
뚜껑을 닫고 있다가 채소가 뒤섞인 조화로운 그 '냄새'가 퍼지면 닭가슴살, 양송이를 추가로 넣습니다.
닭가슴살 냄새(?)가 베어난다 싶을 때까지 역시나 기다립니다.
중요합니다. 맛있어지라는 주문을 외는 겁니다.
*저는 주로 이 기다림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십니다.
물에 카레를 개어 냄비에 부어 뒤섞어 주고 뭉근히 끓이면 완성!
오랜만에 <그 후로 수프만 생각했다>(저 요시다 아쓰히로)를 펼쳐보았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큰 이슈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스토리였던 것 같아요. 내용은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하고, 읽고 싶은 마지막 장을 펼쳐봤습니다. 그때는 그냥 표현이 좋아서 마킹해 두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냄비 안은 삶의 이치와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 적힌 '이름 없는 수프 만드는 방법' 중 몇 가지를 옮깁니다.
기대를 하지 말 것
그러나 모든 것은 냄비에 맡긴다. 그러면 냄비가 만들어준다.
뭐든지 상관없지만 좋아하는 감자는 넣는 것이 좋다.
물론 감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것만큼은 빠뜨릴 수 없다 하는 것을 뭐든지 한 가지 넣는다.
냄비에서 올라오는 김 역시 위대하다.
날씨가 맑든, 흐리든, 비가 오든 수프는 어떤 하늘과도 잘 어울린다.
전부 위대하다.
흐물흐물해져서 재료들의 구분이 없어지면 그걸로 완성
사실 완성은 아니지만 그만하면 됐다.
그리고 식기 전에 이웃에게도,
아니면 생각나는 사람에게, 귀찮으면 생각하는 것만으로 좋다.
이것을 수프가 식지 않는 거리라고 한다.
여기에 쓴 것을 전부 잊고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어쨌든, 맛있다!
오늘도 어쨌든, 맛있는 한 끼를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