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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Aug 26. 2022

무례한 중년 남성에게 맞서는 자세

당신에게도 싸울 수 있는 몸이 있다

싸움은 기세다. 아무리 체구가 작을지라도 매섭게 달려들면 한 대는 때릴 수 있다. 쫄지 말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노려보자.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타오르는 눈빛으로 알게 하자. 나를 함부로 대하는 무례한 중년 남성에게는 더더욱.


싸우거나 혹은 도망치거나(Fight or Fly). 적을 만나면 우리 뇌에서는 자율신경계에 명령을 내린다. 비상, 비상이다! 싸우거나 도망쳐! 생존을 위해 발달한 투쟁-도피 반응은 이렇게 변형될 수 있다. 'Fight and Fly' 한 대 후려갈기고 도망치거나 'Fly and fight', 도망 친 다음 기회를 엿봐서 뒤통수 갈기기. 이 전략은 꽤나 효과적이다. 특히 상대방이 체구가 크고 위압적일수록 그러하다. 절대 덤비지 못할 거라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공격을 받았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그 순간을 이용하면 판세를 뒤집을 수 있다.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싸울 수 있는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출처: 픽사베이


전략1. 한 대 후려갈기고 도망치기


지금은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부친이,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날 때가 있다. 바로 무례한 중년 남성을 일상에서 마주쳤을 때다. 작고 어린 여자를 만만하게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위압적으로는 군다. 이들은 위에서 내려본다거나 앞으로 다가오면서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으르렁거리며 큰소리를 낸다. 이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하나다. ‘너 여기서 나한테 맞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조용히 해, 복종해, 순응해.’


압도적으로 큰 개체가 위협할 때, 나의 세포는 하나하나 깨어난다. 눈빛이 변한다. 배에 힘이 들어간다. 목에 압력이 높아진다. 날카롭게 쏘아보며 욕을 한 사발 쏟아줄 준비가 끝났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내 몸은 전투 의지로 활활 타오른다.


중학교 시절 내내, 오후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아빠와 단 둘이 있어야 하는 때가 많았다. 엄마는 회사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야근을 했다. 아빠와 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리고 뒤처리를 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 시간이 나는 두려웠다. 아빠의 기분은 종잡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유를 모르고 맞았다. 일단 싸대기부터 날리고 아빠는 말했다. 여자애가 발소리가 그게 뭐냐, 물을 칠칠치 못하게 엎지르다니, 말하는 게 싸가지가 없다 등등 이유는 붙이기 나름이었다. 놀라서 울지도 못하고 때리는 대로 맞고 자랐던 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차곡차곡 적립해왔다. 언젠가, 때가 되면, 당신을, 나도….


그날도 엄마는 야근을 했고 내가 아빠의 밥상을 차렸다. 아빠는 말했다. “기지배가 일찍일찍 다녀야지 말이야, 어딜 그렇게 늦게까지 싸돌아다니고 제정신이야, 네가? 내일부터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와.” 동네 친구네 집에서 두어 시간쯤 놀다가 오후 6시에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나는 맞받아쳤다. “왜? 나는 여자라서 집에 일찍 들어와야 해? 오빠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잖아.” 중3인 나는 오후 6시에 들어와도 욕을 먹었지만, 고3인 오빠는 저녁 11시에 들어와도 터치하지 않았다.


말이 그렇게 두세 번 오갔을까, 아빠는 먹고 있던 밥상을 나한테 던졌다. 그릇이 나뒹굴고 김치 국물과 된장국이 한 데 엉겨 내 옷에 스며들었다. 아빠는 명령했다. “너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 가슴속에서 천불이 타올랐지만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아빠는 그런 나를 앞에 두고 태연하게 티브이를 봤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 엄마가 귀가할 때까지. 저녁 9시에 돌아온 엄마는 놀라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혔다. 나는 괴성을 지르며 성난 황소처럼 부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빠가 입고 있던 흰색 난닝구의 한복판을 찢어버렸다. 아빠가 벙찐 표정을 짓는 사이, 나는 뒤돌아 맨발로 마당을 뛰쳐나갔다. 정신을 차린 아빠가 쫓아올까 봐 친구네 집까지 전력 질주했다. 봉두난발을 하고서 들어선 나에게 친구네 엄마는 것도 묻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한테 전화는 한 통 드려.” 그날 저녁, 엄마는 내게 신발과 교복을 배달해주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친이 충격을 받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아빠가 무서웠지만, 몸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이 몸으로, 나도, 때릴 수 있다. 반격할 수 있다. 십 년 넘게 맞아오다가 딱 한 대 쳤을 뿐인데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돌격해본 경험은, 내게 싸우는 몸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 후로 중년 남성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몸이 큰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해도, 내가 맞서 싸우기로 작정하면 위협은 위협으로 그칠 뿐이다. 아빠가 나를 때리는 걸로는 신고할 수 없지만, 남이 나를 그렇게까지 때린다면 경찰서에 가야 할 테니까.


