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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May 28. 2023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

지난번에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졌어요.



이번에는 배심원들이 이 소년에게 무죄를 평결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가득하니, 스포일러가 정말 싫으신 영화 보실 분은 이번 글은 스킵하세요) 


18세 소년이 아버지를 자신이 소지하던 칼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년이 범행을 저지르는 밤 12:10경에 창문 밖에서 소년이 칼로 아버지를 찌르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증인 A 있고, 소년이 “죽일 거야”라고 말하고 살해 후 건물을 뛰쳐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아래층에 사는 증인 B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찌른 칼은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소년은 그 시간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으며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부인합니다. 



한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조그마한 방에 12명의 배심원들이 둘러앉았습니다. 

배심원 1명을 제외하고는 11명 모두 강력한 유죄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죄를 주장하는 배심원들은 
검사가 이미 충분한 유죄의 증거(unsakable testimony)를 제출했고,
그 증거만으로도 소년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합니다. 


어떤 증거가 있을까요? 

영화에서는 검사가 증거를 보여주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배심원들의 대화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두 명의 증인이 있습니다. 


1. 목격자 여자 A 

소년의 집 맞은편에 사는 40대 중반의 여자로, 잠을 자다 깨서 전철이 지나가는 순간 전철 창문을 통해 소년이 아버지를 칼로 찌르는 모습을 보았다. 


2. 아래층 노인 B 

노인이 침실에 있을 때 소년의 집에서 “죽여버릴 거야”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무언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뛰어나가 문을 열어보니 소년이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소년에게 불리한 정황도 여럿 있습니다. 


3. 아버지를 찌른 칼이 소년의 것이다

소년이 흔치 않은 문양이 그려진 잭나이프를 샀고, 친구들이 소년의 것임을 보았다. 


4. 소년의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는다

소년은 20:30경 아버지와 다투고 집을 나가 친구들을 만나 놀다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새벽 3:00경 집에 돌아왔다고 주장하지만, 영화 제목이나 내용, 출연 배우 등을 기억하지 못하고 함께 영화를 본 사람도 없다. 


5. 소년은 소년범죄까지 포함하면 전과 5범이다. 

범죄도 저지른 적 있으며, 가난과 싸움으로 얼룩진 빈민가에서 어머니 없이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맞고 자랐고, 그날도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 



어떤가요? 
소년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확신이 드시나요? 


범죄에 대해 유죄 판단을 하기 전에 우선 사실 인정을 해야겠지요? 

피고인이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심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 유죄의 심증은 “합리적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형사소송법
제307조(증거재판주의) ①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②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은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에서만 쓰는 말이 아닙니다. 

미국 형사소송법에서 증명의 정도는 “beyond a reasonable doubt”를 충족할 정도여야 하고, 이 정도는 적어도 98% 또는 99% 정도여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형사소송에서도 심증 형성은 90% 이상의 증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소년의 무죄를 주장했던 한 사람은 증명에 관한 매우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유죄인지 무죄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유죄를 주장하며 빨리 평결을 끝내기를 바라는 나머지 11명이 이 한 명을 집단 공격하는 상황에서도 “유죄인지 무죄인지 잘 모르겠다.”라고 일관되게 말합니다. 


이상하죠? 이게 왜 의미 있는 말이라는 건지?


유죄인지 무죄인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말. 매우 정확하고 솔직한 말입니다.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은커녕 의심이 많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요배심원들 입장에서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다는 말이기도 해요. 


하지만 이들은 공격과 방어를 통해 증거 하나하나가 합리적인지 논증해나갑니다. 

그 논증의 과정을 한 번 살펴보지요. 



1. 목격자 여자 A는 잠을 자다 깨서 전철이 지나가는 순간 전철 창문을 통해 소년이 아버지를 칼로 찌르는 모습을 보았다. 


-> 사망 시각은 12시 10분경 야간이고, 전철 6량이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시간은 10초 정도 소요되고, 여자가 전철 창문을 통해 찌르는 모습을 본 것은 10초 남짓이다. 

-> 여자는 증언 내내 눈 주위를 눌렀고, 코에는 안경 자국이 있었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지만 옷과 스타일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려고 애썼다. 안경을 평소 착용하지만 법정에서 미용목적으로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 보통 잠잘 때는 안경을 끼지 않는다. 여자는 잠자다 일어나 소년이 찌르는 모습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여자가 보았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자의 진술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2. 아래층 노인 B는 침실에 있을 때 소년의 집에서 “죽여버릴 거야”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무언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뛰어나가 문을 열어보니 소년이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 (비슷한 연령대의 노인인 배심원이) 노인의 나이가 되면 소외감이 커지고 게다가 증언대로 나올 때 절뚝거리는 다리는 감추려 애쓰는 것으로 보아 관심받기 위한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 죽여버릴 거라는 소리는 죽이겠다는 고의 표현이 아니라 화가 났다는 표현일 수 있다. 경험적으로 진짜 죽이려 했다면 동네방네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 철길 옆에 산다면 전철이 지나갈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음이 크다. 목격자 A의 진술을 고려하면, 전철이 지나갈 때 아버지를 칼로 찔렀으므로 칼로 찌르기 직전 “죽여버릴 거야”라는 소리를 노인이 들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 사람이 쿵 하고 쓰러진 15초 만에 다리를 절뚝거리는 노인이 침실에서 거실까지 뛰쳐나가 소년이 도망가는 모습을 봤다는 것은 불가능이 가깝다


(무죄를 주장하는 건축가인 배심원이 아파트 도면의 거리를 측정해서 다리를 절면서 시간을 측정해 보는 장면도 등장) 

그러므로 노인의 진술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3. 아버지를 찌른 칼이 소년의 것이다


-> 흔치 않은 문양이라고 했지만 무죄 주장하는 배심원은 소년 집 근처 전당포에서 6달러에 샀다. 

