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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Feb 14. 2022

판피린과 작별했다

지금은 아직 금단현상에 휘둘리고 있지만

지금부터 34년 전인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두통이 시작되었다. 그때  지긋지긋한 두통을 빠르게 가라앉힐 수 있는 약은 내가 아는 한 판피린뿐이었다. 감기약이었지만 알약을 먹으면 위경련이 잦았던 내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집엔 항상 판피린이 있었다. 자주 집에 오시던 친할머니도 엄마도 머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판피린을 찾아드시곤 하셨다. 내가 판피린을 자주 먹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엄마는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건지 책가방이 끌고 다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비쩍 마르고 약한 나를 1월생으로 태어나 이른 나이를 먹는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학교 보내셨다. (학교를 일찍 보낸 이유 유치원을 보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 일거예요. 오빠는 유치원을 다녔고 저는 안 다녔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릴 땐  평범하고 보통인 그저 아껴 써야 되는, 아버지 혼자 외벌이 하시는 평범한 집이었거든요) 

7살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던 난 상 마르고 허약한 아이였덩치 큰 아이들 틈에서 지지 않으 노력했다. 그래도 반에서 언제나 부반장은 놓치지 않을 만큼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그래야 사랑받을 거라 믿는 둘째 딸이었습니다. 오빠는 첫째고 아들이라 사랑받고 동생은 막내라 예뻐하시고 저는 뭐든지 열심히 잘해야 했었어요) 그래서였든 아니든 아버진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악바리 같은 나를 많이 예뻐하셨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하지만 더 아픈 손가락, 덜 아픈 손가락 반드시 있고 만약 본인이 깨물어야 한다면 더 이쁜 손가락은 무는 힘을 덜 주겠지.

어떻게 하면 더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느라 난 이미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하며 살았다. 그리고 내 두통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져 버렸다.


입시가 가까워질 무렵엔 판피린을 먹지 않으면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고 미리 먹어두지 않았을 때 나중에 훨씬 많이 아플 것 같은 생각에 그다지 심하게 머리가 아프지 않아도 판피린을 먹는 습관이 해졌다.


판피린을 적혀있는 용량대로 먹으라고 어느 약국에서 권하지는 않다. 하지만 먹는 양이 늘어날수록 가급적이면 줄이라는 말 기도 했었다.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독한 약을 먹는 것도 아니고 어에서나 25병 들이 큰 box를 사는 것을 거절하거나 제지하는 약국은 없었다. 그리고 판피린만큼 빠르게 듣는다고 생각되는 두통약이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도 오랫동안 복용을 지속해 나갔었다.


은행을 다닐 무렵에는 많이 먹는 날은 하루에 4~5병을 마시는 날도 생기기 시작했다.

편을 가르며 모이고 다니며 주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도 하나, 둘씩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진심으로 내 건강을 염려해 주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은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힘든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평생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를 아끼는 사람들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도 내가 판피린을 사 오는 것, 마시는 것, 버리는 것 모두를 알아내지 못했고 막아낼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중독의 단계를 한참 지나 있을 때였다. 하지만 그래도 잔소리하고 화를 내며 감시하챙겨주려 노력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남편은 재활용품을 버릴 때마다 판피린을 먹고 버린 병을 얘기

"이거 버릴 때 M16탄피 모아서 버릴 때 같은 소리가 나."

라는 말 외에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이거 이렇게 먹으면 절대 안 돼. 신경과에 가서 제대로 검사하자"

남편은 한 번도 내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정작 약을 파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던 남편에겐 단 한 번도 들어볼 수 없는 말이었다.

남들에게 넘치도록 받는 관심을 정작 받고 싶었던 남편에게선 받을 수 없었다.

어쩌다 남편이 조금 못난 짓을 한다 해도 평소에 남편으로부터 내가 아낌 받고 있다는 생각 하고 있었다면 나 스스로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아 극단적인 외로움과 슬픔에 휘둘려 이렇듯 많은 병과 깊은 우울증에 잠 살진 않았을 텐데.


그렇게 두통과 판피린의 굴레에 매여 안 먹을 수도, 계속 먹을 수도 없는 상황에 지쳐갈 무렵 균성 뇌수막염 걸려 생사를 오가게 됐다.

딸이 초등학생이 되던 해였다.

세균성 뇌수막염으로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고 입원기간 동안 판피린을 안 먹게 되면서 2~3년간 판피린을 끊은 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지 않는 두통은 다시 판피린을 찾게 만들었고 중독성이 강한 피린계의 중독은  2년이 넘도록 매일 먹던 술을 끊던 나의 의지로도 4년 동안 의지하던 담배를 끊어내던 나의 독함으로도 끊어내지 못한 채 지지부진 34년을 끌어 오고 있었다.




1년 반이 넘는 심한 구토와 식이장애, 어지러움, 구역, 복시, 시야 흐림...

심각한 증세로 두통 치료를 시작한 후에도 판피린을 포기하지 못했다.

오히려 CRPS 때문에 높아진 통증지수로 인해 판피린의 복용 횟수는 더욱 늘어갔고 피린계 중독의 특징인 판피린이 먹고 싶어 생겨나는 통증의 횟수까지 점점 늘어났다.

거기에 판피린 맛 특유의 들큼한 맛으로 인해 구역, 구토가 더욱 심해져 식이장애가 겹치며 통증 만으로도 버거운 삶에 살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 한 가지를 더 보태는 형국이었다.


지난 12월 중순부터 지금까지(아마 이달 말이나 3월 초쯤이면 괜찮아 질거라 믿습니다)

내가 태어나 아픈 이래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사고가 나고 내가 가장 올바른 정신으로 그 이후의 삶을 맞닥뜨리는 중이었다.

매일이 눈물이었고 지난 아픔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비록 가슴이 메어지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내년은 올해보다 나을 것을 믿는다.


그리고 한 가지더, 이 힘든 기간 동안 난 한 가지를 더 해냈다.

아직까진 금단증상에 시달리고  있지만 판피린을 끊었다. 어떤 도움도 없이.

난 끝까지 해낼 것이다. 드시.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나 자체로 소중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안녕이다.판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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