전략2. 도망 친 뒤에 뒤통수 갈기기


열여덟, 학교 밖 청소년으로 지낼 때의 일이다. 모부가 이혼한 뒤, 나는 자퇴하고 엄마와 함께 강화도로 이주했다. 도서관에 가는 버스를 탈 때마다 기사들은 갸우뚱한 눈치였다. 누가 봐도 10대임이 분명한 아이가 사복을 입고 대낮에 돌아다니니 뭔가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 호기심일 뿐, 버스 기사들은 당연하다는 듯 성인 요금을 요구했다. 성인은 1200원, 청소년은 700원. 왕복 요금으로 치면 매일 1000원을 손해 보는 셈이다. 그 돈이면 떡꼬치에  튀김까지 사먹을 수 있는데! 분식집 앞을 지날 때마다 침을 삼키며, 나는 버스 요금으로 더 낸 1000원을 아쉬워했다.


그러던 차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인천시에서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해 ‘청소년증’을 보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예능 프로그램 <느낌표>에서 청소년 할인 캠페인을 다룬 영향이었다. 버스 기사한테 청소년증을 내보이면 학교 밖 청소년도 요금 할인을 받도록 하는 제도였다. 지금처럼 카드만 대면 자동 결제되는 시스템이 아니라 현찰로 요금을 내야 하는 시절이었기에, 버스 기사가 나를 청소년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이를 증명하는 카드를 정부에서 만들어준 것이다.


2003년 MBC에서 방영된 예능프로그램 <느낌표>.  출처: https://www.youtube.com/wat


그러나 강화도의 버스 기사들은 청소년증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버스를 탈 때마다 “청소년이요….” 하고 말하며 청소년증을 꺼내 보였으나, 기사들은 ‘그게 뭔데?’ 하는 떫은 표정으로 성인 요금을 요구했다. 또래 애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혼자 사복을 입은 나는, 더 따질 용기가 나지 않아 얼굴만 시뻘개진 채로 입을 꾹 다물곤 했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승객 없는 버스 안에서 나는 작정하고 기사한테 말했다. “청소년증이라고, 인천시에서 학교 밖 청소년한테 만들어준 건데요….” 기사는 그런 건 모르겠고, 무조건 성인 요금을 내라며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알겠다 하고, 출입구 근처에 놓인 민원 용지를 뽑았다. 놀란 기사가 내 손에서 종이를 뽑아 좍좍 찢어 얼굴에 뿌리며 소리쳤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게 다 있어? 니네 아버지 이름 뭐야!”


적어도 버스 안에서만큼은 그가 왕이었다. 그 섬에서는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관계였으므로, 나를 지배하는 아버지와 얘기해서 이 되바라진 여자애를 혼내주겠다는 심산이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아버지에게 속한 자식이 아니라, 빈손으로 출애굽기를 찍은 어머니의 딸이었다. 한밤에 버스 종점에서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다가오는 버스 기사 앞에서 나는 일단 후퇴했다. 그 상황에서 맞으면 나만 손해다. 아버지의 이름을 물었으니,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한다 해도 이방인의 딸이자 미성년자인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공권력이 필요했다. 울면서 돌아온 나는 모니터에 앉아 분노의 타이핑을 했다. 국민신문고, 강화군청, 인천시청 등등 5곳에 인터넷으로 민원을 넣었다. 다음날, 군청에서 전화가 왔다. 해당 운수업체에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열흘 뒤, 민원 결과가 이메일로 날아왔다. 이 섬에 사는 10명 남짓의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도 이 결과가 적용될 수 있도록 안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몇 달 뒤, 메이저 신문의 기자한테서 연락이 왔다. 후속 조치를 궁금해하며, 이를 기사화하고 싶다고 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남한테 안 좋은 소리를 하면 왠지 나한테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아 인터뷰를 거절했다. 만약 민원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더라면 인터뷰에 틀림없이 응했으리라.  


그 후로 나는 당당하게 청소년 요금을 내고 다녔다. 청소년증만 보여주면 그뿐, 어떤 버스 기사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내게 고압적으로 굴며 으르렁거렸던 그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그는 버릇없는 여자애를 혼쭐 내줬다고 여겼겠지. 며칠 뒤 부메랑으로 돌아온 공문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무엇이 됐든 나의 명백한 승리였다. 그 단맛을 잊을 수 없다. 맞을 각오로 덤벼드는 것에 비해, 글로 쓰는 것은 얼마나 쉽고 안전한 일인가. 게다가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의 문제까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니! 나는 일찍이 맛본 적 없는 효능감에 도취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고통에 맞서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불합리한  명백하지만 힘으로 이길  없을 때는 한발 물러섰다가, 법적제도적인 문제를 찾아서 공론화했다. 무례한 남성들은 대체로 이런 상황에 취약하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을 두고, 나이가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얕잡아보고 큰소리 쳐서 문제를 해결하려든다는  자체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한테 강하다는 증거다. 이런 사람일수록 공권력 앞에만 서면 얌전해진다. 한정된 시공간에서 육체적 힘을 우위로 행사하려 했던 권력은, 백주대낮의 공권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비겁한 '강약약강' 같으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성을 우습게 보는 사회에서


날이 갈수록 무례한 중년 남성을 대하는 전투력이 상승하고 있다. 살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경험치가 쌓였다. 알바 할 때 다짜고짜 반말을 하며 내 손목을 붙잡던 손님, 도로 위에서 늦게 간다고 욕설을 내뱉던 운전자, 성추행을 일삼던 클라이언트까지 이들은 하나같이 중장년 남성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일상에서 겪는 자잘한 차별은 입에 담기조차 구차하다.