흔치 않은 칼이 아닐 수도 있고 칼로 소년의 아버지를 찌른 진짜 범인을 칼을 전당 포이 팔았을 수도 있다. 

-> 잭나이프를 잘 다루는 소년이고, 칼날을 엄지로 눌러서 꺼내는 타입의 칼이기 때문에 키 작은 소년이 17센티가 큰 아버지를 위에서 찌르기는 어렵다. 아래에서 위로 찌를 가능성이 크다. 


자상을 볼 때 그 칼을 사용해 아버지를 찌른 것은 소년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4. 소년의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는다

소년이 영화를 보았다고 하지만 영화 제목이나 내용, 출연 배우 등을 기억하지 못하고 함께 영화를 본 사람도 없다. 


-> 아버지 시체가 옆에 있는 상태에서 경찰에서 진술한 상황에서 너무 당황하면 기억 못 할 수 있다. 영화 속 한 배심원도 아내와 어제 영화를 보았다고 했지만 영화 속 배우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도 종종 낮에 먹은 음식도 잘 기억나지 않는 때가 있다. 


영화 제목이 기억 안 난다는 것만으로 소년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5. 소년은 소년범죄까지 포함하면 전과 5범이다. 


-> 빈민가에서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자랐고 강도 전과도 있지만 이것이 아버지를 죽일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들의 논증이 어떤가요?  


법원은 증거를 받아들여 심증 형성에 사용할지는 증거를 상호 관련시켜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이 과정은 치밀하고 모순 없는 논증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형사재판에 있어 심증 형성은 반드시 직접증거에 의하여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간접증거에 의할 수도 있는 것이며, 간접증거는 이를 개별적·고립적으로 평가하여서는 아니 되고 모든 관점에서 빠짐없이 상호 관련시켜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치밀하고 모순 없는 논증을 거쳐야 한다.
대법원 2004. 6. 25. 선고 2004도 2221 판결



맞은편 목격자 A가 전철이 지나갈 때 살인 장면을 보았다는 진술과 아래층 노인 B가 죽여버릴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진술을 상호 관련시켜 평가해 보면, 전철이 지나가는 소음이 심한 상황에서 그런 소리를 듣기 힘들기 때문에 두 사람의 진술 모두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논증할 수 있습니다. 증거를 개별적, 고립적으로 평가하지 말고 상호 관련시켜 종합적으로 평가하라판례 문구는 바로 이런 의미이지요. 


법문이 늘 그렇듯 표현은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요즘 사건에 관한 기사 댓글 속 네티즌 수사대의 사실인정 능력을 고려해 보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에 사실인정이 좌우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선입견이나 편견은 일반인이나 법관 모두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 영화 속에서 유죄를 마지막까지 외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러한 논증을 머리로는 모두 이해했으면서도 이런 소년은 틀림없이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라고 말하지요. 알고 보니 외아들이 어린 시절 친구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 거친 남자로 길러 놓았더니, 16살에 아버지 얼굴을 치고 집을 나간 뒤 2년 동안 보지 못했다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에게 자신의 아들에 대한 복수심을 투영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실인정 능력은 합리적 인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일반인 배심원이나 법을 공부한 법관이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발견하기만 하면, 여기에서 벗어나 합리적 사고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사실인정능력 Quiz 

Hint : 나무 주변의 흙을 감싸고 있는 나무판자들을 모든 관점에서 상호 관련시켜 종합적으로 유심히 살펴보세요.


어느 카페 정원에 심겨 있는 나무 기둥입니다. 

카페가 문을 닫으면 나무도 퇴근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될 수 있을까요? 

어떤 증거로 증명될 수 있을까요? 











합리적 의심 없는 정도로 유죄의 심증을 형성하지 못했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무죄의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이때 그 유명한 법언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사실인정능력 Quiz의 정답은, 


카페가 문을 닫으면 나무도 퇴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저 노란 표시의 손잡이가 그 증거라고 합니다. 카페 주인은 문을 닫을 때 저 손잡이를 잡아당겨서 나무를 퇴근시킨다는 거죠. (점점 안드로메다로..?)


네. 저 주장은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된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정 안 됨. 









저 손잡이는 과거 어딘가에서 손잡이가 달린 채 사용되던 물건을 재활용하다 생긴 흔적일 뿐입니다.

 (나무가 퇴근하다니요?!? 경험칙에 부합하지 못하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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