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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Sep 30. 2022

벼랑 끝에 나를 세웠더니 죽고 싶어졌다(2)

등록금이 없어서 등록금 대출 센터에서 일하게 된 아이러니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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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랑 끝에 나를 세웠더니 죽고 싶어졌다(1) 



총장 신부님은 커다란 원형 테이블로 나를 안내하며,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고 했니?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구나.” 방어적인 자세로 잔뜩 긴장해 있던 나는, 그 한마디에 얼음이 녹듯 무장해제되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어른은 없었는데…. 그런 사람이 눈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나는 주섬주섬 그간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부모님 이혼하고 독학으로 입시를 준비한 과정, 대학 와서 등록금 마련하느라 장학금과 알바로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해 말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고, 그만두기 전에 꼭 한번 뵙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말하는 내내 찔끔찔끔 눈물이 새어나오더니, 결국 울음보가 터져서 보기 흉할 정도로 꺽꺽거리기에 이르렀다. 한참을 듣던 총장은 말했다. 


“거기 탁자 위에 있는 함을 열어보렴. 달콤한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다.” 


초콜릿인지, 사탕인지 입에 집어넣으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마치 할아버지가 우는 손녀 손에 솜사탕 쥐어주며 달래는 것 같잖아. 입에서 달달한 것을 굴리는 동안 호흡이 제자리를 찾았다. 총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얼마 있으면 학교를 졸업할 수 있겠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총장 신부 뒤로 은총 같은 햇살이 방사형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무신론자인 나는 하마터면 이렇게 물을 뻔했다. "혹시...신이세요?" 그는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독수리를 타고와 구원해주는 백색의 간달프 같았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백색의 간달프. 우리 편이 죽기 직전에 나타나 적을 쓸어버린다. 일찍 오면 어디가 덧나냐고...


그렇다면 나는 씩씩한 프로도가 될 수 있다. 나는 이번 학기만 등록하면, 남은 두 학기는 어떻게 해서든 내 힘으로 졸업할 거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다 할 약속을 하진 않았지만 나중에 따로 연락이 갈 거라고 했다. 총장실을 나오는데 탈진한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신부님이 챙겨준 사탕을 오물거리며 겨우 집에 돌아왔다. 그날은 푹 잠들 수 있었다. 



초콜릿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


믿는 구석이 생겨 마음이 편해진 탓일까, 이후로는 어쩐지 일이 순탄하게 풀렸다. 개강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기적적으로 일자리를 구했다. 학자금대출 콜센터 알바였다. 나는 하청업체 소속의 단기 알바로, 한국장학재단에서 운영하는 학자금대출 제도를 안내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하루 만에 교육을 마치고 현장에 투입되었다. 과연 알바한테 최저 임금 이상을 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본 콜센터는 헤드셋을 끼고 싸우는 전쟁터였다.


9시, 업무가 개시되자마자 미친 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하루에 1인당 적게는 150통, 많게는 300통씩 콜이 쏟아졌다. 회사에서는 점심으로 도시락을 배달시켜주었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후다닥 해치우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나면, 다시 헤드셋을 끼고 착석할 시간이다. 1시, 100명 넘는 콜센터 사람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댄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다음 콜이 울린다. 10초도 숨 돌릴 새가 없다. 물 마시고 화장실 가고 담배 피우는 게 유일한 휴식 시간이다. 그렇게 6시까지 ‘콜키퍼’로 전화를 막아내다 보면 목이 다 쉰다. 2주 만에 걸린 목감기는, 개강이 다 되도록 낫지 않았다.


사실 콜센터 일이 고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학자금 대출 신청 방법은 이미 인터넷에 잘 나와 있기 때문에 그걸 몰라서 전화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학자금 대출이 거절된 사람들이 거는 항의성 전화였다. 센터에서 학자금 대출 연체 내역 정도는 인트라넷을 통해 알 수 있어도, 그 이외의 신용 정보는 조회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휴대폰 요금이 연체되거나, 공과금을 내지 못하거나, 보증을 서줄 부모님이 신용불량이라 대출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용정보 회사에 직접 문의해봐야 하는데, 2008년 당시에는 개인이 자신의 신용등급을 조회해보기만 해도 등급이 떨어졌다. 


그러니 콜센터에 전화해봐야 대출이 안 나오는 이유를 알 수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종일 그런 답변을 하고 있노라면 자괴감이 들었다. 나도 모른다. 대출 이자를 몇 번이나 연체하면 다음 번 대출이 나오지 않는지, 지금이라도 갚으면 대출이 나오는지, 정부는 학생들한테 왜 이토록 매정하게 구는지,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는지….


