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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온 Feb 09. 2024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당연하지 않은 일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직업

 내가 아직 영유아기였던 90년대 초중반에는 물과 공기는 무한제였다. 언젠가부터 물을 팔자 사람들이 '물을 사서 마신다고?' 하며 희한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다. 물론 지금은 물을 사고파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되었지만. 또 언젠가는 공기를 판다는 소식에  '공기를 사서 마신다고?' 하며 같은 반응을 보였다. 미세먼지로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힘든 요즘, 공기를 사서 마시고 싶을 정도이긴 하다. 옛날엔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전혀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을 여러 곳에서 느낀다.


 타지 살이를 하면서 가장 크게 와닿은 '당연한 것'의 부재는 바로 집안일, 가사였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항상 깨끗했다. 깨끗하게 세탁되어 향긋한 향을 내며 개켜진 옷들, 청결한 상태로 정돈된 침구, 물때 하나 끼어있지 않은 화장실, 찬장을 열면 언제든 사용이 가능한 식기류, 항상 신선한 상태를 유지한 냉장고 속의 식재료들. 너무나 당연해서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것들이 그제야 엄마의 노동의 혜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직접 가사를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정말 할 게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집안일이라고 하면 고작 요리와 청소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빨래도 해야 하고 필수품과 소모품들의 재고도 파악하며 가족들의 식성에 맞으면서도 건강까지 염두한 식단과 그에 맞는 식재료 구입과 보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보일러나 에어컨, 수도 등과 같은 집안 시설 관리도 신경 써야  한다. 또 영국에 있을 때는 마당이 있는 집여서 정원 관리까지 해야 했다. 한국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돈을 벌다가 영국에서는 '드디어 푹 쉬겠구나' 했는데 전혀 쉴 수 없었다. '집안일'이라기보다는 가사 '노동'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전업주부로 고작 몇 달을 지내는 동안 '집안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엄마의 말씀에 뼈저리게 공감했다. 집안 환경이  쾌적하고 깨끗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걸 유지하기 위한 노동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웃긴 것은 며칠 집안일에 소홀하면 눈에 띄게 엉망이 되어서 바로 내 잘못이 되어버린다. 회사를 다닐 때는 그래도 일하는 날과 쉬는 날의 구분이 있었지만 이건 쉬는 날도 없고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내리 일을 해야 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 미숙 씨는 항상 집에서 바쁘게 움직이셨다. 아침에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셨고 저녁에도 느지막이 주무셨다. 주말에도  예외는 없었다. 미숙 씨의 쉬는 시간은 언제였던 걸까?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세탁기를 돌리는 방법이나 밥솥을 사용하는 방법조차 모를 정도로 집안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우리 미숙 씨가 뒤에서 많은 고생을 하셨겠지. 그게 이제야 보인다. 갑자기 뭉클해진 마음에 미숙 씨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엄마, 집안일이 진짜 힘든 거더라."

 "그걸 이제 알았니? 그래도 너는 편하게 살아. 로봇청소기 이런 거도 사고."


 딸이 조금이라도 편히 살았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서 코끝이 찡해졌다. 마냥 어리게만 봤던 딸이 이제는 결혼을 해서 가사를 본다는 것이 미숙 씨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한국을 떠나던 날, 서로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던 것처럼 그날도 우리는 서로의 눈물로 인해 머쓱해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고된 가사일로 거칠어진 엄마의 고운 손을 꼬옥 잡아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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