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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달리트 (2편)

by 오로지오롯이


*

잡지사에서 나에 대한 험한 분위기는 점차 사그라졌고, 다시 용기를 얻어 인도 취재를 떠났다. 인도는 예상대로 더웠다. 옆에 있는 조 선생도 올 때마다 고생한다고 했다. 조 선생은 인도 대사관에서 일하는 혼혈인이다. 그의 아버지가 인도 사람으로 대사관의 중역을 맡았었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는 내 대학교 은사이다. 그녀는 당연히 인도 여행을 자주 다녔다. 인도어도 곧잘 했다. 그래서 인도문학을 알아보기 위한 여행에 그녀를 동참시킨 것이다. 물론 특이한 가족 관계를 많이 얘기한 교수님께 부탁해서였다. 우린 서로 데면데면한 성격이라 쉽게 친해지지는 못했다. 그래도 서로 정감이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서로 사촌언니, 사촌동생처럼 가까워졌다. 하지만 인도풍의 그녀는 언니보다는 오빠처럼 든든했다.


열기에 취한 나에게 시원한 바다 풍경이 절실했다. 멀리 보이는 바다에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싶어 차를 탔다. 하지만 그곳에는 차가운 바다는 없었다. 그리고 인도문학 취재를 할 수 없었다. 문학보다 중요한 인도의 현실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건 폭풍우 속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존재, 달리트에 관한 일이었다. 인도의 쓰나미의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은 건 둘째였다. 달리트에 관해서는 그때 처음 알았다. 쓰레기를 치우던 사람들을 보고 조 선생이 “달리트!”라고 외친 것이다. 달리트는 정말 21세기에 볼 수 없을 것 같은 새로운 세계였다. 아니, 그곳에선 당연한 세계였다. 불가촉천민, 언터처블, 하리잔, 오물 청소부. 이것이 모두 달리트의 이름이었다.


조 선생은 인도인들이 달리트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고 했다.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카스트 제도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최하급 계급. 오물이나 시체를 처리하며 살아가는 사시랑이인 것이다. 조 선생에게 한 시간 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도문학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인도문학 취재를 못 한다는 것에 너무나 아쉬웠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조 선생에게 달리트와 며칠 지내다 가고 싶다고 했다. 조 선생은 처음엔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ISD라고 써 있는 전화 가게로 들어가더니, 어딘가로 연락을 했다.


“정 기자, 그럼 일단 타밀나두주로 가자.”

“거기가 어딘데요?”

“대사관에 연락해 보니까, 쓰나미가 일어난 타밀나두주에 한국 봉사 단체가 있대.”

“그럼 거기에는 달리트가 있는 건가요?”

“달리트에게 구호 물품을 전하는 행사도 있다니까, 있겠지.”


행로의 변경을 잡지사에 보고하지 않았다. 변경 얘기가 커지면 달리트에게 간다고 해도 시간이 지연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몇 시간을 내달렸다. 점차 맑아지던 바다가 또 다른 쓰나미 지역에 다다르자 다시 검게 짙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달리트 빈민촌. 한국 봉사 단체와 간단히 이야기 후 달리트에게 다가갔다. 우린 일단 그곳에서 그들을 만난 뒤 쓰나미 쓰레기 처리를 할 계획이었다.


“앗 쌀라무 알라이꿈.”

“와 알라이꿈 앗쌀람.”


인사를 하며 악수 청했다. 달리트는 숫접게 악수를 받아 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왓 츄어 네임?”을 연발하며 친근하게 대했다. 조 선생은 달리트와 내가 인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카메라로 찰칵댔다. 달리트도 봉사 단체와 많은 사진을 찍었는지 나름 자세를 내곤 했다. 그들의 미소는 그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증표였다. 우리는 그렇게 달리트 공동체가 되었다. 나와 조 선생은 일단 쓰나미 현장으로 갔다. 시체는 이미 달리트들이 치워놓은 상태였다. 우린 각종 쓰레기와 고인 물을 퍼내며 악취를 참아냈다. 마스크가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달리트는 이 악취가 시체 냄새라고 자연스레 말했다. 그랬다. 그곳엔 아직도 시체의 썩은 내가 남아있었다.


