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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Apr 20. 2019

그렇게 커피 성지가 되었다

커알못이 영혼까지 갈아 짜낸 포틀랜드 커피투어 이야기(2)

포틀랜드의 커피와 맥주는 맛이 없을 수가 없어요.

그 이유는 바로 이 ‘물’이에요. 미국 서부의 오리건주는 물이 좋기로 유명하잖아요! 포틀랜드에서 최고라는 원두라 하더라도, 아마도 포틀랜드가 아니면 이 맛을 느끼긴 어려울 거예요.      


솔직히 커알못에겐 이 무슨 허튼소리인가 싶었다가 ‘한 끗 차이 철학’에 맹렬히 동의하는 나는 고개를 끄덕. 하지만 바리스타가 내어준 커피를 보자마자 빈속에 연거푸 마셔댄 커피가 내 위벽을 붙잡고 헤엄을 치는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시차 적응으로 고생 중인데, 맥주도 아니고 카페인 잔뜩이라니 오늘 밤 잠은 다잤다.          


     


당신은 꼭 뮤지션 같아요!     


투어 일행 중 한 명이 그루비그루비매우그루비그루비한 젊은 바리스타를 향해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방문했던 카페와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사람들이 북적북적했고, 무언가 빠르고 크게 지나간 모양새랄까. 바리스타들은 마치 춤을 추듯 그 난리 통에도 경쾌하고 가볍게 움직였다. 나는 무언가에 홀렸는지 투어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포틀랜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아틀리에 에이스 Atelier Ace]

샹들리에가 걸린 높은 천장 아래 큰 소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문틈을 비집고 보이는 커피 바. 그리고 큼지막이 보이는 레터링 ‘HOTEL’. 아마 포틀랜드라는 키워드로 구글링 하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이미지일 거다. 이곳이 바로 에이스 호텔(Ace Hotel) 로비에 있는 ‘스텀프타운 커피(Stumptown Coffee)’다.     


농업과 임업으로 급성장한 포틀랜드는 토지를 개척하면서 벌목한 나무 그루터기(stump)가 일손 부족으로 처분되지 못하고 도시 곳곳에 방치되었다. 이런 배경 탓에 포틀랜드는 stumptown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별명을 통째로 가져다 쓴 덕이었을까, 포틀랜드가 지금의 커피 성지로 알려지기까지 이 스텀프 타운 커피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데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1999년, 듀안 소렌슨(Duand Sorenson)은 포틀랜드의 Division이라는 골목에 작은 카페를 열었다. 마치 모든 카페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이곳 역시 시작은 작고 평범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스텀프타운 커피는 포틀랜드를, 아니 전 세계 커피 시장을 제3의 물결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로 듀안은 스텀프타운 커피를 프랜차이즈 식으로 확장(그래 봐야 세계 단위 10여 군데, 그 규모가 우리나라의 프랜차이즈와는 다르다)하고 대기업의 자본 투자 유치, 식음료 사업 전반에 손을 뻗는 등의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이러한 이유로 정작 포틀랜드 사람들은 이 스텀프타운 커피를 두고 초심도, 맛도 잃었다고 혹평하기 시작했다. 소규모, 독립, 로컬을 지향하는 포틀랜드 사람들에겐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실제로 에어비앤비 주인을 비롯해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던 현지인은 추천할만한 카페를 묻는 답변에 꼭 ‘스텀프타운 커피 말고’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엔 꼭 이렇게 물어왔다.

“스텀프타운 커피는 가봤지요?”          


물론 스텀프타운 커피에 대한 인식이 포틀랜드 사람들보단 외부 사람이나 관광객에게 더 긍정적인 것 맞아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스텀프타운 커피는 ‘제3의 커피 물결’을 일어낸 파도였다는 것, 포틀랜드가 커피의 성지로의 역할을 한 장본인이라는 것, 그리고 포틀랜드 사람이라면 스텀프타운 커피에 대한 추억을 하나쯤은 품고 있을 정도로 우리의 중요한 역사라는 사실은 변함없죠.     

이런 점을 인식했을 앨리샤가 말했다.           



벽 하나를 두고 다른 분위기가 흥미로운 공간이다

사실 내가 이 스텀프타운 카페에 주목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공간’이라는 물리적 영역이 미치는 영향력을 맹신하는 나는 이 카페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가끔 전공이 꼭 쓸모없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의 아고라(agora), 로마의 포럼(forum).

