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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Sep 19. 2022

나의 미친 집단 상담기

솔직하지 못한 자들이 가는 지옥

나는 심리학을 전공했다.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강의가 있다. 바로 ‘집단 상담’ 수업이다. 절대 평가 18명, 한정된 인원으로 구성된 그 수업의 커리큘럼은 이러하다. 지역의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만난 아이들(대게 초등학생)에 대해 간단한 리포트를 제출하고, 수업 시간에는 거기서 활동하는 동안 느낀 소감을 말하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우리가 보통 어떤 자리에서 느끼기를 기대받는 바람직한 감정, 생각을 꾸며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독일에서 정신분석학을 10년이나 공부하고 돌아온 교수님이 훅 치고 들어온다. 포장된 말을 털어내고 그 안에서 고갱이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본질을 꿰뚫는 듯한 그 질문은 상상 이상으로 위협적이다. 


사람마다 관계를 맺는 패턴이 있어, 자원봉사를 하며 만난 아이에게 느낀 감정은 평상시에 내가 맺는 인간관계를 재현하게 마련이다. 교수는 자원봉사 경험에서 출발해, 발표자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이야기를 끌어낸다. 이 내밀한 역사를 17명의 학우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듣고 한마디씩 보탠다. 예의는 필요 없다. 표현이 거칠어도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상대방에게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솔직하게 표현할 것. 그것만이 이 수업의 원칙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너 전부터 보고 느낀 건데, 왜 발표자가 말할 때 듣는 척만 하고 딴 짓하고 있어? 그러다 니 차례가 되면 다 들었다는 듯이 말하고. ‘척’하지 마. 다 들은 척, 이해하는 척. 재수 없어.”


타인에게 비춰진 나는 어떤 사람일까. (출처: 언스플래쉬) 



미드에서 본 집단 상담은 잊어요 


발표 수업 첫 번째 날, 나는 강의를 철회하지 않은 것을 사무치게 후회했다. 이건 내가 상상해왔던 집단 상담이 아니다. 미드에서 본 집단 상담, 이를 테면 알콜중독자들의 모임 AAA 같은 곳에서는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 고백하면 집단원들이 따뜻하게 격려하고 힘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최선의 인간이 아니더라도 집단 안에서만큼은 수용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는 '따뜻한 곳‘이 바로 집단 상담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집단 상담에 참여하며 느낀 것은 ‘인민재판’ 그 자체였다. 교수가 매의 눈으로 나의 부정적인 패턴을 짚어주면, 학우들이 개떼같이 달려들어 그 부분을 물어뜯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앉아서 말을 얹었으나 내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내 차례가 다가올 것이다. 나도 저렇게 잘근잘근 조져지겠지, 아 도망가고 싶은데 수업을 드롭하기에는 늦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상상 속에서 나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말들이 자동 생성되었다가 나를 가루처럼 산산조각 내며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그건 사회불안의 전조 증상이었던 것 같다. 나는 대학 다니는 4년 내내, 팀플레이를 하면서 발표해본 적이 딱 두 번밖에 없다. 한 번은 대박 망했고, 한 번은 완전 잘했다. 결과는 다르지만 연단에 섰을 때, 둘 다 죽을 만큼 공포스러웠다는 것은 같다. 그런데 18명이 보는 앞에서 내 치부를 교수가 까발린다니, 상상만 해도 죽고 싶었다. 나는 눈에 띄는 것이 싫다. 내 실체를 알리고 싶지 않다. 그냥 나를 모르는 채로 있어줘, 제발. 친구와 선배, 모르는 타 학부 사람들. 그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오해할까. 나의 시꺼먼 속내를 들키면 어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내가 이토록 집단 상담을 두려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함께 수업을 들었던 친구들의 예후가 무시무시했다. 친구A는 수업에서 별로 까이지도 않고 무탈하게 잘 지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교수님이 그 친구를 따로 연구실로 호출했다. 몇 가지 심리검사를 시키더니 불안장애가 의심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충격이었다. 평상시에 누구보다도 씩씩한 얼굴을 하고 다니던 그 친구가 불안장애라니. 4년 내내 친구였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교수는 30분 발표를 듣고 그걸 알아챈 것이다. 


친구 B는 회피의 천재다. 사람을 가려 사귀고 낯선 상황에서 자신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새침한 표정으로 딴소리를 하는 게 주특기다. 그런 B를 교수는 1시간 내내 몰아쳤다. 네가 외면하는 진실을 마주하라고, 질문을 바꿔가며 코너로 몰아 펀치를 날렸으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B의 태연한 얼굴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 학우들이 보여준 반응은… 무자비란 이런 걸 말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감추려는 자에게 돌아가는 처절한 응징이었다.



나를 보여주기 싫어서 


내 차례가 다가왔다. “실습 어땠어요?” 수업 시작 전부터 불안에 떨던 나는, 교수가 던진 그 한마디 말에 밑도 끝도 없이 울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어붙은 채로 눈물도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입을 떼려고 하는 순간, 단어가 뭉그러지며 어린애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교수는 내가 진정될 때까지 10분을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물었다.


“어릴 때 기억나는 첫 장면이 뭐예요?”


아, 시작되었다. 눈물로도 피할 수 없다. 나는 여섯 살 때, 싱크대에 의자를 놓고 까치발을 들고서 엄마의 설거지를 대신해주었던 기억을 말했다. 유년 시절, 아버지, 가족관계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남은 시간에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교수는 어떤 판단도 내비치지 않았다. 나를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타인 앞에서 까발려지는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 오열하는 학생을, 교수는 봐주고 지나갔다. 학우들도 우호적인 멘트를 몇 가지 덧붙였다.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결과, 그러니까 친구 B가 당했던 수모라든지, 친구 A가 병명을 얻었다든지 하는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눈물로써 나는 나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나는 제 발로 집단 상담에 찾아가게 된다. 그때 못 다한 과제를 해치우겠다는 듯이. 집단 상담은 솔직하지 못한 자들이 가는 지옥이었다. 자비를 모르는 집단원들이 미친 듯이 감정을 드러내는 드라마의 향연이 매주 수요일, 나를 기다렸다. 그들 덕분에 나도 내 본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어질 얘기는 거기서 보낸 2년간의 기록이다. 


(집단원들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타인의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하고, 내 경험 위주로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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