쓰나미. 물론 그 폭풍우에 쓸려 나간 건 달리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민이라 해변에서 놀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폭풍우 위에 있던 건 달리트들이었다. 그들은 힘겹게 폭풍우에 몸을 실은 채 웃고 떠들던 상위 계급 사람들에게 항의하고 있던 것이다. 조용히, 자신들의 말이 아닌 거세찬 물소리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항의한다 해도 그들은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피해야 할, 끔찍하고 더러운 존재가 되어 갔다. 더러운 쓰나미가 되어 갔다. 이젠 험하고, 쓰레기들에 뭉쳐진 그 폭풍우에서 그들을 꺼내놔야 했다. 그저 폭풍우가 아닌 인간의 이름으로 살아가도록 말이다.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달리트는 인간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이방인에게 닿을까봐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그래서 난 내가 먼저 그들의 손을 잡기로 했다. 가까이에 보이는 청소하는 여자 아이에게 다가갔다. 다리에 오물을 묻히면서 해변을 청소하고 있었다. 조 선생은 내 통역을 위해 알아서 내 뒤를 따랐다.


“이름이 뭐니? 몇 살이니?”

“헤탈이에요. 15살이고요.”


그녀는 누구보다도 밝았다. 까만 피부에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녀의 손은 흐벅지진 않지만, 따뜻했다. 겉은 거칠었지만, 속은 갓난아이의 엉덩이처럼 보드라웠다. 처녀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을 스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헤탈은 옆에 있는 친구의 일을 안아맡아 고생을 자처했다. 귀여운 아이였다. 난 그녀에게 언니, 동생이 아닌 친구를 하자고 제의했다. 그녀는 수줍어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그렇게 외국의 친구가 처음으로 생겼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는 항상 날 웃게 했다.


거리 청소도 끝나던 무렵, 귀국 예정일의 이틀 전 날이었다. 나는 조 선생과 달리트 친구인 헤탈과 함께 산책을 했다. 바다 쪽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깨끗해진 바다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그리고 눈이 감기는 순간 옆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헤탈은 남자와 부딪혀 더러운 길에 몸을 묻고 있었다.


“뭐야, 달리트잖아. 오늘 정말 운이 없군. 더러운 달리트와 몸이 닿다니.”


그리고 그는 쓰러져 있는 헤탈의 뺨을 내리쳤다. 헤탈은 몸을 떨며 고즈넉이 않아 있었다. 난 떨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분노의 정념이었다. 조 선생의 팔을 잡고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짓이야. 당장 사과해.”

“뭐야. 당신도 달리트인가? 이런 더러운 것들이 어딜 감히.”


남자가 나의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달리트라고 하기에는 하얀 피부군. 어느 민족의 달리트인가?”

“나는 한국인이다.”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통역을 하던 조 선생은 약간 떨린 목소리였다. 남자는 한국인이라는 말에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더 따지려고 했지만 조 선생이 말렸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걸어갔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헤탈과 부딪힌 한쪽 팔과 그녀의 뺨을 내리친 손을 닦았다. 그리고 그 손수건을 쓰레기 더미에 내버렸다. 인도에서 그 남자의 행동은 전혀 죄가 아니었다. 달리트를 강간하더라도 자신의 몸만 더러워지는 것이지, 죄는 아니었다. 하늘은 왜 이들에게만 이리도 큰 형벌을 내린 것일까.


이 과정에서 달리트의 현실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노라이즘 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인간으로 인정받아야 여성 권위를 따질 수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달리트의 정신도 바뀌고는 있었다. 자연 재해 때 봉사 오는 외국인들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다. 외국인의 근대적 이야기는 달리트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 바꿔 놓은 듯싶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은 교육과 자아 발견을 통해 부모 세대와는 다른 삶을 꿈꾸었다. 부모들 또한 아이들에게 교육을 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의지일 뿐이다. 그들이 사회를 뒤엎을 힘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도와야 한다.


