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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가 심하던 그곳에서 그 사람을 보고야 말았다. 그의 까만 얼굴과 햇빛의 음영 때문에 선명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분명 우리를 모욕한 더러운 자식의 시체였다. 쓰나미의 희생자. 하지만 마땅히 희생되어야 할 족속이었다. 난 외지의 첫 친구인 헤탈을 동정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제는 이 자식에게 욕을 퍼부어도 된다고, 너의 마음대로 처리해도 된다고 소리쳤다. 절규했다. 하지만 그 냉정은 헤탈만이 즐길 수 있는 전유물 같았다.
나의 절규를 보던 조 선생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덥석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이 시체를 보라고, 우리와 달리트를 무시한 이 더러운 사람을 보라고! 결국 완력으로 조 선생을 데리고 헤탈에게 다가갔다.
“왜 이래. 정 기자.”
“조 선생, 이 사람을 보라고. 난 이 자식이 이렇게 쓰레기가 될 줄 알았어!”
“그래, 그래도 이제 그만해. 헤탈도 참고 있잖아.”
“도대체 왜 참는 건데, 헤탈! 헤탈! 어서 욕해! 욕해! 더러운 시체를 밟아 버리라고!”
순간 위장에 가득한 것들이 역류하려 했다. 골목을 돌아 궁벽한 구석으로 다가갔다. 아침에 먹은 음식을 모두 게우기 시작했다. 도중에 멈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억지로라도 모든 걸 내뱉고 싶었다. 그래야 이 찝찝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지울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토해 낸 후 조 선생은 내 등에서 조심스레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그 눈빛에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번이 기회였어, 조 선생. 달리트가 복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고.”
해변 가까이에 인접한 이곳에도 악취가 느껴졌다. 허나 악취에는 면역이 된 나였다. 해변에 깔린 시체의 마지막 음성인 악취는 내게 그리 역겨운 것이 아니었다. 허나 지금 와서 이리 역겨운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헤탈이 그 시체를 보고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내 몸의 표리는 너무나 답답하고, 역겹다는 것. 내가 달리트라면, 헤탈이라면 어떻게 그런 기회를 놓칠 수 있을까.
쓰나미가 쓸고 간 인도의 해변은 꽃도 없었고, 투명한 바닷물도 없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쓰레기와 하나가 된 죽어 버린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냥 가요, 정 기자, 고깝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가요, 부탁이에요, 조 선생은 여린 목소리로 나를 이끌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사이 나와 조 선생은 단번도 수작을 건네지 않았다. 나는 흥분했고, 조 선생은 그런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헤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직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헤탈은 오히려 그 시체에게 동정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해할 수 없는 헤탈의 감정으로 인해 우린 좋은 추억의 끝맺음을 하지 못했다.
인도. 그리고 그곳에서의 험한 취재의 추억. 너무나 더운 나라였다. 인도에서 사느란 가슴을 느낀 건 그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난 왜 그리도 헤탈의 냉정이 안타까웠던 것일까. 어쩌면 너무나 예의 있는 행동이, 죽은 이에 대한 냉정이 왜 그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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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박 작가는 나에게 자신의 안경을 건넸다. 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가방 주머니에서 안경닦이를 꺼내야 한다. 그리고 안경알을 정성스럽게 닦아야 한다. 추레한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습관이 된 일이었다. 난 다시 금테 안경을 돌려주었다. 박 작가는 안경을 품위 있게 콧등에 걸쳤다.
“인도 여행은 언제 갈 생각인가? 거기에서 소재도 많이 얻어와야지.”
“인도에는 소재 찾을 명목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도 문학 취재를 위해 가는 겁니다.”
“음, 취재를 한다……. 취재를 하든, 여행을 하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이 작문을 위한 소 잿거리로 삼아야지. 그러니까 너는 항상 그 수준인거야.”
충분히 자존심을 긁는 도발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여인네에 대한 예의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에겐 소설을 첨삭 받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박 작가는 조용히 내 단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아, 이 책이 이번에 문학상을 받은……, 박 작가 님의……. 박 작가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하지만 그 근엄한 무표정으로 내게 한껏 자랑을 하고 있었다. 안표지에 박힌 박 작가의 사진도 다르지 않았다. 평소 입지 않은 정장을 어디서 구했는지, 바위와 나무들이 어우러진 이 숲은 또 어디인지. 박 작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하고, 인위적인 모습들이었다.
