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천재들>이 전하는 완벽한 핑계들
요즘 잠들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다. 이 책을 과연 편집해서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프리랜서로 지내면서 어제는 이런 핑계, 오늘은 저런 핑계로 일을 미루며 찔끔찔끔 편집을 진행해온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출판사에 있을 때는 두 달이면 책 한 권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그때도 미루기는 했다. 그래도 나의 태만으로 미루는 건 1, 2주가 한계였다. 상사가 있고, 사장님이 보고 있었다. 나를 쪼는 그 두 존재만 없으면 즐겁게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프리랜서가 되면 일을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만에, 일을 하고 싶은 적당한 순간은 절대로 오지 않았다. 프리랜서 2년차, 나는 숱한 밤을 지새우며 깨달았다. 오로지 마감일, 이 데드라인을 넘기면 내 밥줄과 신용이 끊어져서 앞으로는 이 업계에서 매장 당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야 비로소 움직이는 인간이라는 것을.
일하면서 중간중간 인터넷서점을 들락거리던 어느 날, 내 마음을 사로잡은 책 제목을 발견했다. 그 이름도 거창한『미루기의 천재들』이다. 부제도 마음에 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에서 당신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미루기의 역사’라니! 이 세기의 천재들도 미루기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하물며 나 같은 범인이야 오죽할까!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완벽한 변명을 해줄 것만 같았다. 드디어 도착한 책을 풀어보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은품으로 만든 스티커 문구가 너무나도 완벽했기 때문이다.
"급할 것은 없다"
"의무 따윈 던져버리자"
"천국은 좋은 곳 같아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받자마자 노트북에 붙이고, 투두리스트로 가득한 코르크판에도 붙여뒀다. 이 책이 아주 제 주인을 찾아왔구만 허허! 이미 뭔가 해낸 것 같은 성취감으로 이 책을 읽어내려 갔다. 저자 앤드루 산텔라는 미루기에 익숙한 인간들이 말려드는 패턴을 아주 잘 분석해낸다.
역사를 공부한 저널리스트가 끝까지 집요하게 파고든 책을 기대했는데, 그런 종류의 ‘덕력’은 없었다. 이 사람 자체가 미루기의 달인인지라 온갖 핑계를 대다가, 편집자의 독촉에 못 이겨 글을 내놓은 것 같다. 말하자면 자기 고백적인 요소가 강한, 가벼운 에세이에 더 가깝다. 애초의 무시무시한 기획, 그러니까 미루기의 천재들의 고향이나 유적지를 탐방하며 느낀 바를 진지하게 써내겠다는 의도와는 45도쯤 벗어난 것 같다. 그런데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저자의 상황이 너무나 이해가 간다. 도저히 비난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잠정 계획
“나는 괴팅겐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미루기의 천재들 중 한 명인) 리히텐베르크가 살던 집에도 가보고 지역 주민에게 쓸 만한 이야기를 들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독일어 까막눈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독일로 떠나기 전에 독일어 수업을 받겠다는 잠정 계획을 세웠다. 계획이 아니라 ‘잠정 계획’인 것은, 오로지 생각만 했기 때문이다.
독일어 선생님을 찾기 위해 실제로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제2외국어 학습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온라인 기사를 읽고 또 읽었을 뿐. 기사는 내용이 비슷한 다른 기사로 나를 이끌었고, 그중에는 미국의 언어 교육이 부끄러울 만큼 뒤쳐져 있다는 기사도 있었으며, 마침내 미국이 외국어에 갖고 있는 역사적 반감에 관한 에세이에 이르렀다. 기사를 다 읽자 미국인을 비난하고 싶어졌다. 물론 나도 독일어 수업을 미루려는 핑계로 기사를 읽고 있었지만. 일 미루는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이었다.”
안다! 나도 링크에 깃든 저 악마들을 안다! 페이스북에 접속했다가 페친들이 추천해준 온갖 기사 다보고, 그 와중에 광고로 빠졌다가 링크를 타고 들어가 뭔가를 결제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는 날들의 반복이다. 내 눈에 좋은 것들을 따라갔다가는 시간을 납치당하기 십상이다.
