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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Jun 02. 2021

정신과에서 심리검사를 받았다

mbti보다 설레는 mmpi, tci, htp 검사

듣는 사람은 언제 말할 수 있을까. 북토크에서 만난 독자가 물었다. “작가님 이야기는 누구한테 하세요?” 한 사람의 삶에 대해 묻고 듣고 기록하는 일이 구술생애사 작업이라면, 그 작업을 하는 사람은 누구한테 자기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주로 듣는 편인지라 친구들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기 어렵다고 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나도 그게 평생 고민이다.  


뇌가 먹통이 된 사이, 입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친구들한테 말하는 편이다, 이혼이든 가난이든 말하다 보면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이가 많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그럴싸하게 답했다.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이건 과거형 이야기다. 언젠가부터 나는 듣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말해왔다.(딱 한 명의 친구J만 빼고.) 진실은 무겁고 부담스럽다. 다들 먹고사느라 바빠서 남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여줄 여유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일기를 쓰고, 상담을 받는다. 묻지 않아도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다린다. 누군가 내게 질문다운 질문을 해주기를.  



질문을 기다리는 사람


그래서였을까. 정신과에서 한 무더기의 심리 검사지를 받은 날,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심리 검사는 융단 폭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수많은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면적 인성검사 MMPI-2만 해도 질문이 567문항이나 된다. 이 검사는 ‘나는 ~할 때 ~하다’라는 명제에 대해 네, 아니오로 답하는 자기 보고 방식이다. 여기에 기질 및 성격 검사 TCI의 객관식 질문 140개, 주관식으로 작성하는 문장완성검사 50개까지 합치면 총 질문이 757개나 된다. 


정신과에서 돌아온 나는 그 길로 책상에 앉아, 과제를 하기 시작했다. 신이 나서 쭉쭉 체크하다 보니, 1시간 반 만에 검사가 끝나 있었다.(권장 시간은 2시간~2시간 반) 질문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나는 입맛을 다셨다. 누가 나를 좀 더 궁금해해줬으면 좋겠는데…더 말할 수 있는데….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가오나시처럼 나는 질문에 목말랐다.


일주일 뒤, HTP 검사를 하는 날이 왔다. HTP 검사란 집(H, house), 나무(T, tree), 사람(P, person)을 그려서 성격을 알아보는 것이다. 임상심리사 분이 검사를 진행해주었다. A4 용지에 hb연필로 이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그리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누군가 내게 간단한 과제를 내주고 그걸 하는 내내 지켜봐주는 것이 좋았다.(관심이다, 관심!) 30분 내내 미술학원에라도 온 것 마냥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임상심리사가 건넬 해석을 기다렸다. 첫 번째는 집 그림을 두고 말했다.


HTP 검사_1. 집 그리기: 실제 검사에서는 연필만을 이용해 그린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오일파스텔로 다시 그렸다.



임상심리사 :  이 집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어요? 상상을 더해 말하는 거라서 어색할 수도 있지만,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돼요.


나:  이 집은 고양시 창릉천에 있는 집이에요. 2층이고, 엄마랑 저랑 남편이랑 애랑 살아요.


임상심리사 : 이 집은 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아요?


나: 오르겠죠. 지금도 많이 올랐을 거예요. 3호선 타고 가다가 봤는데 산이 있고 개천이 흐르는 데다 논이 넓게 펼쳐져 있더라고요. 지금은 거기가 아파트촌이 됐어요. 역 뒤쪽에 전원주택 부지가 있어요. 거기에 집 짓고 살면 좋겠지만 워낙 비싸서….(과몰입 모드)


임상심리사: 이 집은 뭘로 지어졌나요?


나 :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지어졌으니까 콘크리트겠죠? 제가 요즘 ebs <건축탐구 집>을 열심히 보고 있거든요.(웃음)


임상심리사: 이 그림에 없는 건 뭘까요?


나:  글쎄요, 친구? 주변에 친구들이 가까이 안 살 것 같아요. 이웃은 있겠지만.


임상심리사 : 문이 없네요.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가만 보니 집으로 향하는 길도 없다. 나의 이상적인 스위트홈은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길도 나지 않은 집에 누가 온다고 울타리를 두르고 개까지 밖에 매어 두었을까. 첫 번째 집 그림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두 번째 나무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HTP 검사_2 : 나무 그리기


임상심리사 : 이 나무는 몇 살이에요?


