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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May 15. 2023

"Stay seated. Win."

직업으로서의 변호사 (3)

주변 분들이 많이들 물어보십니다. 자녀가 변호사가 되고 싶어 하는데, 자질이 있겠느냐? 혹은 어떤 변호사가 좋은 변호사냐? 어떻게 하면 좋은 변호사를 찾을 수 있나?


저로서는 생각이 많아지게 만드는 질문들입니다.

오늘은 이 영화 속 닮고 싶은 변호사 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면서 그 질문들 중 하나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려 합니다.



나는 부정한다, 감독 믹 잭슨, 출연 레이첼 와이즈, 티모시 스폴, 톰 윌킨슨, 개봉(2017. 04. 26.)


영화의 배경은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빙에게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히틀러 광신도"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미국의 역사학자 데보라 립슈타트가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 싸워 이기는 실화입니다.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현재도 끊이지 않는 역사왜곡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 등 흥미로운 지점은 많았습니다.


특히 법정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말로 주고 받는 공격과 방어, 마치 쫓고 쫓기는 추격신 같이, 법리를 엎치락 뒤치락하고, 마지막까지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판사의 의미심장한 표정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흥미로웠던 건 변호사들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굳건한 변호사들이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


리차드 램튼(Richard Rampton)이라는 법정변호사(Barrister)입니다.(커피 만들어주는 Barista 아닙니다. 발음만 비슷해요)


실존 인물이고 1941년생으로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1965년 변호사가 되어 1987년 영국 왕실을 변호할 수 있는 자격, Queen's Counsel(QC)로 임명됩니다. 영화 속 소송이 1996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소송 당시에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던 변호사였습니다. (찰스 3세의 즉위로 QC는 KC=King's Counsel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변호사.


영국 셜록 시리즈에서 모리아티로 유명한 앤드류 스캇이 연기한 앤서니 쥴리어스(Anthony Julius) 사무변호사(Solicitor)입니다. 이 분도 실존인물이고 지금도 활동 중인 변호사예요.


Snnobish한 영국 변호사 제도에 관해서는 [직업으로서의 변호사 (2)]라는 글에서 설명 드렸었죠?


소송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데보라 립슈타트는 불의 앞에 참지 못하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아픔에는 한없이 공감하는 열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지만, 그래서 다소 다혈질에 욱, 하는 성미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녀의 그런 성품은 재판 과정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녀는 법정에서 데이비드 어빙의 작은 말 하나에도 일일이 반응하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법정에 세워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면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램튼 변호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한 표정입니다. 기분을 알 수가 없습니다. 희생자들을 법정에 세우지도 않고, 희생자들을 안타까워하지도 않습니다.



홀로코스트. 인류애를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분노할 일이지요.
하지만 변호사 리처드 램튼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인류애도 없는 냉혈한 같습니다. 데보라는 그것도 불만스럽고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하지만 변호사가 당사자와 함께 분노하고 그 분노를표출하는 게 재판에 도움이 될까요? 당사자의 마음에는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따뜻한 변호사라는 칭찬은 듣겠지요.


램튼 변호사는 홀로코스트의 독가스실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버럭합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이 독가스 살인은 없었다고 조작된 과학 보고서를 발간했다는 말에,

"50년 동안 그 잘난 과학자들은 뭘 했답니까?"라고 소리 칩니다.


램튼 변호사는 영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에게 분노한 걸까요?

아닙니다.


화를 내는 램튼 변호사에게 데보라 교수는 오히려 화를 버럭 냅니다. 경건하게 행동해달라고요. 램튼이 경건함도 모르는, 인류애도 없는 인간일까요?  아니죠.


홀로코스트가 있었다는
과학적, 객관적 증거를
수집해두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겁니다.

그것만 있다면 소송에서 이기는 건 훨씬 쉬워지거든요. (저도 종종 그 흔한 계약서 한 장 쓰지 않고, 그 흔한 녹음 한 번 하지 않고 사기를 당했다고 오는 의뢰인들을 보면 사실 화가 납니다.)


