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심은 시금치 씨앗이 나무가 되어 가고 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내 새끼 손가락 만한 굵기로 자라고 있다. (거짓말 너무 많이 보탰다.)
내 베란다 텃밭 작물 대부분은 웃자라서 키가 삐쭉하게 커지는데, 이 녀석도 다르지 않다. 보통 시금치는, 마트에서 파는 보통 시금치는 굵은 잎사귀들이 얌전하게 모여 있거나, 섬초 종류라면 땅에 납작하게 붙어 자라니까 옆으로 딱 벌어진 채로 있다. 하지만 내 시금치들은 굵어지기보다는 길어지고, 옆으로 붙어자라기 보다는 우로 우로 올라간다.
베란다에서 채소 씨앗을 키워보면 아무리 키워도 잎사귀가 여리다. 가슴이 조금 봉긋해지고 있지만 얼굴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사춘기 소녀 같달까. 얼굴에 화장품도 바르고 옷도 어른 처럼 입어서 멀리서 보면 다 큰 여자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결국 어린 아이 티가 남아 있는 그런 사춘기 소녀. 그렇게 비교해보면 마트에서 파는 식물의 잎사귀는 어딘가 막 우람한, 상남자 같달까. 평생 흙을 만지면서 마디가 굵은 씩씩한 농부의 손가락 같다.
채소 씨앗을 심어 키워 보는 건, 보는 재미 뿐만 아니라 여린 잎사귀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좋다. 먹는 시기를 내가 결정하기 때문에 여린 잎사귀일 때 뽑아 먹어버려서 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시금치는 한 번 내버려둬 보았다.
먹는 시기를 놓친 핑계이기는 한데... 그 뒤 언제라도 이 친구는 잡아 먹힐 준비는 항상 되었었겠지만, 키우다 보면 어쩐지 정이 들어서 쏙 뽑아 먹어 버리기 곤란할 때가 있다. 이 시금치 친구가 그렇다.
이쯤되니 더더욱 그냥 뽑아 먹기가 곤란스럽다. 뭔가 성체에서 풍기는 함부로 할 수 없는 느낌이 있다. 더 이상 어리지 않다는 듯, 짙은 녹색의 컬러감이 풍만하고 웅장하다. 바다로 비교하면, 가깝고 얕아 속이 다 보이는 에메랄드 빛 바다와는 다른, 먼 바다에 나가 검푸른 빛깔의 끝모를 깊이를 바라볼 때 같다고 할까.
가장 꼭대기 층에서는 일어나는 일이 특히 상당히 흥미롭다. 새끼 시금치들이 뿜뿜 뿜어져 나오고 있다. (뭐, 사실 곁순이지, 곁순.)
하얀 분이 뽀얗게 올라온다. (이건 벌레가 아니다. ) 이렇게 분이 가득 올라올 정도로 오래 키운 적이 없었는데, 다닥다닥하게 올라오는 이 곁순들이 다 자라면 정말 나무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시 가지를 만들고 그 가지가 또 가지를 만들고...
초록색을 띠던 식물 가지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진짜 나무처럼 갈색으로 바뀌는 걸 목질화라고 한다. 시금치 줄기도 목질화 될 수가 있을까? 지금 세 달 정도 길렀으니 몇 달 더 키우면 될지도... 목질화되면 점점 식재료랑은 거리가 멀어지겠군.
반려시금치나무?
식물에게도 사람 같은 사춘기가 있을까?
그렇다면 이 아이는 지금 사춘기를 지나 성체가 되어 가고 있는걸까? 어딘가 이글이글 사춘기의 열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성체가 가진 위풍당당함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마트에서 파는 시금치 입장에서는 전혀 알지 못할 경험이겠지.
마트 시금치의 성장기는 시금치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니까. 내 시금치는 시금치 스스로 결정하도록. (사실 니가 결정하잖아! 어이없어 하는 반려시금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