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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May 03. 2024

싫어하던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버린 남편

씨도둑은 못한다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멀리 찾아보고 생각할 것도 없다. 남편은 시아버지를 꼭 빼닮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몹시 미워했다.

시아버진 가정에 충실하지 않아 어머니 살아계신 평생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고 자신만 챙기고 꾸미고 다니며 생활비 역시 제대로 해결해 주지 않었다. 남편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는데 그런 어머니를 두고 밥 먹듯 바람을 피워대는 아버지를 좋아할 수 있는 자식이 있기는 할까? 게다가 자라는 동안 남편을 보기만 하면 잔소리를 지나치게 하는 바람에 남편과의 사이 또한 최악의 상태였다. 하지만 미워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하여간 옛말 틀리는  없다. 

남편은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던 아버지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강단과 의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외도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걸 억지로 참아 내던 내게 결국 병이 생기고 말았다.

깊은 우울증과 급성 갑상선 항진증, 그리고 부정맥을 앓게 됐고 갑상선 항진증은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을 만큼 진을 빼놓기 일상이었다.

어느 날 일어날 수 조차 없을 만큼 아프고 지쳐 끼니를 제때 챙기지도 못하고 있는 나를 찾아온 시아버지가 내게

너 아프다고 그렇게 매일 누워 있으면 ㅂㅂ이 다시 바람난다. 맨날 아프다고 하는 와이프를 누가 좋아하겠니?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라. ㅂ이 다시 바람나는 건 네 탓이다!

나를 위로하러 병문안을 오신 건지 더 열받아서 화병으로 죽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 아들의 외도로 병이 난 며느리에게 막말을 퍼부어 대는 분이 시아버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눈치만 보던 남편이 시아버지의 망발에 펄쩍 뛰면서 차라리 집에 찾아오지 마시라고 한바탕 싸움이 났다.


내가 결혼하고 몇 년 동안 해마다 어버이날이 되면 친정아버지께서는 우리 삼 남매의 사돈들을 모시고 좋은 음식점을 예약해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만드셨다. 사돈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과 자식을 서로 나눴으니 조금의 실수나 부족함은 서로 덮고 이해하며 살았으면 하는 의미로 만드시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 모임을 마지막이 되게 만든 계기가 시아버지였다.

(사실  남편이 외도를 했다는 얘기를 가족 중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 거라면 굳이 남편의 허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요) 

마지막 식사가 됐던 그날은 이미 남편의 외도로 내가 병이 나서 진료를 보러 니고 있던 때였다.

편안한 분위기로 식사가 끝나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시아버지가 생뚱맞게 친정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돈어른! 나루는 집에 가서 야단 좀 치셔야겠습니다. 제가 나루를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몹쓸 꾀를 쓰는 것 같아 요즘 좀 괘씸하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아! 아니 나루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잘못했으면 야단맞아야죠.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아니 제가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시골(성묘) 가자고 할 때마다 아프다고 꾀병 부리고 빠지고 집에도 자주 안 오고... 크게 한 번 야단쳤는데도 달라지지 않고 매번 지니랑 아범만 보내는 게...

갑자기 남편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자신의 외도로 병이난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가 내 병을 꾀병으로 몰며 인어른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일러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아버진 분란을 일으키려고 작정하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친정아버지도 가만히 듣고만 계시지는 않았다.

사돈어른,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조금 서운합니다. 나루가 아프지 않았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 병이 원래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엄청 힘든 병입니다. 안사람이 그 병으로 아파봐서 잘 압니다. 사돈께서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실제로 아이가 많이 아픈 겁니다. 열심히 살아 보겠다고 맞벌이하느라 고생하다 생긴 병인데 가족들이 도와줘도 시원찮을 마당에 그렇게 오해하시면 아이 마음에 상처 입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루가 제 자식 이서가 아니라 나루가 성격상 절대 꾀병 부리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 안 하는 그런 아이 아닙니다. 사돈께서 분명히 오해하시는 겁니다. 

생각보다 단호하게 나오는 친정아버지 말씀에 시아버지는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날 점심식사 이후로 친정으로 우리 식구들만 함께 모인 자리에서 친정아버진 몹시 언짢아하셨다. 

내 다시는 내 돈 내고 이런 언짢은 일 안 겪으련다. 내가 나루하고 그렇게 오래 한 직장 다녔어도 나루 칭찬하는 소리만 들어봤지 지나가는 소리에라도 허물 있다는  못 들어봤다. 그래도 내가 어디 가서 자랑 한번 안 하고 맘으로만 기특하다 생각하고 살았는데... 봉변도 이런 봉변이 어딨냐! ㅂㅂ이 본가에 가서 똑바로 얘기하고 행동해라.

남편은 두말도 못하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친정아버지는 다신 그런 식사자리를 만들지 않으셨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도 갓 결혼했을 땐 내 나이 또래의 아들을 두셨던 여느 시어머니들처럼 아들부심이 충만하신 분 이셨다. 하지만 당신 아들이 외도를 하고 그 이후로 내가 병들어 가며 힘들어하는 것을 지켜보시며 내게 더 할 수 없이 자애로운 분이 되어 주셨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빠른 시간 안에 이혼을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편은 내게 여러 가지 많은 상처들을 남겼다.