나 : 서른 살쯤 됐어요.


임상심리사 : 이 나무는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나 : 새가 날아와서 반갑고 기뻐요.


임상심리사 : 이 나무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나 : 평범해요.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는 나무예요. 주변에 같은 종의 나무도, 다른 나무도 있는데 잘 어울려 살아요. 별일 없으면 앞으로 100년은 살겠죠.


임상심리사 :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나 :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불이 날지도 몰라요. 등산로에 담배꽁초 때문에 산불 나는 경우 많잖아요. 작년 고성 산불도 그렇고, 기후 변화 시대에 앞날을 어떻게 알겠어요? 오스트리아 산불도 몇 달째 안 꺼졌잖아요. 불만 나지 않으면 제 명을 누릴 평범한 나무예요.


친구J(유일하게 이런저런 소리 다 들어주는 사람)는 이 일화를 듣고 내 불안의 정서를 반영하는 그림 같다고 말했다. 언제 어디서 재난이 일어날지 모르니 생존을 위해 대비해야 한다는 불안의 정서가 내게는 기본값이다. 생각해보니 나무는 뿌리내리고 사는데, 불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 아닌가. 새는 남편을 상징한다. 그는 함께해서 좋지만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 존재다. 뒤에 서 있는 나무들은 오래된 친구들일 테고, 저 불은…살면서 내가 그대로 맞아야만 했던 비바람, 태풍,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모든 것이리라.   



사람을 그린 세 번째 그림에서 나는 스물세 살의 대학생으로 형상화되었다. 임상심리사가 물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단번에 말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사람이요.” 가방을 메고 있는 것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HTP 검사_3 : 여자 사람 그리기


HTP 검사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이렇다. 이상적인 집에는 들어갈 수 없으며, 내가 사는 곳에는 언제 불이 날지 모른다. 그래서 뿌리 뽑힌 채로 어디서든 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건 실제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태도였다. 돌아갈 곳이 없는 자는, 이식된 땅에 맞게 자기 몸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나는 앉은 자리에서 말라죽을 것이다. 내 불안을 그런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



객관적인 수치 속에 드러난

나라는 인간의 실체


다음 상담에서 의사는 심리 검사 결과를 해석해주었다. 다면적 인성검사(MMPI-2)에 의하면, 나는 기능을 저해할 정도로 부정 정서가 높은 편이다. 구체적으로는 불안과 분노가 높고, 이는 낮은 자존감과 가정문제와 상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정답!) 답변은 점수로 환산되어 결과지에 그래프로 나타났다. 이 곡선이 마치 내 무의식의 바다를 등고선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기질 및 성격 검사(TCI)에서는 나의 모순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이지만  자신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고, 근면과 끈기는 낮지만 성취에 대한 야망과 완벽주의는 극단적으로 높다. 한마디로 게으른 주제에 욕심만 많다는 얘기다. 여기에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기 불안이 높고, 관습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타입인데, 지금 나는 자꾸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다. 어제 했던 일과 오늘 하는 일이 다르고, 몇 달 전에 일했던 사람하고는 앞으로 평생 얼굴 한번 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이 검사지를 받아 보니 내 삶이 왜 이렇게 고단한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생긴 대로 살지 않고, 나 자신과 투쟁하며 살아온 것이다. 불안한 게 싫으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안 하면 되는데, 나는 또 기어코 내게 과제를 낸다. 그게 내가 생존하고 성장해온 방식이다.



누구나 바다가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기 전까지는 산호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면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은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심리 검사를 하면서 나라는 인간의 지형도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질문과 관심에 고팠던 이유는, 그만큼 나를 알고자 하는 욕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심리 검사는 이 욕구를 일정 부분 해소시켜주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도 나는 나의 불안을 타박한다. 왜 남들은 1년에 서너 권씩 내는 책을, 2년 만에 한 권 내면서 이렇게 오들오들 떨며 불안해하는지 모르겠다. 새 책을 편집하기에 앞서 온갖 불안이 몰려와 지구 밖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별 수 없다. 늘 그래왔듯이 울면서 마감하겠지.


몇 달 만에 심리 검사지를 다시 꺼내보며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중이다. HTP 검사를 놓고 통화하던 날, 친구가 내게 들려준 말이 떠오른다.


“괜찮아, 은화 씨. 우리 이 정도면 잘 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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