에잇 이건 안 돼, 갑자기 그가 일어났다. 이게 소설이냐며, 이제 자신에게 배울 시간도 별로 없다며, 내 소설을 면박하고 나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난 자연스럽게 끄덕거렸다. 그리곤 내가 아직 멀었구나, 이젠 정말 박 작가에게 배울 시간도 없는데, 하며 자신을 문책했다. 그의 책을 가방에 넣으며 집을 나왔다. 그는 떠나는 내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내가 처음 박 작가를 만난 건 윤지완 소설가를 찾아갔을 때였다. 난 그때 잡지사의 수습기자였다. 오래 전부터 꿈꿔 왔던 소설가의 꿈을 이루고자 평소 존경하던 윤지완 소설가를 찾아간 것이다. 윤지완 소설가의 집은 어쩌면 산골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권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집은 마치 여러 꽃잎에 감싸진 꽃 한 송이 같았다. 집 주위로 우거진 키 큰 소나무와 동백나무는 꽃 같이 아름답게 인테리어 된 집을 꾸며 주고 있었다. 그리고 숲을 지나 집 마당에 다다르면 새하얀 집과 조화된 솔가리들이 있었다. 집 주위엔 살살한 자주색 코스모스가 만개해 미를 뽐냈다.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그 소설가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배경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구시죠?”
“저 윤 소설가 님 계시나요?”
“음, 인도 가셨는데요. 거기서 이삼 년 계실 텐데. 기자 분이신가?”
“기, 기자는 맞는데, 아직 수습이고……. 어쨌든 취재나 인터뷰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그는 내 몸을 빠르게 훑었다. 그럼 뭐, 문하생 하려고 온 거네, 하며 드디어 내 목적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 말을 뱉은 그 순간, 날 이방인처럼 경계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선생님이 돌아와서도 이곳에 오지 말라는 둥, 더 이상의 문하생은 안 받기로 했다는 둥 언변으로 밀쳐냈다. 그는 윤지완의 문하생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긍심이 넘쳐 보였다. 날 꼬나보던 그 사람은 이물스러웠다. 그렇다. 그가 바로 내가 박 작가로 부르는 박영권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난 그때 스물일곱이었고, 그는 나보다 열 해 먼저 태어났다. 박 작가는 그곳에서 지내며 문하생으로 있었다. 그리고 윤지완 소설가가 인도로 떠나자 집을 정리하고 있던 것이다.
그 후로 몇 년 간은 박 작가와 윤 소설가 모두 만나지 못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삼 년 후 정식 기자가 되었을 무렵이다. 난 잡지사 데스크로부터 인도에서 귀국한 윤지완 소설가를 취재하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윤지완 소설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는 예상대로 꽃 같은 천진한 미소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뿌리 같은 강인함도 묻어 있었다. 마치 이 사회를, 그 집 주위의 모든 나무와 꽃을 총괄하는 버팀목, 즉 캡틴 같은 인상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에이브러햄 링컨을 찬양한 월트 휘트먼의 시의 한 구절, 'Oh Captin! my Captin!'을 외칠 뻔했다.
그는 탁 트인 서재와 거실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의 집은, 특히 그의 방은 꽃집이 아니라 책방이었다. 사진 기자는 책을 찍어도 되느냐며 물었다.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난 점점 그와 한없이 한올지고 싶었다. 사진 기자에게 잠깐만 나가서 집 주위 정경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그의 소설을 꺼내 윤지완 소설가에게 내밀었다.
“선생님 소설은 거의 다 읽은 것 같은데, 전 특히 이 책이 좋더라고요.”
“아, 그거. 나도 정이 가는 책이지. 손님들 오면 주는 책이라 많이 보관해 뒀어요. 이번 기 자 님에게는 다른 책을 주어야겠네. 하하.”
난 그 책에 사인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가 정성스레 사인을 하는 동안 슬몃슬몃 내 부탁을 내밀었다. 선, 선생님 저도 선, 생니임 밑에서어, 소, 오설을……. 내 밑에서 소설을 배우고 싶다고요? 그는 아름작거리는 나와 달리 단칼처럼 물었다. 난 조금 더 자신감을 갖기로 했다. 네!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고 싶습니다! 윤 소설가는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더니 갑자기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쏙 내밀더니 오른쪽을 향해 외쳤다. 이봐! 박영권이! 그러자 그 박영권이는 금세 그 방으로 들어왔다. 눈을 마주친 나와 그는 움찔했다.
