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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Nov 06. 2021

내게 온 고통의 의미

나를 괴롭혀 온 모든 것들

자살 시도가 있고 중환자 실에 일주일, 그리고 병원에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입원해 있는 동안 날 보러 병원을 방문했던 사람들 중에 친정 가족은 오직 엄마뿐이었다.

친정아버진 내가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셨다. 엄마가 비밀에 부치셨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 사실을 나중에 전해 들은 나는 머지 가족들을 잊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미련과 집착은 내게 더 깊은 상처만 남길 거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됐던 거였다.


같이 살지 않는 가족들이나 서운하게 했던 친구들, 지인들은 잊으려고 마음먹으면 어 방법이든 찾을 수 있을 걸 안다. 

하지만 함께 살고 있으면서 마음이 멀리 있는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와 살았던 전 생애가 거진 대부분 외로움과 슬픔이었고 나로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그의 자기 방어와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을 견디며 보겠다 마음먹었을 때에도 섣불리 남편을 용서한다거나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품는 우를 범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내가 죽어있던 그 순간조차도 내게 온전히 집중해 주지 않았다.

나를 발견해 병원에 옮긴 것도, 중환자실에 누워 의식 없는 7일을 보내는 동안 눈물로 내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도했던 것도, 다시 눈을 떠 나를 놓아 버렸던  달간의 힘든 입원기간 동안 나를 지켰던 것도 딸뿐이었다.

남편은 함께 있었지만 함께가 아니었다.

딸이 엄마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도 했지만 아내를 잃을 뻔한 남편의 모습이 아니었다. 남편은 그저 아빠 역할, 남편 역할을 맡은 사람처럼 보였다. 필요한 걸 도와주고 채워주긴 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이 주도가 돼서 행동하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남편은 항상 그래 왔었다.

결혼 한 그 순간부터 그래 왔었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 물러서고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모두 내게 양보하며 중요한 일의 결정도 모두 내게 미뤄 주었다. 본인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면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으며 나나 아이에게 문제가 생겨도 그건 알아서 잘 해결할 거라 믿는 위인이었다. 혹여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모르지~! 당신이 다 알아서 했잖아?" 이런 말들을 주워 넘기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돈을 관리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내가 아무리 아팠어도 경제권을 가져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정리해 넘겨주려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두 번 다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힘든 일이 생기면 "난 번 돈 다 가져다줬는데 어쩌라고. 나는 모르지. 방법이 없어요."로 일관했다. 함께 나누면 부담은 반이 되고 행복은 배가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 같았다. 살면 살수록 남편의 의중을 알 수 없어져 가고 있었다.

 가정의 가장이 짊어져야 할 무게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저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참고 견뎌야 했던 지난 시간들이 내게 이런 고통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한 달간의 입원을 끝으로 퇴원을 한 후에도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먹은 대로 금세 몸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워낙 오랜 시간 통증에 젖어 있었고 여러 가지 병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보니 오히려 또 다른 문제가 덧 붙여졌다.


빨리 좋아져야 한다는 조급함이 더해져 버린 것이었다.

생각과 마음과 몸이 따로 놀기 시작했다.

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약물을 먹었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고, 길고 오래 남았다. 입원해 있던 기간 동안 Wash out을 하여 몸 안의 남은 약물을 모두 씻어내기는 했다. 하지만 의식 없이 누워있던 일주일간에 생긴 몸의 변화와 한 달간 다시 통증과 기절이 심해지며 반복적으로 사용한 모르핀과 마약 진통제, 수면제의 영향으로 고통에 취약해져 있었다. 


죽어야겠다는 극단의 우울과 다시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뭉친 희망이 함께 격돌하는 마음은 하루하루가 절벽 위의 줄타기 같았다.

매일매일이 전쟁 같았다.

해리성 기억 상실은 더더욱 심해져 어제와 몇 년 전의 일을 혼동하고 있었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나였지만 지금의 나를 기억 못 하는 예전의 내(2018년의 나 혹은 2017년의 나)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했다.(해리성 격장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일어나 있는 시간도 길지 못했다. 오로지 약으로 만 견디고 버텼다.

나아지는 것은 고사하고 점점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내가 애쓰며 살아온 내 삶이 너무 안타까웠다. 날 위해 애써준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내 딸과 다른 모든 사람들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태껏 배려하고 베풀고 나누고 사랑을 주기만 하던 나도 사랑받으며 살던 나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한 번쯤은 죽을힘을 다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삶이, 운명이, 사람이 내게 어떤 고통을 안겨주던지 간에  예전의 나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한번 이름값을 하며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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