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고시촌에서 20대의 황금기를 보냈다. 스물네 살부터 스물일곱 살 무렵, 3년 반 정도.
1차 시험 준비를 할 때는 신림동 고시원에 살면서 서울대 도서관에 다녔다. 서울대 캠퍼스는 사방에 큰 나무와 우거진 숲이 있고, 공부하다 고개만 들어도 통창에 펼쳐져 있는 초록이 눈을 쉬게 해 줬다.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만 걸어도 스트레스가 풀렸다.
1차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는 진짜 신림동 고시인 생활을 했다. 고시원에서 5분 거리에 독서실을 잡고 거기로 출근했다. 가로 세로 1미터 정도의 벽으로 둘러싸인 독서실 책상은 적응하기 너무 힘들었다. 서울대 도서관에서는 공부하다 고개만 들어도 숲이 펼쳐졌는데, 독서실은 고개를 들면 형광등, 서랍장, 책상 나무벽. 그것뿐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독서실, 독서실과 가까운 학원. 집-학원-독서실. 그렇게 돌고도는 게 일상이었다. 서울대 캠퍼스는 잠시나마 숲을 산책할 수 있었는데, 신림동은 유령처럼 떠다니는 고시생들만 있는 골목골목이 다닥다닥.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래를 위해서, 합격이라는 확신을 위해서 하루하루 열심히 했지만, 불안한 날이 많았다. 아니, 늘 불안했다.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당연히 주어지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합격만 시켜준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최대한 감정을 무디게 만드려고 애썼다. 슬픈 일이 있어도 슬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고, 기쁜 일이 생겨도 기쁨을 만끽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반나절은 꼭 쉬었다. 일요일 아침 늦잠 후에 관악산 등산을 하거나 서울대 캠퍼스에 산책을 다녀오는 쉬는 시간은 꼭 만들었다. 그렇게 산책하다 보이는 벚꽃가지 하나를 꺾어다 책상에 꽂아둔다. 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이라도 식물을 곁에 두는 건 작은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