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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Dec 20. 2021

아기 손바닥 같은 아네모네 잎새.

매년 가을에 심어야 할 “추식구근”으로
튤립만큼 기대되는 꽃이 아네모네이다. 


하지만 나는 “아네모네” 하면 늘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떠오른다.


지금은 이름도 까먹었지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으로 학년을 시작할 때는 미혼의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학년을 마칠 무렵에는 임산부가 되어 부른 배에 손을 올리고 겨울방학식을 진행했던 기억이 있다. 미혼인 선생님의 결혼 소식에 반친구들 모두 책상을 치며 들썩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설레임에 가슴이 들썩인다. 


그 선생님, 턱이 유난히 각진 얼굴형이라 스스로 “아! 네모네”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왜 선생님 별명이 “아! 네모네”인줄 알겠지?라고 하면서 엄지와 검지를 쫙 펼쳐 자기 각진 얼굴에 갖다 대 보여줬던 기억이 생생하다. (참, 세월 무상하다. 벌써 몇 년 전인가? 열 손가락으로는 계산이 안되네.)


하지만 아네모네라는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몰랐다. 아마 첨에는 꽃인 줄도 몰랐던 것 같기도 한다.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매년 가을이면 구근을 심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매년 가을, 인터넷 사이트를 뒤적이는 구근 쇼퍼가 발견한 아네모네는 생각보다 정말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가성비 좋았다. 한 송이가 피면 오래 가고, 다른 꽃몽우리가 계속 올라왔다.


아네모네의 한 종류인 갈릴리 화이트. 2021. 3. 촬영(크아, 다시 봐도 이 꽃을 내가 피웠다니...)


작년에 아네모네를 처음 사들일 때는 화분이었다. 아네모네를 구근으로 사다 심을 생각은 못하고, 겨울 다 지날 무렵 화분에 심긴 아네모네를 집에 들였다. 구근이나 씨앗부터 심어 식물을 키운다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다. 이렇게 싹을 올리는 게 힘들 줄 몰랐다. 구근이나 씨앗부터 식물을 키운다는 건, 정신건강을 네모지게 만든다. (난 사실 정신건강에 도움되는 면이 있어 식물을 기르는 건데!)


아네모네도 튤립이랑 비슷하게 심어두면 춥거나 말거나 싹이 적당히 올라올 줄 알았다. 생각보다 발아온도가 높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10월 말에 심어두고, 11월 초에 갑자기 추워졌는데도 눈치를 못 챘다. 식물 키우는 사람은 온도에 더 세심해야 하는건데!


영하까지는 아니라도 영하 간당간당하게 추운 날씨에 창문을 활짝 열어둔 베란다에다 버젓이 심어두었다. 물에 하루 정도를 불려서 흙에 심었는데, 발아는 3주가 다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 사이 몇 번을 흙 속을 파봤는지 모른다. 내가 온도 관리를 잘못했는지 구근 자체가 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파보니 하나는 짓물러 속부터 썩었고, 다른 두 개는 바짝 말라 있었다. 다시 물에 불렸다 심어도 봤는데 소용이 없었다. 하나에 2천 원이 넘는 아네모네 구근 세 개를 눈 뜨고 저 세상으로 보냈다.

 

작년에 핀 갈릴리 화이트가 눈 앞에 아른거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서 똑같은 아네모네 구근 세 개를 더 사다 심었다. 아래위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체크했다. 뾰족한 부분이 아래로 가게. 


이번에는 발아 온도 5 ~ 10도 사이로 세심하게 관리했다. 역시 온도가 문제였나 보다. 역시 사람은 실수에서 배운다. 2주 정도 되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싹이 하나둘씩 올라왔다.


이 화분은 아네모네 구근 두 개를 심었는데 이제는 잎이 제법 무성하다. 제일 먼저 싹이 올라왔는데, 햇빛이 부족했던지 조금 웃자란 것 같기도 하다. 자꾸 픽픽 쓰러져서 지지대까지 세워줬다.


다른 세 녀석 다 조건은 같았는데, 싹이 제일 먼저 올라왔다는 것 빼고는. 키가 원래 이 정도 자라는지, 사실 올해가 아네모네 첫 해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작년에 화분 상태로 샀던 친구는 이 정도로 잎사귀가 길어나오지는 않았었는데… 역시 화원에서 잘 키웠던 건가?



아네모네 잎사귀가 알을 깨고 나온다. 

아네모네 구근은 팽이처럼 작지만, 겉은 딱딱하다. 손톱으로 치면 딱딱한 나무 껍질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구근의 나무껍질 사이로 어디가 연한 노란 고름 같은 싹이 슬며시 삐져나온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들여다 보면, 그 노란 싹이 불쑥 올라와있다. 그게 잎이 되기도, 꽃망울이 되기도 한다.  


아기 손바닥 처럼 웅크린 아네모네 잎새


신상 잎사귀는 아기 발바닥 같이 꼼지락하다. 

한껏 말려 있는 잎사귀 틈새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본다. 아기들이 손바락을 꼭 움켜쥐고 있는 거랑 아네모네 잎사귀가 꽁꽁 말려 있는 건 같은 이유일까? 아네모네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본다. 아기 손바닥보다는 까슬하면서도 어린잎의 보드라움이 그대로다.



식물을 기르면서 늘 생각한다.

작은 팽이 같은 구근 속 어디에 무성한 잎이 있고 꽃이 있었을까.


구근 단계 또는 씨앗 단계에서부터 키우기 시작해보면, 어느 정도 자란 성체 상태의 화분은 사고 싶어지지 않는다. 너무 신비롭기 때문에… 구근이 식물이 되는 과정을 곁에 두고 보는 걸 포기할 수 없다.

비록 구근에서 싹이 날 때까지 내 정신건강이 흔들릴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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