하루에도 수십 통씩 눈물바람으로 하소연하는 이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밀린 이자를 갚을 테니 제발 대출을 하게 해달라는 대학생, 석사 마지막 학기인데 이번에 등록금 대출이 나오지 않으면 졸업을 못한다는 대학원생…. 전화를 받는 나나 그들이나 같은 처지였다. 내 옆자리의 또 다른 알바생은 공과대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때까지 진 빚만 등록금과 생활비를 합쳐 3천만 원에 달했다. 우리는 매일 거울 같은 사연을 접하며 속으로 같이 울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조금 더 다정하게 거절하는 수밖에는.



구명보트가 필요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하루하루 콜을 쳐내다보니 등록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놀랍게도 등록금의 반액이 경감되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반액 성적 장학금을 받은 것이다. 총장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학기에는 ‘총장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나머지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총장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특수 활동비로, 매년 열 명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 뉴스도 들려왔다. 나는 그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 구명보트에 탑승한 사람은 총 열 명. 우리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여전히 누군가는 표류하며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학자금 대출 센터에 전화해 울며불며 하소연하던 그 학생들처럼.


총장 장학금이 아니더라도 나는 졸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적 장학금과 알바비를 합치면 3학년 2학기 등록금도 내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장학금을 받음으로써 달라진 것은 세계를 향한 나의 태도다. 그때까지 나는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매 학기 시험과 알바에 목숨을 걸었던 것은, 내가 그렇기 하지 않으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데서 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가난하면 고립되기 쉽다. 남루한 사연이 부끄러워서 남한테 선뜻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기가 어렵다. 남는 것은 자존심뿐이다. 부족할지언정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그 최후의 자존심을 지키려 입을 꾹 다물고 홀로 고통을 견딘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혼자서 버틸수록 그걸 지켜보는 주변 사람이 힘들어질 뿐이다. 당시 애인이 총장을 찾아가보라 권했던 것은, 고통 속에 고립되어가는 나를 꺼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 심정을 안다. 엄마는 힘들수록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 아무리 힘에 부쳐도 가족, 친지, 친구 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오로지 혼자서 버텼다. 아마 타인의 도움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학교에서 받은 조건 없는 지원은, 그간 내가 고수해오던 고립 정책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타인에게 기대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다. 꼭 피가 섞여야만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곁에서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주변의 자원을 찾아서 연계해주는 것, 돈으로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는 것까지 그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각자도생의 시대, 자신을 끝없이 착취해야만 살아남는 세계가 만들어낸 불안은 결코 혼자서는 없앨 수 없다. 남한테 기꺼이 의지하고, 나 역시 남에게 곁을 내어줄 때 생기는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만이 불안을 낮출 수 있다. 


총장 신부님을 떠올리면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생각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민둥산에 도토리를 묻어가며 너도밤나무를 심는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간 사람이, 몇 십 년 뒤 그곳을 찾았을 때 울창해진 숲을 목격한다는 내용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영화 <나무를 심은 사람> 포스터 


신부님은 말 그대로 나무를 심는 사람이었다. 그린벨트에 학교를 세우면서 수백, 수천 그루의 나무를 베어냈을 터인데, 그 부지에 몇십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지만 그는 임기 내내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위기에 처한 학생을 구했다. 물론 등록금 자체를 인하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대학의 5년 단임제 총장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눈앞의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사회 전체로 보면 의미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이 자라나 또 다른 사람을 구하고, 선의가 몇 배수로 불어 생태계를 이룰 수도 있다. 신부님은 적어도 눈앞의 학생 한 명의 마음만은 구했다. 그리고 나는 이 씨앗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능력주의로 철갑을 두르고 낙오된 사람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 구명보트에 타지 못했던 수많은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그들은 무사히 등록금을 내고 졸업했을까. 살면서 위기의 순간에 간달프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개인의 선의에 기대 살 수만은 없다.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란 떨어질 벼랑 자체가 없는 곳이다. 애초에 등록금이 그토록 높지 않았더라면, 장학금이 성적순이 아니라 낮은 소득순으로 주어졌더라면, 등록금 대출 조건이 좀 더 관대했더라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등록금대출센터에 전화해서 울지 않았을 것이다. 


벼랑 끝에 밀어놓고 구명보트에 몇 명을 태우기보다는, 아예 구명보트가 필요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부모가 가난해도, 내가 능력이 좀 부족해도, 동쪽에서 귀인을 만나지 않더라도, 오늘과 내일의 안녕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회에 살고 싶다. 절벽이 아닌 평지에 살고 싶다. 그때가 되면 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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