헤탈은 어린 아이 같은 신음을 내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강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 위에 억울한 물줄기가 흘렀다. 그예 내 상기된 얼굴 위에도 물길이 만들어졌다. 조 선생은 애써 눈물을 참아 냈다. 나는 그날, 봉사 단체의 텐트가 아닌 헤탈의 방에서 잤다. 달리트들은 미안해했지만, 난 고마웠다. 자리가 좁아 조 선생은 들어오지 못했다. 통역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난 헤탈에게 위로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에는 거리 복구, 해변 청소도 마무리했다. 봉사 단체도 귀국 차비를 했다. 달리트들은 연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웃으려 애썼다. 다음 날 아침이면 모두들 이곳을 떠난다. 나도 인도문학 취재물이 아닌 달리트의 이야기를 들고 고국으로 간다. 그날 밤은 여러 가지 생각에 잠이 들지 못했다. 헤탈도 이불에서 뒤슬렀다. 그녀도 아쉬웠나 보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눈이 감겼다.


“쾅!”


굉음과 진동에 눈을 떴다. 바닥의 물기가 느껴졌다. 쓰나미였다. 겨우 안정될 무렵에 터진 재앙이었다. 달리트와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껏 청소했던 거리가 다시 더러워져 있었다. 너무나 허무했다. 인명 피해가 있을 해변으로 갔다. 그곳에는 봉사 단원들이 있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적었다. 아침이라 많은 사람이 죽진 않았다고 봉사 단원이 말했다. 그래도 드문드문 시신이 보였다. 심란했다. 하지만 냉정해지기로 했다. 곧 봉사 단체는 귀국 날을 이틀 뒤로 미루었다. 나와 조 선생도 그들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썩은 바닷물을 이불 삼고, 오물과 씨름하며 이틀을 더 보냈다.


귀국 날이었다. 일단 헤탈과 달리트들이 준비한 음식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웠다. 그리고 다시 거리로 나갔다. 마무리 작업을 해야 했다. 시체들은 달리트들이 거의 치웠고, 한국인들은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쓰레기와 엉킨 시체를 가까이서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차마 보지 못했던 시체들도 냉정히 바라보게 되었다. 바다는 많이 깨끗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바다 곳곳에 미세한 그것들이 있었다. 더러운 오물의 흔적과 시체의 부패로 인한 악취. 그리고 망자 가족들의 눈물.


쓰나미는 달리트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들은 어쩌면 재앙을 기다리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체 처리와 오물 처리, 거리 청소는 그들에게 임금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괴롭히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다. 하지만 그것 모두 달리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일해서 받는 약간의 돈과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의 죽음을 치우는 일…….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카스트……, 달리트…….


햇발이 뻗치는 점심때가 되었다. 사람들은 밥을 먹는 대신 짐을 챙겼다. 비행기 시간을 맞춰야 했다. 이번에야 말로 모두가 돌아가는 시간이다. 달리트는 아직 해변에 있었다. 우리 모두는 해변으로 갔다. 좀 더 깨끗한 곳에서 인사를 하려고 그들을 부르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들의 생계 수단을 방해할 순 없었다. 아직 악취가 빠지지 않은 바다로 다가갔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다가왔다. 나와 조 선생은 달리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헤탈을 찾았다. 하지만 헤탈은 그곳에 없었다. 조 선생은 샤이레시 씨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었다. 그는 해변 가까이의 주택가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어린 달리트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조 선생과 나는 길을 갈라 헤탈을 찾기로 했다.


“헤탈! 헤탈!”


나의 외침을 들은 한 꼬마가 저 골목 끝 헤탈을 가리켰다. 난 멀리 보이는 조 선생을 불렀다. 그리고 헤탈에게 다가갔다. 헤탈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골목 옆 대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곧 그 집에 다다랐다. 난 그곳에서 널브러져 있는 한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는 분명 저번에 그 남자였다. 짧은 머리. 땅딸막한 체격. 그리고 그 손수건을 꺼내던 저 검은 바지의 뒷주머니.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사탄의 인형처럼 가벼운 비웃음을 날렸다. 하지만 헤탈은 그 남자를 그저 바보같이 바라보기만 했다.