이들의 공통점은 ‘광장’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치의 토대가 된 ‘장소’라는 점이다. 원형의 타일은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했고, 탁 트인 공간은 거리낌 없이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토론하고, 결정하며, 집회를 열기도 했다.

사실 포틀랜드는 여행하거나 잠시 들르기보단 살기 위해 찾아 이주하는 도시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각종 사업이나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일이 잦아졌고, 지금처럼 ‘힙’한, 크리에이티브한 도시로 거듭났다. 이 틈에서 도시 한복판 있는 에이스 호텔 로비는 포틀랜드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장, 즉 사랑방의 역할을 해온 곳이기도 하다. 호텔이라고 꼭 웅장해야만 하고 격식을 갖출 필요는 없다. 에이스 호텔은 여기가 호텔인가 싶을 정도로 호텔치곤 낮은 건물로, 다운타운 한가운데에 있으며 언제든 누구나 이곳에 드나들 수 있다. 게다가 벽 하나를 두고 풍기는 커피 향의 유혹을 뿌리치기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포틀랜드 사람들은 오가다 이곳에서 영감을 얻고, 이 영감의 색은 포틀랜드라는 도시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다. 이렇게 스텀프타운 커피와 에이스 호텔은 나란히 포틀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실제로 이런 역할을 하는 공공장소는 도시 곳곳에 있었고, 그래서인지 포틀랜드는 체계적인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 생태계와 온·오프라인 커뮤니티가 매우 활성화된 도시로 유명하다.        

  

참고로 스텀프타운커피는 캔에 든 콜드브루와 니트로커피가 유명하다

아차차, 나는 지금 커피 투어 중이었지! 하지만 내 혀의 감각이 이미 커피에 익숙해져 있던 탓일까. 커피 한 모금에 내 혀는 부들부들 드르릉 시동을 걸고, 모든 세포가 깨어나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나 보다.


마지막 카페를 남겨두었다며 앨리샤는 우리를 재촉했다.     



코아바커피의 미니 라테

케맥스와 스테인리스 필터로 추출한 드립 커피를 기대했지만, 미니 라테가 우리를 반겼다. 하긴 한 모금만 더 마셨다가는 내 위벽이 구멍이 날 것만 같았으니 부드러운 라테가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2010년 커피를 사랑하는 두 친구 키스 게르크(Keith Gehrke)와 매트 히긴스(Matt Higgins)가 1호점을 내며 시작된 코아바 커피(Coava Coffee). 이 카페의 특이한 점은 오랫동안 싱글 오리진을 고집해왔다는 것(최근엔 블렌딩 원두를 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이필터가 아닌 자체적으로 개발한 스테인리스 필터로 드립 한다는 것이다. 스테인리스 필터에 난 미세한 구멍으로 커피의 오일이 그대로 추출되어 원두 본연의 아로마에 충실한 커피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원두뿐 아니라 로스터나 추출 장비에도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일까 1호점이 시작된 지 5~6년 만에 스텀프타운 커피를 뒤이어 포틀랜드에서 꼭 마셔봐야 할 커피 브랜드로 성장했다.


사실 이 코아바커피의 진가를 느끼기 위해서는 사우스이스트(SE) 지역에 있는 Coava on Grand점에 가야 하는데, 이 투어의 동선상 다운타운에 있는 Coava on Jefferson점에 왔어요. 투어를 마치고 기회가 되면 꼭 SE 지역에 있는 지점에 가보세요! 서서 커피를 마시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포틀랜드 SE지역의 Coava on Grand점

결국, 다음날 넘편 나이키 셔틀을 위해 가던 길이던 나는 Coava on Grand점에 갔다. 들어서자마자 앨리샤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넓은 곳에 고작 네다섯 테이블뿐이라니. 미국은 땅덩이가 넓어서 그런가 대체 뭐지? 창고를 개조해 만들었다는 이 카페 끝쪽엔 bamboo 컬렉션과 창문 넘어 보이는 목재 공방, 그리고 원두 로스터링 기계를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커피를 서서 마셔도 뻘쭘하지 않고 오히려 돌아다니기 바쁜 곳이었다.                    



