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화 Jul 22. 2021

IMF키드의 생애

각자도생의 시대, 알아서 살아남을 것. 

어느 날 학교에서 숙제로 가훈을 써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가훈, 그러니까 한 집안의 가장이 자식들에게 주는 교훈 같은 게 우리 집에 있었던가. 우리 집은 문관(文官)이 아니라 무관(武官)이 다스리는 왕국이었다. 말보다는 손이 앞서는 사람, 규칙보다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식구들을 쥐고 흔드는 아빠는 존재 자체가 우리 집의 법이었다. 내가 무수히 맞으면서 익힌 교훈은, 아빠의 심기를 절대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쭈삣쭈삣 다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선생님이 가훈 써오래. 근데 우리 집에도 가훈 있어?” 아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붓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일필휘지로 글자를 써내려갔다. 옥편도 안 보고 바로 튀어나온 한자라니, 뜻은 몰라도 저것은 필시 아빠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간직해온, 비장의 가훈임이 틀림없다. 엄마한테 물어보니 그것은 ‘근면성실(勤勉誠實)’, 부지런하게 열심히 노력하라는 의미란다. 늘상 엄마한테 듣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숙제 제때제때 해가라’ 같은 잔소리가 가훈이라니, 김이 팍 샜다. 나중에서야 근면성실한 태도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지만, 열 살짜리 귀에는 그저 지루하게만 들렸을 따름이다.


훗날 이 일화를 떠올리며 엄마한테 물었다. “우리 집 가훈이 근면성실이었잖아. 아빠는 성실한 사람이었어?” 이 질문을 듣자마자 엄마는 입꼬리가 팩 올라가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성실은 무슨! 느그 아부지는 야, 성실하지도 않았다. 하루는 동사무소에서 내한테 물어보더라. 김 주사님은 왜 안 나오느냐고. 회사 가서 싸우고 수틀리면 막무가내로 출근도 안 하는 사람이었어.” 이후로도 엄마는 ‘느그 아부지’에 대한 욕을 이어갔다. 엄마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닌데, 아빠 성실했는데. 주말에 경마장 간다고 평일에도 경마 공부하고, 주식 공부한다고 매일 경제신문에 뉴스를 꼬박꼬박 챙겨봤는데.’


나의 부친으로 말할 것 같으면, 9급 공무원으로 멀쩡히 다니던 동사무소를 때려치우고 건설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먹고 살기로 작정한 야성의 사나이다. 그에게는 언제나 ‘인생 역전’이라는 담대한 목표가 있었다. 아버지는 평일에 일거리가 있을 때는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주말에는 과천경마장으로 출근했다. 월요일에는 복권을 사고, 평일 저녁에는 경마지를 놓고 말들의 전력을 분석하더니, 일 나가는 날이 점차 줄어들었다. 


어느 날부터는 주식 투자를 하겠다며 집에 눌러 앉았다. 그 길로 도박에 성실하게 빠져들었다. 잘 풀리는 날에는 경마장에 5만 원을 가져가서 500만원으로 만들어오기도 했지만, 잘 안 풀리는 날에는 폭군으로 변해서 식구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런 날이면 누구도 거실에 나오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서도 저녁밥만은 다 같이 먹으며, 뉴스를 시청해야 했다. 그날도 나는 아빠 곁에서 반강제로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출처: MBC뉴스


"정부가 결국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오늘은 가히 국치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1997년 12월 IMF구제금융 뉴스를 접했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대충 빚을 못 갚아서 나라가 망했다는 뜻인 것 같았다. 매일 밤 9시 뉴스를 통해 무시무시한 보도가 이어졌다. 큰 회사가 부도나고, 작은 회사가 어음을 못 막아 도산하고, 직장인들이 정리해고되고, 집에 차압 딱지가 붙고, 노숙인이 되고, 이혼하고, 자살하고…. 열두 살이 받아들이기에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세상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니! 성수대교 붕괴나 삼풍백화점 참사는 콘크리트 덩어리가 무너진 거였다면, IMF 구제금융은 땅을 뒤흔드는 지진처럼 느껴졌다. 언제 내게 저 여진이 도착할지 몰라 두려웠다.


뉴스에서는 이게 다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 분수에도 안 맞게 신용카드를 만들어서 흥청망청 써대고, 이제 좀 살 만해졌다고 해외여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1998년 1월, KBS에서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다. 돌 반지, 결혼패물, 유품들을 사람들이 들고 나와 사연과 함께 금을 기부했다. 우리 집에 금붙이라고는 먹고 죽으려야 없었으므로, 엄마는 아나바다 운동에 동참했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는 아나바다 포스터가 부엌에 한참이나 붙어 있었다.