그럴 땐 잠시 자책했다가 다이어리를 열어, 오늘의 투두 리스트를 작성해본다. 이미 한 달, 한 주의 계획은 다 짜놨다. 구체적인 일들의 목록을 적어나간다. 어제 밀린 일들을 보고, 다시 이번 한주의 스케쥴을 조정해본다. 생각해보니 이번 달 안에 책 못낼 것 같다. 발간일을 다시 조정한다. 그렇게 고심해서 투두 리스트를 작성하다보면, 그 자체로 또 뿌듯하다. 음, 완벽한 계획이군. 이 증상에 대해서도 저자 앤드루 산텔라는 잘 기술하고 있다.
#투두 리스트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데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때마다 나는 투두 리스트를 만들었다. 내게, 그리고 장담하건대 모든 미루기 장인들에게 투두 리스트는 일을 미루면서 더 큰 만족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데 그 존재 가치가 있다.”
사실 나는 이 과정을 일하기 전의 적합한 상태로 만들려는, 일종의 ‘예열 상태’라고 생각한다. 글을 만지는 사람이 세상 물정을 몰라서 되겠나? 남의 글을 읽는 것은 공부다. 게다가 투두 리스트도 없이 일을 시작한다는 건, 네비게이션 없이 차를 몰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작업에 대한 일정표가 나와야 지금 진도가 얼마쯤 나갔고,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 계산을 할 게 아닌가? 지연되면 남은 시간에 맞춰서 다시 수정하면 된다.
투두 리스트를 지키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실망하는 것도 지쳐서 없이 지내본 적도 없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눈뜨자마자 할 일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으면 나는 침대에서 한 시간도 넘게 유튜브를 볼 수도 있는 인간이다. ‘잠정 계획’ 아래 딴짓을 하고, 적극적으로 ‘투두 리스트’를 만들었다면 그 다음으로 넘어갈 차례다.
나는 지금도 고민중이다. 새벽 3시, 그나마 오늘 마무리할 수 있는 투두 리스트- 이 책의 리뷰 쓰기를 마칠 것인가, 아니면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하러 갈 것인가. 물론 이건 급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일의 나를 믿을 수가 없다. 미루고 미루다 최후의 순간에 드디어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필 충만함을 놓치면 이 글도 결국 끄적거리다가 저장한 상태로 사장된 다른 글처럼 될 것이다. 과거의 나를 보면 미래의 나를 결코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이건 현재의 나한테 못할 짓이다. 나는, 지금, 매우, 졸렵다. 이것은 자아의 분열이자, 몸과 마음의 싸움이다.
#현재의 나 vs 미래의 나
“가장 근본적인 분열 중 하나는 바로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의 분열이다. 현재의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때려치우고 싶다. 미래의 나는 그렇게 해서 발생할 결과를 고려해야만 한다. 미루기는 우리 안의 국회에서 서로 개싸움을 벌이는 정당을 화해시키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만화가 라즈 채스트가 그린 <마음과 몸의 문제>라는 만화에는 한 남자가 힘없이 소파에 늘어져 있고 말풍선에는 마음의 말이 그려져 있다. “일어나.” 몸이 말한다. “싫어.” 우리의 내면은 몹시 복잡하기 때문에 때로는 결판이 날 때까지 안에서 싸움을 벌인다.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미루기뿐이다.”
국회에서 개싸움을 벌인다라, 바로 이미지가 확 떠오른다. 이보다 더 정확한 묘사가 있을수 있을까? (번역자 분께서 아주 번역을 맛깔나게 살려주셨다.) 여기서 미루는 사람들은 대체로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이기고, 나른한 몸이 의지를 삼켜버린다. 왜냐? 현재 내 몸에 주어지는 보상이야말로 확실하니까! 물론 이렇게 되면 ‘미래의 나’한테 원망을 들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불안이 적정 수준 이상으로 높아질 것 같으면, 그나마 덜 하기 싫은 일을 찾아하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그렇다. 사실 나는 오늘 초교 편집을 마무리하고, 텀블벅에 올릴 글을 써야 했다. 하지만 그 일들에 착수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이렇게 나의 성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리뷰를 열심히 쓰고 있다.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을 절박하게 회피하느라 두 번째 일에 시간을 쏟는 것이다.
#두 번째 일 해치우기
“데일은 한 가지 일을 미루면 종종 다른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던 그 두 번째 일이 결국은 꼭 해야 했던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런 의미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잘 보면, 미루는 행동은 적극적인 성취의 매개물일 수 있다.”