좁은 길을 갈 때, 여태껏 나는 내가 앞에 오는 사람을 눈여겨보지 않아서 그렇게 많은 ‘어깨빵’을 당하는 줄 알았다. 남편과 같이 걸으면서 알았다. 나를 툭툭 치고 지나가던 그 많은 남자들이, 건장한 남자 앞에서는 알아서 길을 비켜준다는 것을. 익숙한 길이라도, 남편의 안쪽에 서면 훨씬 편하게 걸을 수 있다. 40대가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여성으로 위치지어진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남편은 음식점에서도, 관공서에서도, 정중하게 말하면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 반면 나는 예의바르게 말할 때 존재감이 지워지곤 한다. 나는 내 자신을 대표할 수 없다는 듯, 어떤 남성들은 여성인 내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한다. 그것이 권리를 요구하거나 주장하는 목소리일 때 특히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음식점, 부동산, 은행, 관공서에서 상대가 남성이라면 일단 긴장부터 하고 본다. 뭔가를 따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인터넷에서 온갖 사례와 근거를 찾아보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하고서야 움직인다. 혹시나 현장에서 내가 모르던 사실을 발견하고 어리숙한 사람으로 비칠까 봐, 그러다 수세에 몰리면 만만한 여자로 보일까 봐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단전에 힘을 주고, 원기옥을 끌어모은 다음, 할 말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뗄 수 있다.        


내가 화장도 안 하고 수수하게 하고 다녀서 이런 대접을 받는 걸까? 옷을 좀 격식 있게 갖춰 입으면 다를까? 30대도 아직 어린가? 좀 더 나이 들면 나을까? 이런 고민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으로 판명났다. 남편은 슬리퍼에 반바지를 신고 가도, 한국에서는 어딜 가든 대접받더라 이놈의 세상은 어찌된 일인지 남성에게만 친절하다.


그러니까 여성으로서 어디 가서 푸대접 당하지 않으려면 항시 ‘전투 모드’ 혹은 ‘방어 모드’로 살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긴장도가 높고 늘 흥분된 상태로 있다 보니, 정작 쉬어야 할 때 제대로 쉬지 못한다. 이는 건강 상태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스트레스를 계속 받으면 이완돼야 할 시기에 더 긴장하기 때문에 긴장을 야기하는 교감신경이 늘 흥분 상태에 놓이는데, 그 최종 목적지가 바로 불안장애”라고 주성완 다나을한의원 원장은 말한다. 여성의 불안장애 유병율은 남성에 비해 2배가량 많다. 나 역시 불안장애를 갖고 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미국의 한 연구에 의하면, 인종차별을 당하는 청소년은 수면 시간이 적으며 수면의 질도 떨어진다고 한다. 차별과 같은 사회적 스트레스가 신체적 안정감을 저해하는데, 이것이 곧 불면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수면 심리학자 서수연 교수는 말한다. "학계에서는 통상적으로 여성의 불면증 유병률이 남성의 1.5배라고 봅니다. 그만큼 여성이 남성보다 휴식을 취하기 어렵고,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유럽이나 미국에 여행 가면 부지불식간에 인종차별 당하지 않으려 긴장하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경험을, 여성은 살아가는 내내 하는 것이다.  


나라고 싸우고 싶어서 싸우겠는가. 나도 긴장 풀고 편하게 좀 살고 싶다. 그러나 남자한테만 친절한 이 개 같은 세상에서는 안 싸우고 싶어도, 안 싸울 도리가 없다. 무시하라고? 다시 안 볼 사람인데 참고 지나가는 게 낫다고? 물론 그게 수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지나가면 무례한 행동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셈이 된다. 그러면 이들은 다음번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서비스를 해놓고도 높은 가격을 부르고, 허락도 없이 반말을 섞어 쓰며,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응징한다. 내가 만만해 보인다고? 지금 내가 물러난 것처럼 보인다고? 뒤통수 조심해라. 당신이 잠든 사이, 그때 내가 치러 갈 것이다. 전화든, 이메일이든, 고소장이든 날아갈 테니 긴장하고 있어라.


낮에 당한 일로 잠 못 드는 누군가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당신에게는 싸울 수 있는 몸이 있다. 반격할 기회는 반드시 온다. 오늘 일은 당신 탓이 아니다. 때가 되면 다른 방식으로 싸워보자. 그러니 오늘 밤은 부디 푹 주무시길.



*참고자료

‘불안사회 공황장애’, <한겨레21>

‘차별당하는 사람은 수면의 질이 낮다’, <메디컬포스트>

'여성의 불면, 수면 위로 올릴 때', <한겨레>

'잘못 살고 있나, 2년마다 한 번씩 당하는 강제 자아 성찰',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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