달리트, 그들에게 복수의 본성까지 누릴 수 없는 것인가. 물론 있을 것이다. 그건 감정의 자유이니까. 허나 헤탈은 묵묵히 시체를 처리하려 하고 있었다. 다른 달리트도 마찬가지였었다. 자신들에게 엄청난 치욕을 주었던 사람들의 시체를 보며 냉정했다. 하지만 헤탈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치욕을 주었던 그 남자였기에 너무나 통쾌했다. 더러운 인간, 아니 쓰레기 자식! 이렇게 씨부렁거리는 동안 헤탈은 처음 당황하는 표정마저 거두고 묵묵히 시체를 정리하려 했다. 나는 더욱 그 시체에 대한 화가 치밀었지만, 어린 소녀인 헤탈은 점점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 헤탈과 나의 표정은 점점 상반되어 갔다. 그것이 왜 내게 또 다른 화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난 하지만 나보다 더 큰 치욕을 입은 헤탈이 너무나 냉정해 오히려 그것이 너무나 불편했다. 더러운 물 한 바가지라도 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헤탈! 저거, 저거! 워터, 워터!”


헤탈이 멀뚱히 서 있었다. 난 시범으로 직접 더러운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시체 얼굴을 향해 부으려 했다. 그때였다. 이 가녀린 소녀의 힘이 천하장사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작은 손으로 내 손목을 속박했다. 더러운 물바가지는 퍽 소리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난 그 순간 흥분했나 보다. 그녀가 보인 시체에 대한 냉정과 조의의 태도는 날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런 사소한 복수도 두려워하는 건인가. 울음이 터졌다. 헤탈이, 달리트들이 불쌍해졌다. 순간 살갗에 닿은 햇살이 산득하게 느껴졌다. 속이 메슥거렸다. 난 절규했고, 상황을 알아챈 조 선생은 내 절규를 동정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

난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공황 상태였다. 가슴 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다. 인도 취재 자료는 이미 구석에 처박은 상태였다. 잡지사에서 인도에 다녀온 일을 물어도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곤 했다. 아이를 밴 여자는 남 보기에 배부른 것 같으므로 실지 배가 고파도 아무도 그 사정을 몰라주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렇다고 그 답답함을 풀려고 남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졌고, 혼자 술을 훌쩍훌쩍 마시곤 했다. 그날도 그렇게 지내고 있었는데 조 선생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헤탈, 바보스럽게도 착했지? 넌 그게 당황스러웠을 거고. 나도 네가 생각한 것처럼 헤탈 이 그 시체한테 오물이라도 부었으면 속 시원했을 거야. 하지만 달리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 그들이 바보여서? 아니야. 그들은 교육을 받아. 아무리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라도, 죽은 자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그게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달리트라는 더러 운 취급을 받는 존재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조 선생.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잠깐 끊을게요. 다시 전화할게요.”


내 머릿속에 커다란 물체가 날아와 쾅 부딪쳤다. 자릿하고, 서느런 깨달음이었다. 내 생각이 너무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잠재의식 속에는 너무나 하찮은 감정이 있었나 보다. 바로 ‘타락한 것에 대한 복수’ 그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나 보다. ‘헤탈’ 덕분에 ‘해탈’한 사람처럼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바보였다. 헤탈이, 달리트들이 아니라, 내가 하찮은 것이었다. 그래, 타락한 사람에 대한 복수가 무슨 의미인가. 아무리 날 멸시하고, 괴롭혔어도 ‘타락’한 사람에게 무슨 복수가 필요한 것인가. 타락한 것에 대한 경의는 날 얼마나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인가. 아, 난 아무 것도 몰랐다. 달리트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눈물이 술처럼 쓰고도 달게 흘렀다. 그리고 난 아까부터 박영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도로 가기 전 그의 표절 작품을 보고 비웃었던 내가 떠올랐다.


