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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Jul 25. 2022

오토바이를 타고 온 구세주 그녀

낯선 도시와 안면을 트기까지

강화도를 떠나 서울로 오던 날, 강화대교를 건너는데 진눈깨비가 내렸다. 어설픈 고체들이 한강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흩어졌다. 1.5톤 트럭에 기사 아저씨, 나, 엄마 셋이 나란히 앉아 앞 유리로 쏟아질 듯 들이치는 진눈깨비를 감상했다. 떠나기에 적당한,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그 섬에 사는 동안, 나는 늘 ‘엮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난한 모녀의 떠도는 삶은, 누군가에게는 맘 놓고 괴롭힐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말없이 곁을 내주고 싶은 관계였다. 눈치 빠르게 침묵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알았다. 집 주인은 엄마가 이혼하고 딸을 데리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내가 다녔던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매일 보는 재수생, 임용고시생, 도서관 직원까지 내가 학교 밖 청소년이며 육지에서 굴러들어온 돌이라는 걸 알았다. 그 투명한 관계가 지긋지긋했다. 동정도, 무시도, 배려도 떨치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서울에서도 물론 가난할 것이다. 다만 복수로, 익명으로 존재할 것이다. 나는 겪어본 적 없는 무관심이 그리웠다.  



회색 서울


서울 신림의 첫인상은 회색빛이었다. 초록과 하늘은 적고, 건물과 사람만 빼곡한 동네. 우리 집이 반지하라 특히 그랬다. 서너 계단 내려가면 나오는 그 집은, 한낮에도 새벽 어스름처럼 어두컴컴했다. 큰 방 하나에 부엌, 화장실 딸린 10평 남짓한 그 공간은 엄마와 둘이 지내기에 나쁘지 않았다. 보안만 빼면 말이다. 큰 방의 방범창은, 범죄로부터 세입자를 지켜주기에는 너무 허약해보였다. 2005년에는 인근 봉천동과 보라매 일대의 연쇄사건으로 언론이 들썩였는데, 밤이면 옆집 반지하 사는 남자의 발자국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했다. 실루엣이라도 가리겠다며 창문 앞에 건조대를 놓고 나니 안 그래도 컴컴한 집이 동굴처럼 캄캄해졌다.


벙커 같은 그 공간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콘크리트 덩어리로 이뤄진 지하철역, 그 밑의 노점상, 출퇴근 시간이면 밀려드는 인파들. 서울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득바득 기를 쓰는 사람들 속에서 비로소 나는 보통의 인간이 되었다. 자취하는 학생, 독거노인, 조선족, 중국인, 이혼 가정 등등 경계를 넘은 사람들이 이웃이었다. 내 사연 정도는 티끌만큼 가벼워서 이목을 끌만 한 것이 못 되었다. 그건 호기심이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 부동산중개인의 심드렁한 말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삿짐을 풀고 엄마와 쇼핑에 나섰다. 20년 동안 세탁기도 사지 않고 절약하던 엄마의 지갑이 유일하게 열리는 순간이 바로 이사한 직후다. 동네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시장 끝에는 중소마트와 생활용품 잡화점, 중고가구매장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골목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오래된 건조대를 버리고, TV 수납장을 사고, 이불커버도 새로 장만했다. 이불장으로 쓸 만한 가구도 주워왔다. 밤중에 엄마와 함께 낑낑거리며 데려온 그 가구를 반질반질해지도록 닦았다.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가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의식. 그래봐야 일관성 없는 가구들에 촌스러운 꽃무늬 이불이 하나 더 해졌을 뿐이지만, 자질구레한 사치를 부리다보면 희망 비슷한 것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엄마는 눈뜨자마자 벼룩시장을 비롯해 구인구직 소식지를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밥상을 치우고 돌아앉은 엄마는, 몇 군데 동그라미를 치고 전화하고 면접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일주일 만에 간병인으로 고용되어 집을 떠났다. 병원에서 24시간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은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컴컴한 집에 혼자 남은 나는 누워서 하릴없이 눈을 껌뻑이며 생각했다. 이제 무얼 하면 좋지.  



