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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Apr 26. 2024

남편은 어느 것 하나도 책임지려 한 적이 없었다

가장의 직무 유기

내가 그에게 특별히 큰 것을 바란 적이 있었던가?


내가 내세운 배우자로서의 가장 큰 조건은 화가 나면 불같이 무서워지는 친정아버지와는 다른 다정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침 내 옆에 있던 남편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다정다감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

딱히 결혼이 급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남편은 결혼을 서두르길 원했고 다정하고 배려심 많은 이 남자라면 내 한평생을 걸어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고 오판이었다.

한평생 나만 바라보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서로를 위하며 살자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남편은 나와의 약속 헌신짝만도 못 하게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남편에겐 결혼 그 자체만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속이려고 작정한 남편의 겉모습에 보기 좋게 넘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조급하게 결혼을 서두른 것 돌이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가 돼버렸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다.

내가 내 구덩이를 스스로 파고 들어앉은 미친년, 바로 내 탓이다.




한 가정을 이루는 데 가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가장은 가정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돈만 벌어 준다고 해서(돈이라도 잘 벌어다 주던가. 심지어 첫 번째 희귀 난치병을 앓기 시작하고도 한참 후까지 저는 맞벌이를 했습니다) 가장의 역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힘든 일이 생기든, 좋은 일이 생기든 가정의 주축이 되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 부족함을 메꾸며 함께 의지하고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게 있을까.


우리 가정의 경우 남편은 항상 말로만 가장의 역할을 다하겠다 큰소리쳤을 뿐 단 한 번도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허세 가득한 허울뿐인 가장 이었다.


결혼을 하고 전세를 살 때 전셋값을 올려줘야 되는 시기가 다가오면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와 친정아버지뿐이었다. 친정아버지에게

아버지, 필요한 돈 다 준비해 놓았으니까 걱정 마세요.

라고 말씀드려도 고생했을 내 생각에 강권하다시피 돈을 보내주셨다. 오히려 전세금을 올려줘야 하는 날짜, 계약서를 다시 써야 하는 이유, 필요한 돈을 준비해야 한다는 걱정과 염려는 남편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이렇게 책임감 없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니...

그러니 외도를 했던 여자의 뒤처리마저도 내게 부탁했던 걸게다. 내게 불륜을 들키고도 더 오랜 시간 동안 그 여자와 관계를 이어갔다.  고 있었지만 더 아는 체하고 싶지 않았다.(왜 그때 이혼하지 않았는지, 상간녀 소송이라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선 뒤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얘기하겠습니다) 몇 개월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 계속해서 매달리는 그 여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남편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여자를 정리해 주며 외도로 인해 떨어진 남편의 평판까지 신경 써야만 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깨닫고 더 가정에 충실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걸 달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남편이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반성은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히 여기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다.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못하고 의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난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외도로 인해 깊은 우울증과 부정맥을 시작으로 온갖 병에 시달리게 된 나를 단 하룻밤도 간병해 준 적 없는 사람이 남편이었다. 처음 시작된 병으로부터 20 여 가지의 병으로 늘어날 때까지 수시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마다 심지어 자살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조차도 남편은 단 하룻밤도 나를 간병한 적이 없었다. 입원비가 얼마가 나오는지, 병원비가 얼마가 필요한지 단 한 번 묻는 일이 없었다.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했고 아픈 딸이 걱정되신 친정에서 도와주셨다.

내가 자살사고를 내고 병원에 실려 갔을 때 딸이 전화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하니

아빠 지금 양재에서 회식 중인데 금방 끝날 거야. 끝나면 서둘러서 갈게.

아빠! 엄마가 죽는다고!!! 약을 얼마나 먹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라서 장담 못한대. 회식? 그 망할 놈의 회식 끝까지 있는 게 맞는 거야? 내 엄마가 죽는다고. 아빠 아내가 죽는다고. 아아아!!! 아빠는... 아빠는...

내가 실려갔던 병원은 일원동의 대형병원이었고 남편이 통화 후에 병원으로 온 시간은 그로부터 여섯 시간이 지난 새벽 2시였다. 술이 잔뜩 취한 채였다. 이미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 교구 목사님이 병원에 찾아와서 딸과 함께 기다리고 계셨다. 남보다 못한 인간이 내 남편이었다.

중환자 실에서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내가 나중에 물었다.

그때 어떤 마음으로 늦게 왔?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건 둘째치고 당신 딸이 놀라고 무서워서, 엄마를 잃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당신도 어머님 보내드렸으니까 그 마음 알잖아? 그런데 어떻게 ? 당신한테 이젠 자식도 중요하지 않아?

아니 난, 이미 병원에 가 있다고 하니까. 내가 간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리고 빨리 끝내자고 서둘러서 끝내고 간 거야. 그리고 차가 안 잡히기도 했고.

하... 양재에서 일원동까지 새벽 2시에 택시 타면 15분, 버스타도 20분이다. 그냥 남편은 내 생사 따위엔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이의 두렵고 애타는 마음도 자신이 알 바 아니었던 게다.

그래. 남편은 정말 딱 이런 인간이다.



아이가 MS(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날 내 세상은 무너졌다.

https://brunch.co.kr/@oska0109/215

아이가 검사를 위해 입원했을 때를 제외하곤 재발하는 순간마다 단 한 번도 병원에 함께 가줄 수가 없었다. 이미 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한쪽 시력이 없는 상태의 아이에게 통증과 실신을 밥 먹는 하는 나는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짐만 될 뿐이란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의 응급실 가는 길에 남편은 단 한 번도 동행해 준 적이 없었다. 다음날 일찍 출근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혼자 운전을 해 응급실에 가고 혼자 응급으로 입원을 했고 홀로 큰 병을 앓고 치료하는 모습을 보며 간호사 선생님들이 안쓰러워하며 많 도움을 줬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가슴에 피멍이 맺히고 목에 울음이 막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내가 두 번째 희귀 난치병인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을 앓게 되고 살던 곳에서 이사 나오던 날 남편이 했던 일 때문에 가족들이 내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불안과 공황, 해리장애와 기억상실등으로 모든 것들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시간이 길었다.

제대로 생각하고 정리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고통과 마음의 상처에 묻혀 잘잘못을 제대로 가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혼돈의 시간은 내게서 지나갔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명징해지기 시작했다.


내 삶과 인생을 망친 건 남편이다.

내가 쓰는 이 브런치 북의 모든 이야기는 그가 내게 했던 일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내릴 결정에 대한 증거로도 쓰이게 될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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