비록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스승이었다. 그의 좁은 집에서 문학에 대해 심도 있게 얘기하진 못했지만. 매번 날 가정부처럼 청소를 시키고, 빨래를 시키던 그였지만. 내가 존경하는 윤지완 선생님의 이야기를 많이 해 준 사람이다. 항상 날 멸시하고, 욕지거리를 해 대던 악덕 글쟁이였지만! 그래도 내 글을 봐준 글 선생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그를 업신여겼는가. 그를 왜 비웃었는가. 한 사람의 몰락을 같은 인간으로서 비웃는단 말인가. 은연중에 한 인간의 몰락을 기껍게 여긴 내가 역겨웠다. 나에게 너무나 실망했다. 아니, 이건 실망 이상이었다. 인격적 타락이었다. 그가 아닌 나의 타락이었다.


그가 평소 나에게 보내던 비웃음을 내가 똑같이 비웃음으로 갚을 수밖에 없었는가. 비웃음을 살아 있는 것에게 보내는 것은 정당성을 부여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건 ‘무시’나 ‘비하’의 뜻의 복수이니까. 하지만, 죽은 이의,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몰락한 이에게 보낸, 그 비웃음. 그건 복수도 마음의 정화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력을 잃은 생명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에게 비웃음을 보낸 건 허공에 자신의 더러운 인격을 던진 것이다. 난 그것을 몰랐고, 헤탈이, 달리트들이 그걸 알고 있었다.


시체들에 대한 욕 한 마디라도 하는 것이 달리트의 유일한 특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아니, 누리지 않았다. 왜냐고? 그들은 너무나 천하게 여겨지지만 너무나 숭고했기 때문이다. 달리트는 상위 계급을 증오하지 않았으니 복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 증오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것에 대한 대답도 그들이 너무나 숭고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며칠이 지났을까. 고향에 내려가 있던 박영권의 답장이 왔다. 난 그에게 편지로 사과를 했었다. 물론 당신이 알지 못한 것이지만, 당신을 비웃었다고, 미안하다고, 용서를 해 달라고 말이다. 박 작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작가로서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신 그 타락을 비웃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새 출발을 권유했다. 나의 이런 편지에 그는 고맙다며, 자신의 과거를 용서해 달라며 답장을 보낸 것이다.

헤탈이라는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해서 얻은 첫 번째 배움의 수확이었다.


불가물로 말라비틀어지고 만 포도 알들이 즐비한 포도밭이 있었다. 포도 주인은 너무나 상심했다. 한 해 농사가 다 망했다. 그런데 갑자기 새찬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포도는 가뭄으로 다 죽어버린 상태였다. 포도 주인은 하늘이 괘씸했다. 그리고 차라리 계속 비가 안 내렸었다면 억울함은 덜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이 상황에 비는 안 내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포도들과 포도 주인은 그 비가 자신들을 비웃는 것 같을 것이다. 그럼 가장 좋은 비는 무엇인가. 바로 포도의 당도를 높여주는 적당한 시기에 내리는 적당한 빗줄기일 것이다. 포도를 위해 적당한 시기에 자신의 비를 내주는 하늘. 그 하늘같은 존재가 여기 있다. 그들은 가물어 망친 농사에 비웃음 같은 비를 뿌리지 않는다. 오직 풍년을 위한 빗줄기만을 내려 준다. 달리트를 들어보았는가.


달리트들은 닿기만 해도 오염되는 생명체가 아니다. 우리의 오염된 마음을 씻겨 주던 정화수이다. 불가촉천민 달리트, 그들은 천해서 만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숭고하고, 위대해서 만질 수 없는 존재이다.

나는 출간된 잡지 속에서 달리트들에 대해 쓴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잡지의 사진 속에는 헤탈과 손을 꼭 잡은 내 모습도 있었다. 너무나 숭고해서 만질 수 없다는 그 손을 내가 잡고 있다. 그리고 아직 낫낫한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앞으로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손 기운은 이미 겉몸을 휘감고, 안으로 스며들어 내 인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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