“여긴 내 제자인데, 이놈 말고도 두 놈이 더 있어요. 근데 그 두 놈은 내가 집으로 보냈 지. 난 또 당분간 미국에 있어야 해서.”
“언제 오시는데요?”
“또 몇 년 걸릴 거요. 거기서 장편 하나 끝내고 올 생각이니까. 그나저나 이놈은 내가 떠 날 때까지 이 집에 남는 놈인데, 나로서는 기특하지. 내 밑에서 십 년은 있었나, 아마?”
“십일 년 되었습니다. 선생님.”
“어쨌든 내가 이놈을 부른 이유는, 이제 난 여기 없으니까. 이놈이 그래도 내 측근 아니 요? 이놈한테 배우는 건 어떻소?”
너무 싫었다. 그래서 감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윤지완의 문학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측근과 이야기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박영권이에게는 윤 소설가의 기품이 하나도 없지만 말이다.
그의 문하생이 되지 못한다는 자괴의 탄식을 한 나는 인터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몇 년을 기다린 이 순간이 안타까웠다. 대충대충 사진 위주로 가기로 하고 인터뷰를 빨리 끝냈다. 떠나려는 날 잡아 세운 윤 소설가는 내게 귀띔을 했다. 저놈이 고등학교도 못 나온 애라 소설을 읽히는 것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배우는 데 시간이 걸렸지. 그래도 이제는 등단할 실력 가까이에 온 것 같으니까……. 스스럽지 않은 그 말투에 부정의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난 윤지완의 문하생이 아닌 박영권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리고 정감 가는 그 집이 아닌, 칙칙한 박영권의 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문하생이 아닌 가정부 혹은 계집종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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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번 박영권에게 면박을 받은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 박영권 작가는 이제 자신도 등단했으니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 문하 생활을 접으라 했다. 그것만큼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문학상을 받을 정도의 실력인지는 몰랐다. 그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저번에 준 문학상 작품집도 인도 취재 준비로 바빠 미처 읽지 못했다. 하지만 윤지완 소설가의 십일 년 문하생이라면 실력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했다. 그의 모습에 나도 이제 독립해서 신춘문예에 도전하고 싶었다. 물론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딪치고 싶었다. 하지만 인도 문학 취재가 우선이었다.
사실 우리 문학 잡지사의 재정으로는 인도 문학 취재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어서 너무나 고마웠다. 사실 최근 잡지사에서 내 입지는 굉장할 정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그건 박영권 작가가 등단을 하고 나서부터다. 내가 애면글면 글공부를 하고, 스승이란 자가 등단까지 했으니, 선후배 기자들이 날 주목한 것이다. 그래 언니는 원래 작문 센스는 우리 잡지사 최고였잖아, 이제 너도 작가 될 일만 남았네, 하며 날 치켜세웠다. 그렇게 공석이 된 데스크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기념으로 나에게 해외 취재 기회가 온 것이다. 때마침 나는 윤지완 선생님의 인도 여행기 중 인도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때가 맞아든 것이다. 물론 내 자비가 거의 다 들어가는 취재이지만, 나를 인정해 주는 직장이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렇게 취재 준비로 너무나 바빴지만,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불안하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다. 모든 사람이 무섭다. 그들의 감정이 두렵다. 나를 바라보는 여러 개의 시선. 내가 하나의 시선을 바라볼 때 내 등 뒤에 있던 시선이 다가온다. 나는 오싹한 그 뒤의 시선이 느껴져 돌아선다. 그리곤 그 시선과 가까이 아주 가까이서 마주친다. 너무나 가까워 그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는다. 난 무서워 주저앉는다. 그렇게 주저앉은 나에게 주위의 모든 시선들이 다가온다. 시선들은 날 둘러싼다. 고개를 든 나는 수천 개의 시선을 본다. 너무나 무서워 울음을 터트린다. 그 많은 시선 중에 하나의 눈동자를 본다. 그 눈동자에 반사되어 보이는 건 내가 아니다. 박영권이다. 다른 눈동자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난 분명 울고 있는데, 눈동자의 박영권은 웃고 있다. 비웃고 있다. 나를. 모든 시선이 나를 박영권으로 보며, 비소를 흘리고 있다.
