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용서하는 게 아니라 가여워해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너를.”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의 초입, 강화도의 식당에는 손님들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숭어가 돌아오는 2월이 오기 전까지는, 관광객으로 북적대던 풍물시장도 한산할 것이다. 엄마가 다니던 장어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에 12시간 설거지를 해도 쏟아지는 그릇을 감당 못하던 그 가게에서 일감이 그렇게 뚝 끊길 줄은 몰랐다. 강화도로 이주한 지 반 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육지 것’이었던 우리는, 이혼한 아빠가 절대 찾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강화도를 피난처로 택했다. 겨울에 강화도에 살아 보니 알 것 같았다. 이곳이 왜 유배지이자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기지가 되었는지. 몸뚱아리 하나만 믿고 강화도에 온 엄마와 나는, 물리적 고립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려 했지만 그럴수록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엄마는 일하던 장어집에서 잘린 후, 백방으로 일자리를 찾았다. 한 달만 급여가 들어오지 않아도, 보증금 50만 원에 월 10만 원짜리 단칸방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가난이 목을 죄는 시기였다. 그러다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숙식을 제공하는 요양원에서 사람을 급히 구한다며, 딸과 함께 들어가서 살면 어떻겠느냐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루 12시간 노동에 월 2회 휴무, 월 60만 원. 4대 보험도 안 되고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2004년 당시에는 요양보호사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었다.) 월세와 끼니 준비에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엄마는 그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것이 범을 피해 뱀의 아가리로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일인 줄도 모르고.
요양원은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은 들어가야 하는 한적한 마을의 산자락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한낮에도 고라니가 뛰어다니는 외진 곳이었지만 가정집 몇 채로 이뤄진 요양원은 전원주택 단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모녀에게 내어준 숙소는 깔끔했다.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 커다란 거실을 갖춘 집에서 우리는 큰 방 하나와 별도의 화장실을 썼다. 볕이 잘 들고 따뜻했다.
거실 건너 작은방에는 같은 요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살았다. 50대 초반쯤 되었을까, 바싹 마른 몸에 예민해 보이는 그 여자의 사연은 엄마만큼이나 딱했다. 남편이 사업하다가 망해서 그 빚을 갚으려 자기가 일본에 가서 몇 년 일하고 왔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는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단다. 수술을 받고 나니 오갈 데가 없어서 언니가 운영하는 요양원에 와서 쉬엄쉬엄 일도 거들어줄 겸 와 있다고 했다. 세월을 견디느라 패인 주름살은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보였지만, 나는 그녀의 인상이 싫지 않았다. 일본에 가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면서도, 가게 주인이 무시하면 눈을 까뒤집고 한국말로 욕을 한 사발 부어줬다는 그녀의 무용담은 들을수록 시원한 구석이 있었다.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다. 우리 엄마가 저 아줌마처럼 한 성깔 하는 사람이었으면 아빠한테 그렇게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을 텐데. 그 무렵 나는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한 편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녀가 내게 읍내에 나가는 길에 털실을 사다 달라는 둥, 자잘한 부탁을 할 때면 내심 기뻤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어쩌면 가족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났을까, 처음에는 내가 밤에 친구와 전화하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겠다고 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저녁 9시쯤 집 주변을 산책하며 친구와 길게 통화를 하곤 했다. 안 그래도 불면증이 있는 데다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내 통화소리가 거슬릴 만도 했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자제했다. 얼마 뒤에는 밤에 화장실 가는 내 발소리가 거슬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고 화장실에 다녔다.
내가 소리를 지우려 노력하는 동안, 엄마는 그녀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툭 하면 환자를 꼬집고 때리고 욕하고 소리 지르며 위력으로 제압하던 그녀는, 엄마가 일하는 방식을 못마땅해했다. 때리면 막고 피할지언정 환자를 달래고 진정시키는 데 엄마는 힘을 쏟았다. 늙고 아프고 외로우면 사람이 다 그렇게 되는 법이라며, 두 시부모의 병수발을 도맡았던 때처럼 성심성의껏 환자를 대했다. 엄마가 마음을 다해 일할수록 본인의 악행이 도드라지는 게 싫었던 걸까. 엄마는 불같이 화내는 사람 앞에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곤 했다. 그 반응 없음이 그녀를 더 화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다만 엄마 이전에 있었던 사람도 그녀와의 불화로 일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안다. 우리가 나가는 그날까지, 괴롭힘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어느 겨울 아침, 머리를 감고 있는데 갑자기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보일러가 고장 났나 싶었다. 아니었다. 내가 뜨거운 물을 쓰는 걸 알고, 그 사람이 일부러 외부에 있는 보일러실까지 가서 온수를 잠가버린 것이었다. 머리칼에서 찬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나를 향해 그녀는 말했다.
