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에 대한 단편
손홍규의 단편 「배우가 된 노인」은 소설집 『그 남자의 가출』에 실린 작품으로, 2013년 제21회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그 남자의 가출』에는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며, 모두 일상의 균열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고단함과 관계의 미묘함을 포착하고 있다. 손홍규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2001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이후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톰은 톰과 잤다』 등의 소설집과 장편 『서울』, 『이슬람 정육점』 등을 발표했다. 그는 늘 인간 존재가 처한 현실, 삶과 죽음, 관계와 책임의 문제를 잔잔하지만 깊이 있게 탐구해 왔다.
「배우가 된 노인」 역시 그 연장선에서 읽힌다. 화자가 머무는 일상적 공간(공원, 독서실, 골목길)을 배경으로, 한 노인을 중심으로 얽히는 관계의 망과 청년 화자의 내면을 세밀하게 그린다. 소설의 사건은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독자가 스스로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며 해석하도록 여백을 남겨둔다.
작품 스타일
손홍규의 작품 세계는 크게 평범한 일상에서 드러나는 비범함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는 공원, 골목, 집안, 술자리 같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 속에서 인간 내면의 미세한 떨림과 관계의 긴장을 포착한다. 그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고, 과잉된 감정 묘사 대신 담담하게 상황을 보여준다. 덕분에 독자는 마치 직접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몰입감을 얻게 된다.
또한 그는 관계의 다층성을 즐겨 다룬다. 가족, 연인, 이웃, 심지어는 이름조차 모르는 노인까지. 이런 관계들은 하나의 평면적 관계로 끝나지 않고, 세대·경제·역할의 차이를 통해 인물들의 내면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의 작품에는 늘 연민과 아이러니가 함께 깔려 있다. 인물들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나약하며, 또 때로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인물도 완전히 비극적이거나 영웅적이지 않다. 모두 현실 속에서 흔들리고, 실수하고, 잠시 멈춰 서는 사람들이다. 이 점이 독자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수록작 中 [배우가 된 노인] 감상
노인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
「배우가 된 노인」은 1인칭 화자의 시선을 통해 진행된다. 공원에서 노인을 발견한 순간부터 화자는 그에게 묘한 경외심을 느낀다. “단번에 노인이 되고 싶었다. 나를 어쩌지 못한 이 험난한 세상을 부드럽게 조롱하다 죽고 싶었다.”라는 화자의 독백은 청년의 내면에 쌓인 피로와 허무, 그리고 노인의 삶을 통과한 연륜에 대한 갈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노인은 단순히 한 인물이 아니라, 화자에게는 삶의 어떤 이상적 상태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이 후반으로 갈수록 그 노인은 점점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드러나며, 화자는 경외에서 연민으로 이동한다. 이 변화는 단순히 노인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화자가 자기 삶의 무게와 노인의 무게를 서로 겹쳐 보았기 때문이다. 노인이 연기한 것은 포르노 동영상 속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의 모든 늙은 아버지”였다는 깨달음이 화자에게 다가온다. 화자는 노인을 통해 자신이 곧 맞이할 미래와, 예비 장인의 세대, 그리고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바라보게 된다.
관계의 층위를 드러내는 장치들
소설은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화자를 흔든다. 윤희와 아버지의 관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녀의 정과 거리감을, 윤희와 화자의 관계에서는 현실적 삶의 무게를, 화자와 사이드미러의 관계에서는 기혼자와 미혼자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그리고 화자와 노인의 관계는 그 모든 관계의 압축판처럼 작동한다.
이런 관계망 덕분에 독자는 ‘나’라는 존재가 단일한 개인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의 총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손홍규는 그 사실을 직설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하나의 관계를 스케치하면서 독자가 스스로 체감하도록 한다.
문체와 리듬 – 잔잔하지만 힘 있는 흐름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문체다. 묘사와 설명이 균형을 이루고, 과잉된 장면 전환 없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덕분에 독자는 속도감 있게 읽으면서도 감정의 미세한 파동을 느낀다.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이 서두르지 않고 등장하고, 소설은 흡사 카메라가 천천히 인물을 따라가듯 장면을 포착한다.
이렇듯 과도한 드라마나 클라이맥스를 배제한 서술 방식은 오히려 큰 울림을 남긴다. 임팩트 있는 사건이 없기 때문에 독자는 인물들의 감정을 천천히 씹으며 읽을 수 있고, 읽은 후에도 한동안 마음속에서 그 감정이 잔잔히 울린다.
불협화음의 순간 – 술병 사건
그렇다고 모든 장면이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것은 아니다. 동영상 제작 스태프 중 한 명이 술자리에서 술병으로 손목을 긋는 장면은 이야기 전체의 흐름에 비해 다소 돌출된 사건처럼 느껴진다. 작품이 그려내는 잔잔한 삶의 울림에 비해 지나치게 극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맥락에서 이탈한 듯한 감각을 준다. 이 장면이 삭제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었더라도 작품의 주제나 흐름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형태는 이야기의 잔잔한 호흡을 잠시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독자로서의 울림
작품을 읽으며 나 역시 화자처럼 노인을 계속 의식하게 되었다. 경외심으로 시작해 연민으로 옮겨 가는 시선의 이동은 나의 시선이기도 했다. 나는 그 노인을 통해 언젠가 닥쳐올 나의 모습, 나의 아버지, 나의 관계들을 떠올렸다. 이 소설은 특정 사건보다는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손홍규의 담백한 문체와 관계 중심의 서사는 내 일상을 돌아보게 했다. 나 역시 관계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고, 때때로 노인처럼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기다려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방의 충격 대신 오래 남는 여운
「배우가 된 노인」은 ‘한 방에 다가오는’ 임팩트는 없지만, 그 덕분에 독자는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를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 화려한 사건보다 작은 울림, 화자의 고요한 사유, 노인의 나약함이 만들어 내는 연민이 작품의 힘이다. 읽고 나면 마음속에 조용한 물결이 남아,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문득 그 노인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이것이 손홍규 문학의 매력이며, 「배우가 된 노인」이 가진 힘이다. 사건의 강렬함이 아니라 여백과 울림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힘. 나에게 이 소설은 ‘관계와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조용한 거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