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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Nov 11. 2022

할아버지와 불고기 백반

내 비록 장손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엔 월말고사가 있었다. 한 달 동안 학교에서 배운 걸 우리가 얼마나 이해했는지 선생님은 꼭 확인을 했다. 1학년 첫 월말고사, 생애 첫 시험을 치르는 것만으로도 긴장됐다. 점수를 잘 받고 싶었다.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 이렇게 세 과목에서 모두 100점을 받았다. 큰 손녀의 '올백' 소식에 할아버지는 무척 기뻐했다. "뭐 사주랴?" "불백이요." 살이 통통히 오르기 시작한 난 우리 집 뒤에 있는 '삼원회관'의 불고기 백반을 좋아했다. "으이구, 할아버지가 뭔가 사준다고 할 때 큰 걸 말했어야지 기껏 불백이 뭐니?" 엄마는 나의 소박한 바람을 질타했지만 난 그로 족했다. 한 상 잘 차려진 불고기 백반을 먹는 일은 특별했다.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았고,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할아버지는 손녀를 귀히 여겼다. 장남인 아빠가 첫 딸을 낳았을 때 할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직접 이름을 지어 안겼다. 큰며느리인 엄마는 장손을 낫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함에 늘 시달렸지만 할아버지는 달랐다. 할머니는 아들만 내리 여섯을 낳았다. 난 우리 할아버지 핏줄을 받은 첫 '딸'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자주 안아줬다.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할아버지는 잘 익은 살구와 무화과를 따서 건넸다. 내 기억 속 가장 맛난 살구와 무화과는 할아버지 손에서 나왔다.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막걸리 마시는 자리에도 날 데려갔다. 내가 다섯 살은 되었을까. 빨간 땡땡이 원피스를 입고 할아버지 옆에 얌전히 앉아 있으면 할아버지는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내게 줬다. 달았다. 동네 할아버지들에게 받는 귀여움도 어린 마음에 좋았다. 할아버지네 놀러 가면 할머니가 아닌 할아버지 옆에 가서 잠들곤 했다. "요것이, 밥 먹을 때까진 내 옆에 꼭 붙어 있다가도 밤만 되면 지 할아버지 옆으로 파고들더라고. 내가 오줌 쌌다고 혼낸 날도 할아버지 옆으로 가서 잤어."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지금도 나만 만나면 사십 년도 더 된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다. 잠자리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한없이 좋았던 느낌은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내가 하는 모든 걸 믿고 지지했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사준 것도, 고등학교 때 일본 여행을 보내준 것도, 대학생 때 새로 나온 폴더폰을 사 준 것도 할아버지였다. 심지어 엄마가 그토록 반대한 남편이 처음 인사를 왔을 때도 할아버지는 내 편을 들었다. "세상에 그런 사위 어디 있나 봐라."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엄마의 눈꼬리는 내려앉았고, 내 결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큰 손녀를 향한 할아버지의 신뢰는 무한했다. 할아버지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에 난 무엇이든 잘 해내고 싶었다.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반장이 됐을 때, 대회 나가 상을 탔을 때 할아버지는 신이 났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매일 큰 손녀 자랑을 했다. 결혼해서 내가 낳은 두 아들마저도 할아버지에겐 기쁨이었다.


  지금은 흔한 불고기가 됐지만 식당에서 '불백'을 마주할 때마다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불백은 할아버지의 사랑 표현법이었고 난 그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자랐다. "우리 00이 왔냐." 내가 찾아갈 때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나를 맞이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다시 곁으로 다가와 언제고 날 부를 것만 같았다. 장례 치른 후에도 몇 달 동안 시도 때도 없이 할아버지는 더없이 다정하게 날 부르고 또 불렀다. 소천하신 지 10년이 더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 할아버지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00이 왔냐." 하늘에서 날 이리 부르고 계시겠지. 그 음성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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