출처 : 한국정책방송원


국난을 극복하자는 구호 앞에 나는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라가 힘들 때 국민들이 앞장서서 돕는구나, 나도 아나바다를 실천해야겠다며 일기장에 쓰던 기억이 난다. 아마 우리 집에 금붙이가 있었다면 내놓자고 졸랐을 것이다. 


한편으로 궁금했다. 왜 국민이 힘들 때 나라는 보고만 있는 걸까? 한강에서 자살한 사람들, 서울역에 넘쳐나는 노숙인들을 구할 수는 없는 걸까? 자료화면으로 흐르는 사람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고서 생각했다. 저 아저씨들 너무 안 됐다, 한겨울에 추울 텐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구나,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구나,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구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런 것들이 다 내게 상처로 남아 있었다. 각자도생, 적자생존, 무한경쟁, 이런 말들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알아서 살아남을 것. 이 비정한 세계에서는 쓸모 없어지면 누구든 내쳐질 수 있다. 그건 우리 식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빈자들의 구조조정


2003년, 내가 17세가 되던 해에 우리 집은 망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IMF라는 시대적 배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중산층의 위기다. 아버지가 대기업에 다니거나, 중소기업을 운영하거나, 최소한 사업하는 친인척이 있어 연대 보증을 잘못 선 경우에나 IMF로 망했다고 할 수 있다. 하층 계급이었던 우리 집까지는 그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 엄마는 책 물류창고에서 일했으니 서점에서 반품이 들어와도 할 일이 있었고, 아빠는 중소도시의 작은 건설 현장에서 일했으니 그런 대로 일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소득과는 별개로, 아빠의 도박 빚은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정부는 IMF로부터 급한 돈을 꿔서 부도를 막을 수 있었지만 모부는 더 이상 돈을 빌릴 데가 없었다. 마이너스 통장에, 신용카드 돌려막기에, 보험회사에서 약관대출까지 박박 긁어 쓴 상태였다. 한번은 집에 사채업자들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 거구의 깡패 예닐곱이 거실에 와서 으름장을 놓은 이후로,  부친은 사채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 대신 매일 밤 엄마에게 전세보증금을 빼서 주식에 투자하자면서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했다. 지쳐가던 엄마는 마음속으로 K.O패를 선언했나 보다.  


어느 날 저녁, 엄마는 나와 오빠를 흔들어 깨워 조용히 집을 나섰다. 부친이 돈을 내놓으라며 몇날 며칠을 들들볶던 끝에 손찌검을 하려던 날이었다. 그날은 엄마의 48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우리 세 식구는 살기 위해 도망을 택했다. 


IMF사태가 터지기 전, 한보그룹은 은행권에서 ‘돈 먹는 불가사리’로 유명했다고 한다. 아빠는 우리 집의 한보그룹 같은 존재였다, 돈 먹는 불가사리. 이후 엄마는 정식으로 합의 이혼을 요구했다. 부친은 전 재산을 털어먹고도 배가 덜 찼는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는 대가로 위자료를 요구했다. 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데, 사람한테 퇴로는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엄마는 돈을 빌려다가 아빠에게 보증금으로 몇 백을 건넸다. 그것은 빈자들의 구조조정이자 정리해고였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 살아남는다 


법원에 가서 이혼 도장을 찍고, 살던 집으로 돌아와 짐 정리를 하던 날 아빠가 집으로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밥을 먹고 싶다고 하기에, 엄마가 그 와중에 밥상을 차려줬다. 그 밥을 다 먹고서, 아빠는 컴퓨터 앞에 앉아 뻔뻔하게 주식차트를 보기 시작했다. 저녁 10시, 마을버스 막차가 끊기는 시간까지도 아빠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경찰을 불렀다. 부친은 울부짖으며 말했다.


“이대로 헤어지면 다 죽는 거야!”


나는 덜덜 떨며 생각했다. ‘아닌데, 아빠가 없으니 우리는 앞으로 잘살 수 있는데... 아니면 우리를 찾아내서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다행히 아버지는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다 죽을 거라는 저주는, 자기만 혼자 남은 그 상황이 죽을 정도로 두렵다는 뜻이었나 보다. 그에게는 돈도, 사람도 남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서울역에, 한강 다리에 섰던 중년 남성들처럼 그는 완전히 혼자 남겨진 것이다.


얼마 전 영화 <미나리>를 보며 문득 부친이 떠올랐다. 병아리 감별사인 주인공 제이콥은, 어린 수컷을 왜 폐기하느냐고 묻는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맛이 없거든. 알도 낳지 않고. 그러니까 우리는 쓸모가 있는 사람이 돼야 해.” 


사회에서, 가정에서 쓸모 없어진 그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