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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Sep 30. 2022

벼랑 끝에 나를 세웠더니 죽고 싶어졌다(1)

등록금을 구할 수 없었던 그해 여름의 이야기 

“벼랑 끝에 나를 세워라.” 화진화장품의 박형미 부회장이 쓴 자기계발서의 제목이다. 90년대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우리 집에도 굴러다녔다. 고진감래,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는 엄마가 산 책이었다. 분유값을 벌기 위해 화진화장품에 입사했다는 그녀는, 매일 죽을 각오로 방문 판매를 다녔다고 한다. “오늘 나는 50만 원 어치 화장품을 못 팔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일한 것은, 그녀가 당겨 쓴 빚 때문이었다. 살던 집의 전세금을 갚고 나면, 더 큰 집으로 옮겨서 빚을 내고, 그만큼 실적을 내서 빚을 갚았다. 그렇게 더 큰 집으로 옮겨가며 매순간 벼랑 끝에 자기를 밀어넣었더니 10년 만에 화진화장품의 2인자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의 무시무시한 목차를 보시라. 


내가 버는 수입은 내 생명의 감가상각비

지금은 성공보다 생존이 먼저다

없는 사람들은 똥배짱도 없다 

세 끼 밥을 축내는 여자와 월 1억원을 받는 여자 

굴종을 반복하면 희망이란 없다 

화진은 회사가 아니라 인간개조 공장 

빨간 그랜저의 주인공이 되라 

벼랑 끝 사회, 벼랑 끝에 선 사람들 

당신의 목숨을 담보로 잡혀라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은 내 목숨을 담보한 대가 

정신과 행동, 시간의 무리 없이는 성공도 없다

내 자신을 시험대에 올리다 

당신의 인생에 무리수를 던져라 


출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89860



기적의 신화를 쓴 이 여자를 보며 다짐했다. 그래, 이 시궁창에서 벗어나려면 나를 벼랑으로 몰아세워야겠다. 폭력과 가난으로 점철된 아버지의 집에서 탈출해 서울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대학 입학. 죽을 각오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서,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탈출해야겠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목표일지라도, 매순간 죽을 각오로 임한다면 달성하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그러나 일찍이 핵주먹 타이슨은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한 대 쳐맞기 전까지는.”   


2005년,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나는 빚더미에 올라탔다. 나는 매 학기 시험마다 죽을 각오로 공부했다. “이번 시험에 문제 하나를 틀리면, 그래서 이번 학기에 장학금을 타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전체 장학금은 1등한테만 주어지기에, 나는 반액 장학금에 만족해야 했다. 부족한 등록금은 알바비로 메꿔야 한다. 방학이 시작되면 이 전제는 이렇게 변형되곤 했다. “이번 방학 때 알바를 구하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대학 다니는 내내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넣은 결과, 머릿속에 지울 수 없는 명제가 새겨졌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나는 이 자리에서 사라질 거라는 것, 그것은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했다.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나는 지금도 마감에 쫓기는 날이면 이런 생각에 자동적으로 빠진다. '이 작업을 제때 마치지 못하면, 나는 이 바닥에서 매장될 거야. 그러니까 반드시 최선을 다해서 완성해야 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안장애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심어진 씨앗이 발아한 결과물이다.


그해 여름에는 어쩐지 내 계획대로 굴러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3학년 1학기 성적표에는 평점 4.0을 겨우 넘은 점수가 찍혀 있었다. A와 A+로 점철된 성적표에 있는 딱 하나, C+ 과목 하나가 내 발목을 잡았다. 이대로라면 반액 성적 장학금을 타지 못할 확률이 높다. 이럴 때는 재빨리 알바 자리를 찾아나서야 한다. 벼룩시장, 알바몬, 길거리 전단지까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봤으나 방학을 하고 열흘이 지나도 연락 오는 곳이 없다. 비상이다.


시간은 곧 돈이다. 방학 동안 최저임금을 받으며 꽉꽉 채워 일해야 겨우 절반의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다. 보통 방학 기간에는 하루에 기본 14시간씩 일했다. 낮에는 당구장 카운터를 6시간씩 봤고, 밤에는 호프집에서 8시간씩 서빙을 했다. 아침 10시에 나가서 새벽 2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와서는 쓰러지듯 잠들었다. 월화수목금금금, 주 7일제로 일하는 내게서는 늘 담배 절은 내가 났다. 손님들이 태운 담배 연기를 해치고 다닐 때는, 몸은 피곤할지언정 마음은 편했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나를 위해 온몸이 부서져라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나를 벼랑 끝에 세워서 마지막 한 톨의 에너지까지 쥐어짜냈으니 괜찮았다. 그런데 2008년 여름에는 방학하고 2주일이 지나도록 알바를 구하지 못하니,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학자금 대출 이자를 몇 차례 연체한 터라, 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다. 휴학도 할 수 없었다. 직전에 1년간 휴학계를 낸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도 돈을 벌었다. 그 돈은 엄마가 진 빚을 갚는 데 썼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의 급여로는 3인 가구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오빠와 내가 돌아가며 1년씩 휴학하고 알바를 했지만 등록금을 낼 수 없었던 배경이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하고 싶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학교를 졸업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시험 문제 하나를 틀릴까 봐 벌벌 떨며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고, 방학이면 알바를 구하지 못해 악몽에 시달리는 삶이 지긋지긋했다. 벼랑 끝에 오래 매달려 있으면 지친다.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을 동력 삼아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티느니, 스스로 손을 놓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싶어진다. ‘OO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는 어느덧 ‘차라리 죽고 싶다’는 절망으로 변해 있었다.  



밑져야 본전, 희망 없는 발길이 향한 곳은 


알바를 구하지 못한 지 3주째, 하루하루 피폐해져갔다. 당시 CC였던 남자친구는 총장님을 한번 찾아가보라고 권했다. 총장이라…내가 다니던 학교의 총장은 나무 심기를 좋아하던 신부였다.(종교 재단이 운영하는 대학이었다.) 인자한 인상의 그는, 지나가다 학생들이 인사를 하면 친구들하고 아이스크림 사먹으라며 지갑에서 몇 천 원씩 꺼내주곤 했다. 언젠가 나도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으며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선, 등록금을 계속 올린단 말이지. 나무 심을 돈 있으면 학생들한테나 투자하든가. 저건 프로파간다의 일종일 뿐이야.’


내 눈에는 총장이고, 사장이고, 대통령이고, 똑같이 보였다. 권력은 있지만 책임지지 않는 남자들, 자기 잇속만 차리는 권력자. 나의 부친 같은 사람들. 그때까지 어른다운 어른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나는, 애인의 말에 코웃음 쳤다. 독실한 신자도 아니고, 학생회도 아니며, 일면식도 없는 나를 총장이 도와줄 리 없다고 여겼다. 


한편으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기도 있었다. 등록금 때문에 이토록 힘들어하는 학생이 있다는 걸 총장도 알아야 하지 않나, 자퇴하기 전에 하소연이나 실컷 해보자 싶었다. 높으신 분이라 안 만나주면 할 수 없고, 어차피 희망이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 나는 총장 비서실에 연락해서 다른 용건은 없고, 그냥 총장을 만나서 상담하고 싶다고 했다.


의외로 약속이 순순히 잡혔다. 그때까지 알바를 구하지 못한 나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총장실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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