지니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무렵 시어머니께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시어머니가 간암말기 판정을 받았을 때 치료 없이는 3개월, 치료를 하면 6개월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부모님이 아프실 때 자녀가 부모님의 치료비를 대고 간병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능력이 되시거나 오랜 시간 투병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간병의 주도권은 당연히 그때까지 함께 한 남편이나 아내의 몫이 아닐까? 만약 가장이 쓰러져 배우자가 그 역할하기 힘든 경우라면 자녀 중에 한 사람이 주도가 되어 함께 그걸 감당하면 되는 거라 생각한다.(우리 집처럼 간병도 병원비도 다 해결 안 하는 남편 같은 경우도 반드시 있지만 말이에요)

어머님이 쓰러지시고 말기 판정을 받았을 때  시아버지는 우리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당신은 간병비만 댈 테니 치료비와 기타 병원비는 모두 너희가 내라고. 우리는 3,000만 원, 미국에 있던 큰 아주버니는 600만 원, 시아버지는 간병비 650만 원. 시아버진 정말 간병비 외엔 단돈 천원도 병원비에 사용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기운이 없으셔서 똑바로 앉기 어려워졌을 때 보조기를 맞추기로 하고 그 비용을 수납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수십 통의 전화를 해 결국엔 일하던 남편이 병원으로 달려가는 상황까지 만들게 하고 말았다. 시아버지가 먼저 결제하면 당연히 돌려 드렸을 것이고 그 업체의 계좌에 입금한다고 말해도 굳이 남편을 병원으로 불러 눈앞에서 결제하는 걸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를 간병하는 일보다 시아버지를 상대하는 일이 점점 더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이틀에 한 번씩 병원으로 퇴근주말을 내내 병원에서 지냈고 나는 3일에 한 번씩 어머니와 간병인 이모가 먹을 반찬을 해서 병원엘 다녔다. 그때 이미 첫 번째 희귀 난치병인 베체트를 앓고 있던 나 역시 병원에 다니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마지막을 앞두고 계신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그것보다 더 챙겨 드리지 못한 것 안타까울 뿐이었다.

시아버지는 매일 점심시간에 맞춰 병원에 와서 식사를 하셨다. 수시로 담배를 피우고는 냄새조차 날리지 않고 병실로 들어와 (人내)가 섞인 고약한 담배 악취와 함께, 주일마다 내연녀와 등산을 다녀온 얘기를 (어디 꽃이 좋네, 어디 바람이 좋네) 곁들여 어머니에게 독을 뿜어 댔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가슴을 뜯으며 울었다. 잔치라도 난 거처럼 큰 소리로 웃어대며  당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손녀인 지니에게 술을 따르라고 시키는 시부를 바라보며 가슴속에서 천불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아버지가 벌이는 기가 막히고 뻔뻔한 짓들을 더 이상 보지 않으셔도 된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남편과 이런 진흙탕 싸움을 하게 된 것을 보여 드리지 않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면 꼭 사드릴 것이다.

끝까지 함께 데리고 살 거라고 약속한 것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시아버진 드러내놓고 여자가 있다는 것을 티 내기 시작했다. 삼칠일에 어머니를 모신 납골당을 다녀오는 길에 빨리 오라는 재촉 전화가 다섯 통이나 걸려 왔다. 전화기 바깥으로 큰 소리로 흘러나오는 여자의 목소리를 손녀가 듣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이 팔순 되던 때에 여자와 함께 살겠다고 통보하시곤 그것에 학을 뗀 남편이 시가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는 대로 하던 내게 시아버진 모든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20년 가까이 투병하며 수 십 번을 입원하는 동안 어쩌다 병원에 오게 되더라도 단 한 번도 내게 눈을 맞추지 않았고, 괜찮냐는 소리는 더더욱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큰 아주버니 역시 마찬 가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5년이나 더 지나서야 한국에 들어는데 그때 마침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남편이 마중을 나갔다 모두 병원으로 왔는데 시아버진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내겐 단 한마디도 없이 다리가 아프다며 휴게실로 나가 버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던 시아주버니는

아유. 제수씨... 고생이 많아요. ㅂㅂ이가 힘들겠네. 아이고 나는 ㅂㅂ가 왜 이렀게 안쓰럽지. 나는 ㅂㅂ가 제일 안쓰럽네.

하! 어쩌라고. 그때 그렇게 입원실에 누워있게 만든 당사자가 당신 동생인데. 나는 내가 제일 안쓰럽다. 내 딸 지니가 훨씬 더 안쓰러웠다.




얼마 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생을 장인어른의 도움으로 살던 남편은 내게 유산에 눈독 들이지 말라고 말했다. 시부 재산중에 남은 거라곤 어머니 돌아가신 후에 우린 구경도 못하고 시아버지가 모두 팔아버린 유품과 예금, 그리고 그것과 살던 집을 처분하여 구입한 아파트를 역모기지로 쓰다 남은 집뿐이다. 14년이 지났으니 얼마나 남았으려나... 사실혼으로 살던 여자도 있고.

유산의 유무에 대해 묻지도 않던 내게 유산에 눈독 들이지 말라는 남편의 말에 진심으로 빵 터졌다.( 살던 30년 동안 친정아버지에게 1n 억이 넘는 돈을 지원받으며 살았던 우리였습니다. 가증스럽고 뻔뻔한 남편의 태도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친정 부모님께선 아버지를 잃은 남편을 잘 위로해 주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남편은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시아버지를 쏙 빼닮은 남편은 삼칠일이 지나기도 전에 형과 함께 나란히 골프를 치러 갔다. 그 형제가 할만함직한 일이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자기 위로에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견디며 살았으니 내가 이렇게 망가져 버린 걸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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