부지런하게 무기력한 시간


대학에 입학하기까지는 두어 달가량 시간이 있었다. 나는 엄마가 하던 대로 벼룩시장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은  번째 아르바이트 장소는 강남역에 위치한 삼계탕집이었다.  가게는 아침 10시에 직원들에게 밥을 줬다. 얼마나 바쁘기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밥을 먹이나 했더니, 점심시간은 그야말로 전투가 벌어졌다. 인근 직장인들이 쉴틈없이 밀어닥쳤다. 내게는 펄펄 끓는 삼계탕 뚝배기가 당면한 과제였다. 어떻게 하면 사고 없이 좌식 테이블에 올라가서  뚝배기를 무사히 전해줄 것인가. 삐끗해서 쏟기라도 하면, 내가 화상을 입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닥다닥 붙어 앉은 손님들한테도 지옥의 삼계탕 샤워를 안겨줄 것이다. 손님들의  사이를 종종걸음 치며, 나는 체조 선수라도   균형을 유지하려 애썼다. 최저시급이 3 원도  되던 때에 무려 시급 4 원을 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엄마가 입에 달고 살던 '세상에 공짜는 없다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삼계탕집에서는 2주 만에 잘렸다. 과음한 다음 날, 부스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뿔싸, 시계가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완전 지각이다. 사장님은 싸늘한 목소리로 이제 나오지 말라고 했다. 죄송하다고 말하려는데 전화는 이미 끊겨 있다. 피차 아쉬울 것 없는 일자리였지만, 지각 한번 했다고 바로 해고라니. 일주일 뒤, 알바비가 칼같이 들어왔다. 서울의 셈이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 다음 알바는 이상하게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신촌의 그린컴퓨터학원 근처에 있는 허름한 빌딩 3층에서 전화를 걸고 받았는데, 사장이 양아치 같아서 돈을 잘 안 주려고 했던 것만 생각난다. 서울의 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거기도 거리는 회색빛이었던 것만 생생하다.


난생처음 등록금 대출을 받았다. 우리 집 보증금이 500만 원인데, 한 학기 대출금이 380만 원이라니 통장에 찍힌 대출금액 무게에 질식할 것 같았다. 알바를 핑계로 참가비가 15만원이나 하는 신입생 엠티는 건너뛰었다. 입학하는 날, 안면을 튼 아이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어떻게든 친밀감을 형성하려는 그들을, 나는 속으로 가소롭게 여겼다. 여기가 고등학교인 줄 아나. 하긴, 학교 다니는 내내 무리지어 다녔을 너희들은 모르겠구나, 혼자라는 게 어떤 감각인지.


사실 가장 소속감이 절실했던 사람은 나였을 것이다. 강화도에서 혼자 2년간 공부할 때도 곁을 지켜주었던 엄마는, 서울에 온 이후로는 나만 덩그라니 남겨두고 먼 데로 일하러 가버렸다. 간병인 일이 불규칙하게 들어오자 엄마는 서울 근교에 있는, 숙식을 제공하는 요양원에 취직했다. 사흘에 한 번 오던 엄마는, 이제 2주에 한 번 집에 왔다. 학교에서도 혼자, 동네에서도 혼자, 집에서도 혼자. 나는 동굴 같은 집에서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며 하릴없이 누워 있었다. 눈을 껌뻑거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얼하면 좋지.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계란후라이와 라면 끓이기밖에 없었던 나는, 되는 대로 먹고 아무 때나 잠들었다. 청소며 빨래며, 엄마가 해주기 전까지는 그대로 쌓여 있어서 집구석은 개판이었다. 엄마의 노동과 잔소리가 구축해놓은 생활 리듬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시간은 많은데 무기력해서 진공 상태에서 혼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학교에 가면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긴 했다. 우리는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서로의 어떤 점이 끌렸다기보다는, 그냥 우연히 옆에 있어서 같이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이라 알면 알수록 거리감이 느껴졌다. 수업을 듣고 난 후에는, 누구는 기숙사로, 집으로, 남자친구를 만나러, 알바하러 간다며 뿔뿔이 흩어졌다. 딱히 갈 데가 없었던 나는 동아리라도 들어볼까 기웃거려봤지만, 방학 때 알바할 걸 생각하면 어디 섣불리 가입할 수도 없었다. 대학생이 되면 선배들이 밥도 사주고, 술자리도 자주 가고, 연애도 하고 그런다는데 나는 그저 공기 중에 홀로 둥둥 떠다니는 포자(胞子) 같았다. 뿌리만 내리면 어디서든 살 수 있는데,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 몰라 끝없이 탐험을 계속하는 포자. 돌이켜보면 딱히 관심 가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없었으니, 나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자포자기하고 싶은 순간에 나타난 그녀


날이 더워지던 어느 날, 바지락칼국수를 먹고 탈이 났다.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일이 뱃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식중독이었던 것 같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지하철을 탔다. 마침 같은 칸에 함께 다니던 동기가 타고 있었다. 재수생이었던 그 오빠와는 담배를 피우면서 안면을 텄는데,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는 없는 관계였다. 내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챈 그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이성적인 감정이라고는 1도 없는 데면데면한 관계였으니 그것은 그저 아픈 동기를 향한 인류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으리라.


