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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Sep 29. 2017

기억이 흔들린다.

여자는 자신의 과거와 타인의 경험을 혼동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흔들린다. 여자는 자신의 과거와 타인의 경험을 혼동하기 시작했다. 어제 새벽 편의점에 들려 맥주 두 병을 산 것이 자신이었는지 계산대에서 맥주를 사러 온 여자를 맞이한 것이 자신이었는지 TV 앞에 앉아 그저 그런 다큐멘터리를 보며 시간을 보낸 것이 자신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시각 여자는 마지막 차를 놓치고 택시마저 잡지 못해 집까지 이어지는 긴 새벽 도로를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애당초 깨어 있지 않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장례식 장에서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입을 맞추고 있는 여자. 쓰이지 않는 글을 억지로 짜내며 몇 잔째 커피를 타고 있는 여자. 화장실 변기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고 있는 여자. 술에 취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여자. 서랍을 가득 채웠던 편지들을 꺼내 하나하나 촛불에 태우고 있는 여자. 모든 것이 그녀였고, 그녀는 누구도 아니었다. 들었던 이야기. 보았던 이야기. 상상했던 이야기. 뒤범벅이 되어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지난밤은 물론 살아온 모든 날이 꿈같았다. 정신없고 번잡한 데다 서로 닮기까지 한 단편소설을 수십 편 읽은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맞던가. 난 언제부터 혼자 살았지. 내가 담배를 피웠던가. 술을 좋아했던 건 그 사람이었나. 다큐멘터리에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편의점 계산대에 서있던 여자를 장례식장에서 만났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왜 택시를 운전하고 있었지. 편지를 태우고 불을 껐던가. 엄마 왜 울고 있어요. 그 사람이 전화만 해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 주량이 어떻게 되더라. 그 사람은 혼자서 소주 몇 병을 마시곤 했었지. 난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정신을 못 차렸는데. 쓰고 싶지도 않은 글을 왜 써야 하는 거지. 그 여자는 왜 맥주를 샀던 걸까. 장례식장에서 내가 절을 했나, 아니면 기도를 했던가. 난 그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 사람 품에 내가 있는 거지. 왜 모든 편지에 받는 사람이 적혀있지 않은 거야. 내가 어제 뭘 했더라. 그 사람이 죽은 게 한 달 전이었나. 커피 좀 그만 마시라고 내가 말했던가. 저 여자는 왜 가로등도 없는 밤길을 혼자 걷고 있는 거야. 네가 무슨 얘길 했지. 엄마 누가 죽은 거예요. 지금이 몇 시지.
무겁게 비가 내린다. 고인 물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친다. 그녀는 누구도 아니었다.


사진 : Sundaram Ramasw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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