눈을 뜨니 해뜰참이었다. 내 눈에 땀방울이 떨어졌다. 순간 내 눈은 안개 속처럼 되었다. 내 시선은 혼탁해졌고, 꿈의 선명한 시선이 떠올랐다. 등골이 오싹했다. 난 얼굴의 식은땀을 닦아 냈다. 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를 박영권으로 보았는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잡지사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곳에서 난 건방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장님이 허락 없이 취재 기간을 늘린 일과 취재 장소를 마음대로 바꾼 일. 이제 데스크가 되고 자기 마음대로 일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논란거리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허락 없이 일처리를 한 것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게 이토록 비난 받을 일이냐고. 그러나 한없이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래 너 잘났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잘난 척 하는 것 좀 봐라, 이런 식이었다. 후배들도 또 다른 선배 눈치를 보며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난 정말 하루 종일 데스크의 업무만을 보았다. 사원들과 그 이외의 사담을 나누지 못했다. 결국 너무나 불편해 허물없는 사원에게 물었다.
“왜 정말 이러는 거야? 내가 승진했다고 이러는 거야? 다들 축하해줬잖아.”
“나는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은 조금 배신감을 느꼈나봐.”
“도대체 왜? 나 정말 힘들어.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야.”
“니가 우릴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사실 니가 승진한 건 박영권 작가 등단의 영향도 있었 잖아. 그래서 이왕이면 등단 작가 아래서 공부한 너를 사람들이 추천한 거고.”
“그런데 그게 왜?”
“정말 몰라서 그래? 신문 못 봤어?”
신문을 뒤져 보았다. ‘등단과 함께 문학상을 거머쥐었던 박영권의 작품, 표절!’ 당황스럽고 머릿속이 뒤숭숭해졌다. 이 사건 담당 후배 기자가 살며시 나에게 다가와 캐물었다. 선배님은 알고 계셨나요, 선배님 얘기도 기사에 넣어도 되나요, 라고 물으며 날 괴롭혔다. 난 후배에게 말했다. 난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 사원들에게 꽤 당당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난 박영권 표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 물론 박영권 작가 등단 때문에 날 추천해 준 거라면 미안해. 하지만 난 이 자리 필요 없어. 내가 그의 표절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자리 를 탐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줘. 하지만 날 인정해 줬잖아. 내가 표절한 것도 아니야. 내가 박영권도 아니고. 날 박영권으로 보고, 그것 때문에 날 추천한 거 같은데,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내려올게.”
사원들의 주목을 뿌리치고 내 자리 칸막이 속으로 앉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시선이 칸막이를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새벽 꿈 속의 시선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아직도 날 박영권으로 보고 있을까? 내가 왜 그의 분신이 되었을까. 이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런데 표절한 작품이 뭔지 아니? 난 아까 그 후배에게 물었다. 그녀는 나에게 그가 표절한 두 작품을 알려 주었다. 모두 내가 읽어 본 거작들이었다. 표절 부분을 알아낸 나는 그의 책과 표절 작품을 비교했다. 조용히 읽어 내렸다. 바보, 조금 돌려쓰든지, 똑같이 썼네, 이러니 딱 걸리지, 나 참. 그렇게 생색을 부리더니만, 난 씨부렁거렸다. 윤지완의 문하생으로, 등단과 문학상으로 화젯거리가 되었던 그였다. 하지만 그의 미래는 보기도 전에 마무리되었다. 추저분하게 끝을 맺었다.
내가 쓴, 내가 보여준 나의 글이 정말 좋았었다면, 그가 내 글도 표절했을까. 그 책에 내가 쓴 글의 소재가 없다는 것에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 책의 안표지에는 여전히 근엄한 척하는 그의 사진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허무하기도 했고, 어이없기도 했다. 난 순간 그 사진으로 비소(誹笑)를 보냈다. 무슨 의미로 내가 그러했는지는 몰랐다. 그냥 그가 우스웠다. 표절이라는 단어가 왠지 그에게 어울려 보였다. 계속 빈정거렸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웃음이 툭툭 튀어나왔다. 이런 사람과 문학을 이야기하고, 글을 의논하려 했다니.
나를 무시하던 박영권. 은연중에 항상 그를 증오했었다. 그의 등단이 왜 내게 기쁨이 되지 못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문학상이 내게 자부심이 되지 못했는지 알고 있었다. 허나 그의 사진을 보며 왜 비웃었는지는 몰랐다. 우연히 나온 그 비웃음이 왜 내게 희열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비록 그 때문에 회사에서는 불편하게 되었지만, 난 그와 다르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았다. 그날 하루 종일 타락한 한 사람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