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에 대한 단편
함정임의 「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은 소설집 『저녁식사가 끝난 뒤』(창비)을 이루는 여덟 편 가운데 한 작품이다. 이 책은 2007–2013년에 발표한 단편들을 묶은 여덟 번째 소설집으로, 표제작 「저녁식사가 끝난 뒤」와 함께 「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이 이상문학상 작품집 수록작으로도 알려져 있다. 책 소개는 전편을 관통하는 정조를 상실의 흔적이 또렷한 이야기들로 요약한다. 독자는 각 편에서 떠돌이의 마음, 부고(訃告)의 소식, 여행의 잔향, 그리고 사라진 것들에의 애도를 차례로 통과한다.
이 단편에서 기억을 끌어올리는 매개는 제목 그대로 ‘고고학’적이다. 주인공은 아코디언, 멕시코 삼촌, 춘아 고모 같은 ‘유물’을 더듬어 기억의 지층을 발굴한다. 소설집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이는 상실을 견디기 위해 사물과 장소, 목소리의 잔향을 더듬어 나가는 애도의 공법(工法)이다. 표제작과 이 단편이 함께 실린 편제 자체가,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연달아 던지는 편집적 장치로 읽힌다.
작품 스타일
함정임의 문장을 먼저 떠올리면 말하듯 흐르되 질서가 있는 리듬이 떠오른다. 만연체도, 칼날 같은 간결체도 아닌 구어의 호흡으로 정리된 산문이 그의 기본 톤이다. 특히 현실의 균열과 여성의 목소리, 상실과 애도의 감각,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언어를 선택한다. 말하자면 그는 리얼리즘의 바닥을 딛되, 생활어의 리듬으로 독자를 끌고 가는 작가다.
작가 연보를 보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여성의 생과 사랑, 기억을 다양한 형식으로 실험해 왔다. 장편에서는 메타픽션과 여행서사가, 단편에서는 사물과 장소가 불러내는 기억의 촉이 두드러진다. 그 결과 사소한 장면이 큰 정조를 떠받치는 구조가 자주 나타난다. 설명의 비중이 높지만 흡입력을 잃지 않는 문장 운용이 독자에게 남는 ‘함정임다움’의 핵심이다.
수록작 中 [기억의 고고학] 감상
문체의 리듬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속도’
이 작품의 첫인상은 문체다. 함정임의 문장은 늘 말하듯 부드럽게 흐르지만, 그 안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간결하지도, 지나치게 만연하지도 않은 적정한 호흡이 독자를 서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설명이 많은 듯하지만 결코 늘어지지 않는 이유는 리듬 때문이다. 그녀의 문장은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번져 나가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그래서 독자는 문장을 읽는다기보다 따라간다. 마치 과거의 흔적을 천천히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손놀림처럼, 문장은 시간을 서두르지 않는다.
이 느린 속도는 작품의 핵심 정서와도 맞물린다. 기억은 언제나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홍수가 아니라, 천천히 번져오는 파문이다. 작가는 문체의 리듬을 통해 바로 그 기억의 속도를 구현한다. 독자는 문장 위에서 마치 자기 자신의 서랍을 여는 듯한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기억을 불러내는 ‘유물’의 힘
작품의 제목이 ‘기억의 고고학’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인공의 기억은 특정 사물과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온다. 아코디언, 멕시코 삼촌, 춘아 고모. 이 세 요소는 하나의 플롯을 구성하는 등장인물이자 동시에 기억을 끌어올리는 장치다. 특히 아코디언이라는 악기는 ‘소리’라는 감각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촉발점이 된다.
기억은 논리적 설명이나 명확한 사건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사물과 감각을 통해 불쑥 솟아오른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점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아코디언의 울림, ‘멕시코’라는 단어의 어감, 춘아 고모라는 이름의 호명은 과거를 해부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감정의 문을 열어젖힌다. 마치 먼지에 덮인 도자기 파편 하나를 발견했을 때, 고고학자가 전체 유적을 상상하듯 말이다.
과거에 다가가지 못하는 화자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 화자의 망설임이다. 그는 기억을 떠올리지만, 끝내 과거의 인물들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그 주저함은 단순한 감상적 회피가 아니다. 작품 속에서 춘아 고모와 멕시코 삼촌은 화자의 결핍이 가장 깊었던 시기에 만난 사람들이다. 부모에게 버려졌던 유년의 공백 속에서 그들은 사실상 두 번째 부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는 건 단순한 재회가 아니라, 상실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행위다. 그곳에는 따뜻한 기억만 있는 게 아니다. 버려짐, 불안, 외로움이 겹겹이 퇴적되어 있다. 화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기억의 문턱에서 멈춰 서서, 회상이라는 안전지대 안에 머문다. 이 망설임이야말로 인간이 과거를 대하는 본능적인 방식이다. 그가 하지 않은 말, 가지 않은 길, 닿지 않은 손이 오히려 작품의 감정을 깊게 만든다.
조용히 스며드는 서사의 방식
이 작품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큰 사건이 없다. 인물의 드라마틱한 변곡점이나 서사적 충돌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느린 파장만이 남는다. 그러나 이 ‘없음’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이다. 기억은 언제나 거대한 서사보다, 잔잔한 잔향으로 남는다.
독자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 과거를 바라보며,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의 기억을 겹쳐 놓는다. 아코디언이 멕시코 삼촌을 부르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오래된 물건 하나가 어린 시절의 공기를 불러내곤 하지 않은가. 함정임은 거창한 장치 없이도 독자 각자의 서랍을 열어젖힌다. 이 조용한 서사의 힘이야말로 이 작품이 오래 남는 이유다.
사물에 깃든 영혼, 기억의 윤리
이 작품이 남기는 가장 깊은 인상은 기억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시선이다. 사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시간을 저장하는 그릇이다. 작가는 이를 ‘고고학’이라는 은유로 표현한다. 고고학자는 과거를 다시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묻혀 있던 것을 조심스레 드러내는 사람이다. 화자 역시 과거를 고치거나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꺼내어 본다. 그리고 그 순간, 사물은 다시 살아난다.
이러한 태도는 기억에 대한 윤리적 시선으로 이어진다. 과거는 함부로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레 꺼내어 마주보는 것이다. 기억을 해결하지 않고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조용하고 성숙한 방식이다.
우리 모두의 서랍 속 ‘유물’
작품을 덮고 나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만의 기억의 유물을 떠올리게 된다. 책상 서랍 속 낡은 사진 한 장, 서랍장 안의 오래된 옷, 잊혀졌던 목소리. 이 작품은 화자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기억을 불러내는 서사다. 멕시코 삼촌과 춘아 고모가 실재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각자 자신의 ‘아코디언’을 가지고 있다.
“기억은 발굴되지 않으면 사라지고, 다시 만져질 때 생명을 얻는다.”
작품은 이 단순한 진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화자가 과거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모습은 결국 우리 자신의 초상이다. 누구나 어떤 기억 앞에서는 멈춰 서고, 만지지 못한 채 바라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