그렇다니까, 이 글도 미루기 덕분에 쓸 수 있었던 거라고. 브런치에, 그것도 1년 만에 글을 써서 올리면서 커다란 용기도 필요하다. 다가오는 마감에 대한 두려움이 브런치 조회수가 바닥을 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이긴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늘 편집 방향과 판매 방안을 고민한다. 세금이니 전자계산서, 이런 것도 다 걱정이다.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청할지도 시나리오는 다 짜놨다. 하지만 실행을 안 할 뿐이다. 때가 되면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다 뽑아낼 수 있을 거야, 호언장담 해보지만 실은 불안불안하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9개월 동안 의뢰받은 저택의 설계를 미루다가 고객이 답답해서 직접 찾아오겠다고 하니까 2시간 만에 설계도를 그려냈다고 한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참고로, 그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짓는 데도 16년이 걸렸다고 한다. 물론 같은 범인으로서 나를 위로하는 것은 저자의 케이스다.
“건축학자인 프랭클린 토커는 저서 『폴링워터의 부상』에서 라이트가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설계안을 종이에 옮기기는 했지만 아마 아이디어는 그전부터 쭉 흘러나오고 있었으리라고 주장했다. 머릿속에 이미 디자인이 완성되어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놀랍게도 바로 내가 소파에서 눈을 붙일 때 와이프에게 하는 말과 꼭 같다. 내가 지금 낮잠 자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글을 쓰고 있는 거야. 난 언제나 글을 쓰고 있다고.”
듣는 사람은 코웃을 치겠지만 정말 그렇다! 나는 글이 안 풀리면 누워서 눈을 감고 구성안을 그린다. (물론 잠도 잠깐 잔다.) 산책을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샤워를 하는 일도 다 이 과정에 포함된다.
어쨌든 나도 시작은 했다. 사실 지금 보는 초교는 진정한 초교가 아니다. 이미 글을 세 번은 다듬었지만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나서 이것저것 갖다붙이고 있다. 이게 다 욕심이 과한 탓이다. 그래도 이렇게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는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자꾸만 뭔가를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게 바로 일을 미루는 사람들이 자기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작업 과정에 머무르는 한 완벽을 꿈꿀 수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끝마치는 순간 그 프로젝트는 또 한 명의 불완전한 창작자가 만들어낸, 의도만 좋은 (실패한) 작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일을 미루는 사람은 과정을 늦추고 싶어 한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미루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진짜 목표는 도달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더 잘 실패하기 위해 완성을 유예하고 있는 것 같다.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투두 리스트의 단점은, 어제 못한 숙제들을 오늘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안 봐도 다 안다. 머릿속으로 할 일들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늘 못 다한 숙제를 끌어안고 사는 기분이다. 나는 매일 후회하며 나를 이렇게 2년째 괴롭히고 있다. 잠들 때마다 오늘을 후회한다. 하지만 그 많은 천재적인 작품들을 쏟아낸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죽을 때는 후회했다고 하지 않나. 우리는 내일 후회할 걸 알면서도, 오늘의 나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다.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미 후회 머신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분히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아간다면 백 퍼센트 만족스러운 상태로 죽을 수 있다고 믿는가? 나는 결코 스스로 원하는 만큼 완벽할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원하는 만큼 끝내주게 멋질 수도 없을 것이다. 나에겐 둘 다 필요하다. 해야 하는 일에서 도망가는 것도, 흠잡을 데 없는 착실함도, 후회도, 실천도.
나는 인간이다. 나의 결점은 나의 가장 훌륭한 점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인정하자, 이건 지병이다. 늦기, 미루기, 그래서 후회하기, 이 세트는 어떻게 떼어버릴 수 없는 나의 지문 같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석한 적은 없다. 느리지만 포기한 적은 없다는 뜻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지점까지, 토가 나오기 직전까지 해보고, 지쳐쓰러지기 전에 결과물을 내놓을 것이다. 나의 단점을 미워할 수만은 없기에, 이렇게 또 비슷한 사람 이야기 듣고 나름대로 자신을 합리화해보는 것이다. 앤드루 산텔라라는 저자가 왠지 거울처럼 친밀하게 느껴진다. 나처럼 미루기가 지병인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웃긴 신경안정제가 되어줄 것이다.
새벽 4시, 이제 그만 자야겠다.
내일은 초교를 마무리하고, 텀블벅에 글 쓸 준비를 하고… 에휴, 또 미루겠지, 뭐ㅎㅎ
이렇게 또 한 권의 책을 마감했다.
역시 난 지각은 해도 결석은 안 한다니까~(이런 자기합리화!)
어느 여성 생계부양자 이야기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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