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에 대한 단편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한 회상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다시 부르는 일이며, 시간을 거슬러 잃어버린 무언가를 붙잡는 일이다. 전성태의 단편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바로 그 기억의 끝자락에서 시작된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의 단절 앞에서, 화자는 자신이 들었던 옛이야기들을 다시 어머니에게 들려주기로 한다. 이야기로 기억을 봉합하고, 언어로 관계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이 작품은 제34회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했다. 『두 번의 자화상』은 인간의 기억과 시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세밀하게 탐구하는 단편들이 모인 책이다. 「소풍」으로 시작해 「지워진 풍경」, 「망향의 집」 등을 거쳐,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에서 마침표를 찍는 구조는 우연이 아니다. 작가는 이 단편을 통해 소설집 전체가 지향해온 주제인 시간, 망각, 이야기, 관계의 회복을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작품 스타일
전성태는 한국문단에서 흔치 않은 자기만의 문장을 가진 작가다. 그의 문장은 리얼리즘의 단단함 위에 능청스럽게 얹혀 있다. 생활어의 자연스러움, 장면 전환의 절제된 리듬, 결코 과장되지 않는 문장이 특징이다. 마치 오랜 시간의 사용으로 손에 꼭 맞게 닳아진 나무숟가락 같다. 서사에 힘이 있으면서도, 독자를 압도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스며들어 감정의 표면을 흔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의 문체에는 두 가지 층위가 공존한다. 하나는 “기억의 증언자”로서의 시선이다. 그는 잊히는 것들을 언어로 붙잡고, 작고 사소한 것들의 생명을 연장한다. 또 하나는 “서사의 장인”으로서의 태도다. 감정에 기대지 않고, 문장과 서사만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 이 절제된 문장은 오히려 더 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에서도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요란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와 침묵 사이에 긴장을 남겨두고, 그 안에서 독자가 스스로 감정을 만들어내게 한다.
수록작 中 [이야기를 돌려드리다] 감상
어머니와의 시간 — 기억을 되돌려주는 의식
이 작품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화자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점점 말을 잃고, 기억을 잃어간다. 얼굴도, 이름도, 함께했던 순간도 서서히 지워진다. 화자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들을 어머니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 ‘되돌려주기’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의식(儀式)에 가깝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던 시간, 그 시간의 질감과 공기, 냄새와 목소리를 아들은 다시 재현한다. 이야기를 돌려주는 행위는 곧 사라져가는 존재를 불러내는 주문이 된다. 그러나 이 주문이 어머니의 기억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기적의 서사가 아니라, 절실함과 무력함이 교차하는 인간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소설 같지 않은 소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전통적인 소설의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분명 존재하지만, 사건의 기승전결이 아니라 정서의 흐름이 작품을 끌고 간다. 인물 간의 갈등도, 극적인 전개도 없다. 그 대신 반복되는 일상, 평범한 회상, 사소한 대화들이 조용히 이어진다.
이런 특성은 작품 전체에 에세이 같은 투명함을 부여한다. 독자는 이야기의 외피를 따라가며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 밴 정서를 공명한다. 문장이 곧 감정이 되고, 감정이 곧 이야기의 골격이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는 소설이라기보다는 머무는 소설이다. 문장 사이사이에서 독자는 자신의 경험, 기억, 어머니, 혹은 누군가를 떠올린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는 사람들
“기억한다는 것은 곧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 간명한 진리를 문장으로 증명해낸다. 화자는 어머니가 잃어버린 기억을 대신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준다. 이 되돌려주기 행위는 기억의 윤리이자 존재의 윤리다. 인간은 언젠가 망각의 강을 건너지만, 이야기는 남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다시 건네며 시간을 붙잡는다.
이 지점에서 전성태의 문장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의 기록을 넘어 인간 전체의 보편적 감정으로 확장된다. 치매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곧 기억이 사라져가는 모든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가 언제나 “누군가의 기억 속에 머물기를 바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절제와 여백의 미학
전성태의 소설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장면 전환은 날카롭게 잘려 있고, 묘사는 최소한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절제 속에 독자의 상상력이 들어설 여백이 생긴다. 그는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문장 사이의 공백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만든다.
예컨대, 어머니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려는 화자의 몸짓은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의 무게가 독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문장 밖에서 감정이 부풀어 오른다. 이것이 바로 전성태 소설이 가진 힘이다. 화려한 서사 없이도,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에 도달한다.
문학이 삶에 닿는 지점
이 작품이 유독 진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깊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성태의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작가는 이를 문학적으로 가공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시간과 감정을 언어로 옮긴다. 그래서 문장은 소설적이면서도 일기 같고, 이야기이면서도 고백 같다. 이 문학과 삶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에서 독자는 진정성을 감각한다.
누군가를 잊지 않기 위한 언어
이야기를 돌려주는 행위는 결국 봉헌(奉獻)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꺼내어, 잊혀가는 사람에게 바치는 언어의 제사다. 이 소설의 제목은 그 자체로 작품의 핵심을 말한다. ‘돌려드리다’는 한 방향의 전달이 아니라, 주고받는 기억의 순환이다. 어머니는 과거에 아들에게 이야기를 주었고, 아들은 이제 그 이야기를 다시 돌려준다. 그렇게 이야기는 한 생애의 시작과 끝을 연결한다.
누구의 이야기로 남는가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의 어머니, 혹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 오래전 잊혀진 목소리, 그리고 언젠가 돌려주지 못한 기억들. 전성태의 소설은 한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모두의 기억에 닿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그러나 기억은 계속 흐른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돌려준다. 이야기의 순환 속에서 인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