“너, 아침마다 온수로 머리 감더라? 드라이기도 맨날 쓰지? 저녁마다 컴퓨터도 쓰고! 도대체 네가 쓰는 기름값, 전기세, 수도세가 얼마인 줄 알아? 너네 엄마도 샤워 맨날 하고 말이야! 물자 아까운 줄을 몰라. 너네 모녀가 써대는 거 도저히 못 봐주겠어. 앞으로는 너네 엄마한테도 찬물로 샤워하라고 해!”
그녀는 오랫동안 별러온 듯 작정하고 소리쳤다. 마침 엄마는 아침 일찍 요양원으로 출근하고 없는 때였다. 놀란 나는 울면서 떠듬떠듬 변명했다. “머리 최대한 덜 감고, 웬만하면 저녁에 말리고 잘게요. 그런데 우리 엄마는 따뜻한 물로 샤워하게 해주면 안 돼요? 몸이 약해서 우리 엄마는 찬물로 샤워하면 아플 것 같아요….”
그 말은 그녀의 더 자극했다. 어린 게 어른이 말하면 시키는 대로 예예, 할 것이지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답이냐며 눈을 부라렸다. 나는 울음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눈물 콧물을 찍어내기 바빴다. 할 말은 많았다. 대관절 우리가 쓰면 얼마나 쓴단 말인가. 우리 모녀의 숙식비로 40만원 이상은 제하고 급여를 주고 있을 텐데, 그걸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아무리 자기 언니가 운영하는 요양원이라지만, 자기가 사장도 아니고 저런 말을 할 자격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도 엄마가 자리를 비운 이 시각에, 미성년자 혼자 덜렁 남겨진 상황에서 어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할 말인가. 내가 샤워라도 하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나. 그 추운 날에 찬물로 샤워를 하라니…. 서럽고 억울한데 무서워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노동과 가난으로 점철된 엄마의 일상을 지켜보며, 어려서부터 나는 얼른 돈을 벌어서 엄마를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짜리 애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도서관에서 홀로 검정고시와 수능을 준비하던 나는 지독하게 공부에 몰두하는 것 외에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요양원 더부살이로 눈칫밥을 먹으며 종종거리면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무엇이 그 순간, 확실하게 보였다. 아, 내가 엄마의 아킬레스건이로구나. 나 때문에 엄마는 이 여자로부터 평상시에 모욕을 당하고도 참고 있었구나. 이 사람은 그걸 알고 이용하고 있었구나. 소리, 인기척, 불빛은 나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것들이다. 나더러 물도, 전기도, 보일러도 쓰지 말라는 건 존재 자체를 지우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꼴 보기 싫으니 나가라는 뜻이다. 자기가 뭔데? 내가, 엄마가 그렇게 만만한가?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막 대해도 되나? 분노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날 나는 도서관에 가는 길에, 노래방에 들렀다. 대낮에 혼자 노래방에서 울음과 악을 동시에 질러댔다. 그러고서는 말끔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엄마에게 걱정거리를 더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 모욕, 이 치욕은 나 혼자 겪은 걸로 충분하다 여겼다.
며칠 뒤,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도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는갑다.” 운영자는 엄마를 불러 권고인 척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딸을 김포에 있는 기숙학교에 보내고, 엄마 혼자 여기서 일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엄마한테 한마디 말도 못한 사이, 그녀는 그 길로 운영자인 자기 언니한테 뛰어가 내가 자기한테 대들더라며 당장 내보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는 ‘불화의 원인’으로 나를 지목하고 내보내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목사 부부가 운영하는 요양원에서 없는 사람을 이렇게 내쫓을 줄은 몰랐다. 크리스천의 정의란 고작 이런 것인가. 우리와 한 지붕 아래 기거했던 그녀의 직함은 권사였다. 김 권사의 주특기는 새벽기도다. 우리를 괴롭힌 다음날이면, 하느님에게 회개의 기도를 올리느라 일찍 일어났다고 생색을 내곤 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한테는 기도를 올릴 수 있어도, 날마다 얼굴 맞대는 사람한테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신앙심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에게 기도란, 자신의 죄책감을 손쉽게 사해주는 면죄부였다. 목사 부부의 십자가 역시 혈연으로 기울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실에 걸린 십자가를 원망했다.