스테인레스 콘필터로 드립한 코아바커피_난이곳커피가제일맛있었네.jpg
위)커다란 창문 앞에 쏠랑 큰 테이블 하나 / 아래)바로 옆에 위치한 Bamboo컬렉션


커피투어는 마무리되었지만, 여운은 꽤 길었다. ‘Support Small business’(소규모 사업을 응원하자)를 외치는 포틀랜드 사람들에 대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현장에서 직접 듣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음료 하나가 컬처 culture나 유행 wave이 되기까지는 이들만의 철학이 한몫했을 터다. ‘제3의 커피 물결’이라 해서 뭔가 더 기술적이고 대단한 건 줄 알았는데, 사람과 관계, 취향, 지속 가능한 철학이라는 오리지널리티에 집중한 일종의 ‘탈기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갬성과 무화과라테가 있던Good Coffee

여행 중에 나는 하루에 최소 두 곳 이상의 카페에 들렀다. 커피는 별로였지만 마치 1980년대나 볼 수 있던 소품과 다소 투박했던 슈가 컵케이크가 인상적이던 숙소 앞 매일 출근도장을 찍던 카페, 무질서했지만 커피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맛있던 카페, 소위 인스타 갬성을 지닌 화이트 인테리어와 독특한 커피 메뉴가 돋보인 카페 등. 다양한 개성을 담은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과연 포틀랜드 사람들에겐 커피가, 그리고 이 카페라는 공간이 어떤 의미인 건지 궁금해졌다.      


내가 찾은 카페 대부분은 크거나 작거나 규모에 상관없이 로스터링 기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생산자, 환경, 마을 커뮤니티(학교 장학금, 시설 운영비 등)를 되새기는 장치가 있었다. 곳곳에 공기처럼 스민 이 장치들은 커피의 맛은 물론 '함께 살자'는 포틀랜드 사람들의 인식이 더 확고해질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집 근처 Cafe Bluekangaroo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카페라는 공간이 이들의 광장 plaza 혹은 사랑방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예쁜 인테리어나 불편하고 딱딱한 의자와 테이블이 아닌 먼지 폴폴 나는 큰 소파가 어쩌면 지금의 기괴한 wired 하고 창의적인 포틀랜드를 가꾼 원동력이 아닐까.



커피 한 잔에 정말 여러 가지를 되새긴다.

아이고, 우리 넘편도 커피를 참 좋아하는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던 Piece of Cake. 아아, 생일이고 싶어라!
출처없는 드립 머신에 막 내려도 맛있는 스텀프타운 커피

제 아무리 훌륭한 원두라도 포틀랜드가 아니면 그 맛을 느끼기는 어려울 거라던 앨리샤의 말은 잊기로 했다. 내가 매일 가던 카페와 포틀랜드 사람들이 한때사랑했다는 스텀프타운 커피의 원두를 샀다. 현지인 패칭을 위해 눈을 뜨자마자 숙소에 있는 드립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기도 했다. 그러고 나가자마자 또 카페에 갔다는 듣기만 해도 위벽이 뚫어질 것만 같은 전설이..



좌,가운데) Cafe Barista  / 우) 공항에서 만난 미국 전역에 있는 Peet's Coffee

이렇게 마지막 날까지 야무지게 카페를 찾아다녔다.

여기에 야무지게 맥주집을 찾아다녔으니 가방이 아닌 간이 화장실을 등에 매고 다니고 싶을 지경이었다. 






글 끝에 숫자를 매긴다는 게 이렇게 부담스러운 일인지 몰랐습니다. 1이 있으면 곧이어 2를 짠! 하고 내야 할 것 같은데, 거의 한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2편을 올립니다. 계속 맘속에 품고 있다가 이 글을 쓰려고 그렇게 좋아하는 광란의 불금도 포기했습니다. 덕분에 토요일 아침, 포틀랜드에서 주워온 빈티진 잔에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립니다. 결국 낮에는 날이 좋아 자전거를 타다가 이 밤에 올립니다만.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포틀랜드 커피를 마셨습니다

포틀랜드에 다녀온 지 벌써 한 달하고도 보름이나 지났는데 글을 쓸 때만큼은 마치 어제의 일같이 생생하기만 합니다. 당시에 기록해둔 한 줄 메모와 단어가 큰 역할을 해낸 것 같습니다.


느리지만 포틀랜드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겁니다.

포틀랜드 여행기에 집중한 탓에 밥상 이야기가 소홀했지만, 틈틈이 기록하겠습니다.     

미세먼지와 개인적으론 꽃가루 알레르기가가 언제 시동을 걸지 두려운 요즘입니다. 이럴 땐 해조류가 미세먼지와 중금속을 배출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부디 기복없는 잔잔한 봄날을 보내시길!




포틀랜드 커피투어 1편


포틀랜드 파머스마켓 이야기


포틀랜드를 선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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