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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Oct 12. 2022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나의 역사를 쓴다는 것(feat. 다시 만난 세계) 


상담을 시작할 무렵, 나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나를 둘러싼 객관적인 상황은 분명 나아진 듯 보였다. 폭력과 가난의 시기는 지나갔다. 아버지의 손아귀에 있었던 10대, 등록금 걱정과 취직난에 허덕이던 20대, 불안정한 프리랜서로 지내던 30대 초반도 지나갔다. 나는 절대 빈곤을 벗어났고, 구술사 작가이자 편집자로서 커리어를 쌓고 있었으며, 의지할 수 있는 배우자와 함께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늘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불안했다. 책을 몇 년이나 만들었건만 마감만 다가오면 불안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때까지의 성과는 모두 죽을 만큼 노력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내가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쥐어짜내지 않으면 그간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다. 남들이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줘도 소용없었다. 그들이 보는 것과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달랐다. 바깥에는 햇빛이 쨍쨍한데 나 혼자 태풍이 올 거라며 우산을 꼭 쥐고 놓지 못하는 꼴이었다. 


이런 걸 두고 트라우마라고 하는 걸까. 비바람 몰아치는 허허벌판에서 오랜 시간 맨몸으로 지냈던 나는, 저 멀리 구름 한 조각만 보여도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행복해서 불안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제나 최악의 수를 고려하며 스스로 불안에 빠져들었기에, 여기서 벗어날 길은 요원해보였다. 


집단 상담, 개인 상담 도합 4년. 지난날을 치열하게 들여다보았다. 고통을 끌어안고 홀로 고군분투하던 나날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웠다. 세상은 예상할 수 없는 위험 요소로 가득하며 한발만 잘못 디디면 천릿길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나를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믿었기에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불안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동시에 몸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안을 쉽사리 떠날 수도 없었다. 이 불안을 버리면 무능력한 사람이 될까 두려웠다. 불안이 나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불안을 놔주지 않았던 것이다. 


상담을 받으며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빠한테 맞기도 했지만 틈을 노려 반격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순해 보여도 속으로는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워커홀릭이 되어 일에 모든 에너지를 갖다 바치던 때도 있었다. 관계와 돌봄은 내팽겨 치고 오로지 일만 좇던 시절에도, 내 곁을 지켜주던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를 걱정해주던 눈길을, 그때는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위기의 순간에는 낯모르는 사람조차 나를 구해주었는데.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건사님이 그랬고, 장학금을 내어준 총장님이 그랬다. 돌이켜보면 완전히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글 속에서 나는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경계와 제도를 넘나드는 악동으로, 분노하고 달려들 줄 아는 싸움꾼으로 변신한다. 내 안의 다양한 얼굴을 발견하며,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고 있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악몽은 꾸지 않는다. 꿈에서 나를 위협했던 악당들은 다시 쓴 이야기 속에서 힘을 잃었다. 



고통은 나의 것이지만     


나의 고통을 다시 들여다본다. 왜 나는 이런 고통을 겪어야 했나. 이 질문을 곱씹을수록 반대편에서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이런 고통을 겪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고통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힘 없는 내가 우연히 거기 있었을 뿐이다. 가난했기 때문에 돈 앞에서 무력했고,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여자였기 때문에 성차별 앞에 번번이 좌절했다. 그렇다고 운명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자책하거나 부모를 원망하고 싶지도 않다. 


세상은 랜덤 게임 같은 것이다. 고통의 주체가 나여야 하는 데 이유가 없다면,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제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 당신도 이런 사람을 알고 있지 않나요? 이 모든 고통이 개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사회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사회에서 문제를 찾는다. 빈곤은 개인의 탓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도 잘살 수 없는 구조가 문제다. 성차별 역시 운이 없어 겪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차별적 구조에 기반한 가부장적인 사회 때문이다. 


나의 고통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내가 겪은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나서, 그 누구에게도 나눠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말한다. 우리를 이토록 불안하게 하는 삶의 조건을,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불완전한 존재다. 혼자서는 오롯이 설 수 없어서 자꾸만 타인을 호출하고 기대려든다. 다른 사람도 내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끝없이 흔들리는, 이 취약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면. 내가 나의 역사를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완전한 존재들과 함께 떨리고 싶다. 불안으로 함께 연결되고 싶다. 그리하여 세상이 무시할 수 없는 울림을 만들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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