보름 뒤, 우리는 짐을 쌌다. 이삿짐 트럭 안에서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와 저 여자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그때는 저 목사 부부도, 예배당의 허울 좋은 십자가도 불길에 넘실넘실 넘어가겠지. 요양원 단지가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는 풍경을 상상하며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상상 속에서 나는 그녀를 죽였고, 그 공간을 지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에 대한 기억은 또렷해졌다.
사회에도 김 권사 같은 사람은 차고 넘쳤다. 어리고, 가난하고, 자기를 보호해줄 어른도 없는, 세상물정 모르는 여자애를 귀신같이 찾아내서 먹잇감으로 삼는 하이에나 같은 어른들. 알바 하던 곳의 사장님, 내가 의지했던 교수님, 심지어 계약직으로 일했던 NGO의 대표까지 비열한 권력자는 하나같이 그 여자를 닮아 있었다. 그런 어른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날이면, 김 권사는 어김없이 내 꿈에 찾아왔다.
그녀가 꿈속에 나타나는 날이면 강화도에서 겪은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여자는 우리한테 왜 그렇게 못 되게 굴었을까,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가난한 모녀를 그렇게까지 내몰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묻고 또 물었다. 대답 없이 울려 퍼지는 메아리 속에서 질문은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을까. 그 모진 말들을 어째서 다 듣고 앉아 있었을까, 바보같이. 자리를 피해버리든가, 아니면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라도 하든가. 왜 엄마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을까. 그 여자가 언니한테 고자질하기 전에 내가 먼저 목사한테 달려가서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 그전에 내가 어른들한테 좀 더 싹싹하게 굴었더라면, 주말에 예배도 드리고, 요양원 일도 거들어주고, 자원봉사도 하고 그랬더라면 애초에 그렇게 미운털 박힐 일도 없지 않았을까. 내가 눈치 없이 뻣뻣하게 굴어서 엄마가 더 힘들었을지도 몰라, 바보 천치같이.
나는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실은 나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어린애였다. 지켜주기는커녕 짐이 되고 말았다는 죄책감, 자책감, 무력감. 사실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내가 쓰는 물세, 전기세, 기름값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고 김 권사가 몰아붙이던 그때, 나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애초에 이런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악인을 이해하려 들수록 자신을 탓하게 될 때가 있다. 왜 하필 나였을까, 내가 빌미를 제공한 것은 아닐까, 내가 얼마나 얕보였으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지만 악행에는 이유가 없다. 그럴 수 있어서 그렇게 한 것뿐. 그 사실을 알기까지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냈다. 18년. 자그마치 18년간 김 권사를 잊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그 시절의 내가 참 안됐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혼자 노래방에 가서 목 놓아 울었던 나를 떠올리면 안쓰럽다. 억울하고 분해서, 불을 질러서라도 복수하고 싶었던 나의 등을 두들겨본다. 과거의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 너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책하지 마. 그건 그 어른이 잘못한 거야. 너는 아이였잖아. 네가 기대도 좋을 만한,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어른이 네 곁에 없었잖아. 혼자서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울어, 울어도 괜찮아. 약한 건 나쁜 게 아니야. 약한 건 절대로 나쁜 게 아니야….”
지금 내 앞에 열여덟 살의 내가 있다면 실컷 울도록, 소리치도록, 가슴이 뻥 뚫릴 때까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줄 것이다. 같이 울고 꼭 끌어안아줄 것이다. 흥분이 잦아들면 달콤한 디저트를 내어줘야지. 어리고 약해서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나를 이제는 용서해주고 싶다.
긴긴 이야기를 들은 친구 K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하는 게 아니라 가여워해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너를.” 그래, 악인에 대한 기억은 이제 놓아줘야겠다. 그를 미워했던 에너지로, 과거의 나를 꽉 보듬어줘야지. 그리고 나아갈 것이다. 거울 너머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