램튼은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이 가스실 벽 콘크리트 조각을 뜯어가 증거를 조작하는 보고서를 만들어내는 동안 왜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없냐는 데에 화가 난 겁니다.


그 수많은 희생자들의 진술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구요?


인간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고 옅어지고 다른 기억들과 섞이고, 그래서 조작되고 모순됩니다. 한 사람의 말도 시간이 흐르고 반복되다 보면 조금씩 달라집니다. 똑같은 시간대에 똑같은 상황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람들의 말도 보는 시각에 따라 다 조금씩 다릅니다.


여리디 여린 인간의 기억을 믿고 이 중요한 소송에 뛰어들라고요? (노우노우 저는 싫습니다.)


램튼 변호사는 자신의 일에 철저한 사람입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당사자의 일이고, 그 분노에서 한 발 떨어져서 소송에서 이기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변호사의 일입니다.


쥴리어스 변호사는 희생자들을 법정에 세우면 소송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보라에게 너무도 냉정하게 말합니다.


소송과 재판은 심리치료가 아닙니다.
법정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쏟아내는 곳이 아니예요.
아픔을 겪으신 건 이해해요.
하지만 악몽을 겪은 그 분들에게
감정적 만족을 주는 건 내 일이 아니예요.


데보라 교수는 재판이 진행되어 가면서 변호사들의 진심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이기는 걸로 흐름이 넘어왔거든요)


재판에서 데이비드 어빙을 증인신문하는동안 램튼 변호사는 단 한 번도 어빙과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보통 증인신문은 증인과 문답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증인을 바라볼 수 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램튼 변호사는 시종일관 "난 너 같은 사람의 말에는 관심 없다. 너는 나의, 우리의 관심은 한 스푼도 받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철저히 논리에만 충실하게 변론합니다.


데보라 교수는 마지막 고집을 피웁니다. 자신도 증언대에 세워 달라고요.



램튼 변호사는 이것도 거절합니다. 증언대에 오른 데보라 교수를 데이비드 어빙도 증인신문할 수 있게 됩니다. 어빙에게 먹이를 던져 주는 꼴이지요. 데보라는 이미 공개된 강의실에서 어빙에게 놀림을 당한 일이 있고, 어빙의 교묘하고 조롱섞인 표현에 감정이 앞선 데보라가 말려들 가능성이 컸지요.


나의 목소리와 양심을 따르며 살아 왔는데 나의 양심을 어떻게 남에게 맡기냐는 데보라에게, 램튼은 단호하지만 고요한 말로 설득합니다.



"양심이란 건 이상한 존재지요.
하지만 최선으로 느껴지는 게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낳진 않아요.
악마를 노려보면서 감정을 쏟아내면 마음도 편하고 만족스러울 거예요.
그리고 패배를 각오해야 하죠.
혼자만의 패배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영원한 패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데보라에게 램튼은 마지막으로 묵직하게 말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이기세요(Stay seated. Button your lip. And Win.)."



"혼자만의 패배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영원한 패배"라는 말을 할 때 램튼의 눈에 약간 두려움이 서려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제가 너무 감정이입한 것인지 모르지만, 저 말을 하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변호사의 자질이라 생각합니다. 내 의뢰인의 패배가 나의 패배처럼 두려운 것.


소송을 해보면 이기고 싶습니다. 이긴다는 건 결국 내 의뢰인의 승리지만, 나의 승리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기려고 하면 할수록 사건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기려고 의뢰인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는 곤란하더군요. 전략적인 사고가 마비되는 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을 놓치는 수가 있지요.


여러분은 맛은 없지만 친절한 식당 vs 맛있지만 불친절한 식당 중 어디를 가실건가요? 게다가 다음 끼니가 곧 돌아오는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일생일대의 소송을 맡길 변호사라면?

마음에 위로는 주지만 소송에서는 지는 변호사 vs 냉정하고 무뚝뚝하지만 소송에서 확실히 이겨버리는 변호사 중 누구를 다시 찾으실 건가요?


어떤가요? 변호사라는 직업, 참 매력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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