우리 집에 처음 방문한 손님이었던 그는 대뜸 나를 내려놓자마자 호통을 쳤다. “야, 혼자 살아도 잘해먹고 살아야지 집 꼬라지가 이게 뭐냐? 설거지는 제때제때 하고, 김치찌개는 상했어, 임마!” 아파죽겠는데 남자 동기한테 저 따위 소리를 듣다니 쪽팔릴 법도 한데, 나는 필터 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그가 부쩍 가깝게 느껴졌다. 엄마가 지금 집에 왔으면 딱 저런 말을 했겠지. 다행히 약까지 사다주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배탈약까지 사다주었더라면 학교 다니는 내내 담뱃불을 붙여주며 은인으로 모셨을지도 모른다. 외롭고 아픈 사람은 작은 호의에도 취약한 법이다.


그를 보내놓고, 나는 본격적으로 앓기 시작했다. 오후 4시에 시작된 복통은 밤 10시에 구토로 이어지더니,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었다. 사람의 위액이 초록색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몸 안에 든 모든 것을 비워낼 기세로 맹렬하게 구토를 하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 새벽에 일터에서 택시를 타고 올 수도 없고 엄마는 발을 동동 굴렀다. 엄마는 119를 부르라고 했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며 미련하게 버텼다. 무서웠다. 혼자 있는 집에 구급대원이 들이닥치고, 응급실에 가서 의사를 만나고 병원비를 치르고 혼자 돌아와야 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토를 하다하다 지쳐 탈진한 나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 어차피 나를 위해 달려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대로 지쳐 의식을 놓아도 언젠가 눈을 뜨긴 하겠지….


쾅쾅쾅, 현관문을 누군가 거칠게 두드렸다. 이상하다, 119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이 새벽에 누구일까. 두려움에 숨죽이고 있는데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선 씨, 저 집에 왔어요! 애가 문을 안 열어주는데? 어떻게 하지? 문을 따고 들어가야 하나?” 응? 영선 씨? 우리 엄마를 알아? 남은 힘을 짜내 겨우 문을 열었다. 헬멧을 쓰고 라이더 복장을 입은, 풍채 좋은 아줌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건넨 핸드폰 너머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집사님이 병원에 데려다줄 거야.”


그렇다. 엄마는 서울에 오는 날은 일요일, 교회에 가기 위해 쉬는 요일을 고수했다. 서울에 온 지 몇 달 남짓, 그 짧은 기간에도 엄마는 교회 사람들이랑 친해졌던 것이다! 나를 찾아온 집사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퀵 배달만 전문으로 뛰는 50대의 여성 라이더였다. 그녀의 넓은 등을 꼭 껴안고 부릉부릉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데, 어찌나 믿음직스럽던지. 박 집사님은 나를 병원 문 앞에 내려다주고 쿨하게 돌아갔다. 그날, 나는 오토바이 탄 구세주를 만났다.  



링거를 맞고 탈수증세가 진정되어, 동틀 무렵 집에 돌아왔다. 까만 라이더 실루엣만 보이던 박 집사님의 얼굴을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한동안 동네에서 꽃집만 보면, 박 집사님의 남편이 한다는 그 가게일까 싶어서 기웃거렸다.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를 대신해 나를 위해 달려와준 사람이 한 동네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놓였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 동네의 다른 색깔이 눈에 들어왔다.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보라매공원이 있고, 초록의 나무가 있고 넓은 하늘이 펼쳐졌다. 같은 벽돌로 쌓은 단독주택이라도, 대문색이 다르고 창틀이 달랐다. 어디서 코너를 돌아야 우리 집이 나올지 몰라 헤매던 일이 줄어들었다.


나는 곧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주말마다 보라매공원을 가로질러 당구장으로 출근했다. 도착하면 창문을 열어 밤새 고인 담배 연기를 빼내고, 라디오를 켰다. 빨노초흰검 색색깔의 당구공을 세척기에 돌리고, 초록색 다이를 닦고, 냉커피를 타서 냉장고에 집어넣어두면, 손님 맞을 준비가 끝난다. 당구장 손님으로 오는 아저씨들은 내게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건넨다. 단지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건네는 말이라는 걸 안다. 서울 사람들은 여전히 내게 무관심하다. 1학기가 끝나가도록 그다지 친해진 동기도 없다. 하지만 가족 밖에 가족이 있을 수 있듯, 고향 밖에서도 고향을 찾을 수 있다. 낯모를 중년여성의 등에 업히던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서울과도 관계를 맺어보겠다고 용기내기로 한 것이.



이후로 신림에서 10년을 살았다. 오늘처럼 매미소리가 쨍한 여름이면, 보라매공원의 가로수길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며 맞았던 시원한 바람이 그리워진다. 박 집사님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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