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의 심장.

by Oroxiweol

봄의 정령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 나는... 생애 첫 스파링?을 경험했다.

손에 끼던 글러브도 어색했는데, 이제는 헤드기어와 정강이 보호대를 주문하고 있는 손가락이라니.

역시 세상 일은 참 모를 일이었다.

황금색이 적절하게 들어간 검정 헤드 기어 줄이 관장님 손에 의해 조여졌고, 나는 남은 찍찍이를 붙였다.


'지이익-지지직'


헤드기어와 색을 맞춘 검정색 정강이 보호대는 나의 양쪽 정강이를 수많은 이들의 발차기로 부터 지켜줄 것이다. 자, 이제 장비는 준비되었다.

아, 물론! 이 스파링은 관장님이 봐줘도 한참 봐주는 세미 스파링이었다.

상상 속 나의 모습은 멋있게 잽과 원투를 날리는 그림이었으나, 현실은 처참했다.

그건 마치 검은 짐승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모양새였다.

내가 날리는 건 잽이 아니라 냅다 휘두르는 주먹이었고, 그 주먹질은 상대에게 가닿기는 커녕 허공에서 사라졌다. 정강이 보호대를 철썩 같이 믿고 발차기를 했지만, 상대의 발은 나의 허벅지와 배를 가격했다.

심지어 관장님은 앞에서 파닥거리는 나와는 다르게 별 움직임이 없었다. 나의 헛발과 헛주먹을 요리저리 피하며 지켜보다가 주먹으로 한 번 툭. 발로 또 한 번 툭. 왼손을 돌려서 나의 왼쪽 얼굴을 툭.

그게 다였다. 당.연.히 아프지 않았다.

왜냐, 숙련된 관장님이 상대를 해주었기 때문에 나같은 쪼랩은 다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경험하는 땀 폭발. 땀이 정말 미친듯이 났다. 헤드기어가 감싸고 있는 얼굴은 땀 범벅이었다. 잠시 착각이 들었다.


'누가 내 정수리에서 샤워기를 갖다가 틀었나? 이상한데?!!! 눈을 뜰수가 없어.'


체력 소모 또한 대단했다. 몇 되지도 않는 관장님의 공격을 피해 두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다 보니 오랜만에 목에서 피 맛이 났다. 체감상 5kg는 빠졌을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으면 말이 안되는 땀과 체력소진.

맞으면 돌아가는 헤드기어 때문에 시야를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지 감도 안잡히는 우당탕탕 스파링.

나의 옆으로는 여러 사람들이 열중해서 스파링을 하고 있었고, 그들은 매우 진지해 보였다. 나 역시 진지한 건 마찬가지 였다. 동작이 그렇지 못했을 뿐. 서핑보드에 두 발을 올리고 파도에 몸을 맡긴 서퍼들마냥 다른 이들의 스파링은 끊김이 없었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슥-빡'이 오갔고, 방어와 공격이 난무했다. 아무튼 헤드기어와 정강이 보호대까지 다 하고 경험해 본 첫 스파링은 재미가 있었다.

그래, 분명 '재미'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


'이게 뭐지?'


헤드기어 너머로 누군가의 손이 뻗어져 나의 머리를 울리게 하는 기분. 상대의 주먹을 허락하고 있는 나.

묘했다. 첫 스파링 후 현타가 왔다.

'이걸 왜 하는 걸까?'

'왜 나는 돈을 내고 맞고 오는 거지?'

'분명 재미있던 복싱인데, 혹시라도 싫어지면 어쩌지?'

'근데 관장님은 어쩌다가 킥복싱 선수가 된 걸까?'

집에 가면서 수많은 질문들이 떠나질 않았다. 고작 몇 대 얻어 맞고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수업이 끝난 후 관장님과 가볍게 스파링을 한 번 더 하고 난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관장님은 왜 이 운동을 시작하시게 된거에요? 솔직히 저 그날 현타 왔거든요."


"오, 처음 시작할 때 그럴 수 있어요. 특히나 다 큰 성인들이 만나서 겨루는 거잖아요?

사람인지라 게임인줄 알면서도 맞으면 기분이 나쁘거든요.

'저 사람이 날 때려? 그럼 나도 세게 때려'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거예요. 이건 시합이자 게임이지, 절대 싸움이 아니에요. 분명히 룰이 존재하고, 상대의 공격 흐름을 읽으며 내가 할 공격을 경기내내 끊임없이 생각해야해요.


저는 강인한 남성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세지고 싶고, 강해지고 싶고. 그러다가 시작했는데, 제가 또 전사의 심장은 가지고 있지 않더라고요. 원래 사람이 상대한테 맞으면 '욱'하는게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그런게 없었어요."


뭐랄까, '전사의 심장'이라는 단어를 듣는데 그 단어가 귀에 와서 꽂혔다.

관장님은 전사의 심장이 없었다고 했지만 이미 그 심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진정한 전사의 심장을 가진 자는 시합에서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해 싸울 줄 아는 자, 나같은 쪼랩의 실력에도 발맞춰 상대해주는 강강약약이 아닐까?

관장님의 스파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맞고 현타왔던 감정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다. 룰 아래 즐기며, 상대를 존중하며 하는 운동이다. 그래서 오히려 너무 약하게 잽을 날리는 것도 매너가 아니라고 배웠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원투-잽, 훅, 그리고 킥을 날리는 법을 배워나가는 중이다.


20250820_114843.jpg Photo by Oroxiweol.




덧붙이기 :)


운동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심장. 그것은 '전사의 심장'이다.

편법을 쓰지 않고 상대를 일부러 봐주지 않고 내가 연마해온 실력 그대로 상대와 마주하는 법.

나보다 약한 이에게는 그에 맞는 힘으로, 나보다 강력한 이를 만났을 때는 물러나지 않고 가진 힘을 온전히 쓸 줄 아는 법. 살아가면서 잊지 말고 자주 기억해야 하는 태도인 것 같다.

우리는 지금 각자의 링 위에 있기 때문이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