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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Oct 04. 2021

쉰 즈음에-2

쉰 즈음에  뒤돌아보는 젊은 날들

하지만 쉰을 넘기는 나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지금이 가장 큰 변곡점으로 생각되요. 지금까지 반백 년 인생에서 느껴보지 못하던 감정들을 많이 느꼈거든요.

스물에는 희망 밖에 없었지요. 잠깐, 왜 십대 때 얘기는 안 하냐구요? 십대는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 때는 두뇌라는 게 없는 나이잖아요. 생각을 아예 안하고 사니까. 중추신경계가 없이 말초신경계로만 살아가는 나이라고 해야 하나? 오죽하면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겠어요. 그 파도가 쓰나미가 되어 자기가 살고 있는 평온한 집안을 아예 풍비박산내는 나이잖아요. 십대가 있는 집은 평화로운 걸 본 적이 없어요. 오죽하면 제 친구는 자기 인생의 암흑기로 딸이 중학생이었던 때를 꼽아요. 자기 아닌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10대의 자식’임에 틀림없어요. 여하튼 다시 스무살로 돌아가죠. 스무살에는 희망만 가득해요. 그 당시에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시기죠. ‘사람은 늙으면 죽는다.’ 이 조건 명제에서 일단 늙는다는 충분 조건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죽는다는 필요 조건은 아예 상상할 수도 없는 시기예요. 그래서 꿈만 가져요. 천년만년 살 것 같으니 실현 방법은 생각하지 않죠. 누군가 자기 대신 꿈을 이뤄줄 거라 생각해요. 복권을 사도 내일 당장 당첨될 것 같구요.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점점 알아가죠. 그게 서른이에요. 서른에는 현실에 적응을 해요. 스물의 혈기는 조금 식어 들고 감성보다는 이성이 조금 더 앞으로 나설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구요. 자신의 상황을 심각하게 고려해서 꿈을 이룰 방향을 찾아가죠. 혹시나 하면서 꿈의 실현에는 의문이 들기 시작해요. 정말 이루어질까? 하지만 희망은 아직 살아있죠. 그래도 될 거야. 내가 누군데. 하늘은 나만 돕잖아. 그러다가 마흔이 되면 ‘이상하게 하늘이 나만 안 돕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세상과 타협을 시작해요. 대기업 회장을 꿈꿨던 사람들은 작은 수퍼마켓 사장도 같은 CEO라고 주장하고, 대통령을 꿈꿨던 사람들은 동네 이장도 똑같이 지도자라고 우겨요. 그것을 부정하면 자기의 의식이 너무 괴롭기 때문에 무의식에서 모르게 조정하는 거예요. 인간은 불안하거나 불편한 상태를 겪는데 익숙하지 않은 동물이예요. 의식이 불편한 상태에 놓이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무의식이 암암리에 열심히 하는 거예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정보부처럼요. 그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이구요. 그것이 프로이드가 말하는 꿈이에요. 슈퍼에고(Superego)의 감시를 받아 에고(Ego)에 의해 각색되는 이드(Id)의 표현. 정확히 이 시기의 표현이죠. 변명거리를 찾으면서도 꿈의 끝자락을 아직 놓지 않아요. 그러다 쉰이 되는거죠. 이제 깨달아요. 꿈이란게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구나. 이제 나도 내 살길을 찾아야겠다. 좌절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거죠. 아주 작은 희망이요. 하지만 그것도 실현하기는 쉽지 않아요. 가령 ‘이렇게 인생이 가늘어진 바에는 오래라도 살자. 그래 가늘고 길게 가자. 낮게 떠서 멀리 날자’, 이런 희망 말이에요. 그래서 새벽에 산에도 오르고, 나무에 등이라도 부딪히고 그러는 거예요. 박수치면서 뒤로 걷기 같은 것도 하구요. 오래 사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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