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집에 두 가장-이기적인 이서방

남편 같은 신랑감이요? No.no.no.no.~Nope!

by 강나루

결혼하고 처음 몇 달 동안은 집이 주는 고요함, 평안함, 그리고 안정감이 내가 상상하던 이상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친정에서 느끼던 불안한 감정이 없이 산다는 건 경이로운 느낌에 가까웠다.

직장 때문에 또 시댁에서 아이를 봐주실 수 없다는 얘기에 친정 가까이 집을 얻긴 했지만 둘 다 맞벌이를 하느라 자주 찾아갈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혹시 방문했을 때 집안 분위기가 험악? 해져 있는 상태인 경우엔 신발도 벗지 않고 돌아올 때도 있었다.(친정아버지가 좀 엄하셨어요)

그럴 땐 무슨 문제가 생겨 또 저러는가 싶다가도 도망쳐서 올 내 집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든든하고 다행이다 싶었고 그런 일들을 직접 보지 않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지난 상처들이 서서히 잊혀 가는 것 같아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 여기는 순간들이 점점 늘어갔다.


오히려 매일매일의 안부 전화도 모자라 매주 '보고 싶다'는 성화에 한주도 빼놓지 않고 가야 하는 시댁이 더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전화를 해도 특별히 할 말도 없어 중간에 말이 끊기면 어색함을 참지 못한 내가 중언부언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다 보면 하루 종일 은행에서 몇백 명의 손님과 실랑이를 하며 업무를 보고 오는 것보다 더한 피로감을 느끼고는 했었다.


할 수 없이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전화를 할 때마다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 내가 전화를 걸기 전에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철저하게 연습을 시켰어도 여전히 전화를 걸기만 하면 연습했던 내용은 싹 잊어버리고 엉뚱한 소리만 해대는 것이었다.

이번엔 작전을 바꿔 종이에 적어주고 읽기만 하라고 시켰는데 그 내용도 간신히 1/3 정도만 전달이 되었고 어찌어찌 시간이 흐르고 시댁이 장안동에서 일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 바람에 자연스레 시댁으로의 방문은 줄어들게 됐다.


*남편은 무엇이든 하나 부탁을 해도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면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생기거나 함께 의논해야 할 일이 생길 때, 또는 큰돈이 들어갈 일이 생겨 함께 의논이라도 할라치면 얘기를 듣고는 있지만 눈을 보면 언제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항상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에

"내 얘기를 듣고는 있는 거야? 이 일을 ××까지 해결해야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내가 지난번에 생각해 보라고 그랬잖아?"

라고 물어보면

"음.... 내가 천천히 생각해 볼게."

라고 대답하곤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얼굴을 한다.

그러면 다급해진 나는

"여보, 그냥 생각만 해 본다고 하면 어떡해. 미리 얘기했었잖아. 두 가지 정도 방법이 있다고. 진즉부터 천천히 생각할 시간 리 줬었는데.... 내가 음대로 할 수 있는 일 아니니까 내일까지 결정해서 알려줘."

라고 얘기하면

"알았어"

라고 대답은 막둥이 새끼처럼 잘해놓고 그다음엔 아무 얘기가 없다.

술 먹는다고 늦고 회식한다고 늦어 버린다.

그 일을 생각해 봤냐고 물어보면 바빠서 못했단다.

나는 놀고 있나? 나는 안 바쁜가? 나도 직장을 다니며 아이도 키우고 독박 육아에 독박 살림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우리 집 일인데 나 혼자 다 결정해야 하나? 그럴 거면 혼자 살지 결혼 왜 했냐!!!!" 이 개인 주의자. 이기주의자!


남편은 집안에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하면 일의 경중을 무시하고 우선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일(회사일, 거래처와의 문제 등등)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리곤 혼자 동굴에 들어가 버리고는 복잡한 일들이 해결될 때까지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안의 모든 중요한 일은 나 혼자서 결정하고 통보하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 집엔 가장(家長)이 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남편, 그리고 실무를 담당하는 나.


분명히 둘이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는데 나는 점점 더 외로워져 갔다.

내 성격으론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위로받을 수도 없고 주변에 사람은 항상 많았지만 나는 말하는 법을 잊은 것 같이 외로움을 느끼며 살았다.


그나마 우리 딸 지니가 태어나면서 우리 삶에도 변화가 오는 듯싶었다.

나는 세상 무엇보다 지니를 사랑했다.

남편도 딸이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을 주었고 누가보든 나를 대하는 것과 지니를 대하는 것이 차이가 나게 보일 정도로 사랑을 퍼부어 주었다.




딸이 태어나고 돌 무렵부터 7살까지 아데노이드 비데증과 심한 중이염, 여러 가지 호흡기 질환으로 병원을 끼고 살았다. 두 가지 병(아데노이드와 중이염) 다 수술을 해야 했고 수술 전엔 낮에는 근처 소아과로 밤에는 3차 의료기관 응급실로 1년에 10개월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남편도 아이를 위해 엄청 고생 많이 하고 희생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입원 시에 교대를 해준 적이 없었다.

친정엄마와 함께 아이를 돌봐야 했고 은행에서 눈을 뜨고 졸면서 손으로는 돈을 세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일하던 도중에 쓰러져 인근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전철에서 '엉엉' 소리 내 울며 집으로 돌아와 한여름에 한겨울 이불을 꺼내 덥고 오한이 나서 온몸을 떨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은행에서 회식을 한다고 하면 항상 나는 밥만 먹고 눈치껏 2차를 가기 전에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었는데 사실 그 회식도 편하게 해 본 적이 몇 번 없었던 것 같다.

사람이든 직장이든 대부분 월초에 그달에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계획을 짜고 그 계획에 맞춰 움직일 수 있도록 회의를 하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했었는데 우리 이기주의 이서방님은 그런 걸 질색을 했었다.


"사람이 어떻게 계획 대로만 살 수 있어?

난 평생 동안 그런 걸 지켜본 적이 없어. 어떤 일이 생길 줄 알고 1년, 한 달, 일주일 계획을 세우냐?"

이렇게 수시로 어깃장을 놨다.

이건 내가 한 달 전에 몇 월 며칠에 회식을 하기로 날짜가 잡혔으니 지니를 친정에서 일찍 데려와 집에서 놀고 있으라는 내 말이 듣기 싫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회식하는 날 아침에

"여보, 오늘 회식 나 밥만 먹고 금방 날라 올 거니까 엄마 힘드시게 늦게 가지 말고. 거기서 저녁 먹지 말고. 지니 데리고 집에 와있어 줘. 꼭. 부탁할게. 알았지?"

이렇게 애원을 하고 가도 내가 회식 자리에 앉아 부지런히 술도 받고 밥도 두어 숟갈쯤 먹을 때쯤엔 어김없이 전화벨 울렸고 전화기 너머에서 남편은 늘 같은 레퍼토리를 읊어 댔다.

"여보. 나도 술 약속 잡혔어. 지니 못 데리러 갈 거 같아. 당신이 좀 일찍 가면 안 되나? 아님 처갓댁에서 오늘만 좀 재우던지...."


아.... 그 소리를 몆십 번, 아니지. 몇천 번은 들었는지... 도저히 식당 안에서 전화를 할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와 전화기에 대고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으르렁"거리며 네가 인간이냐부터 시작해 화도 내 보고 달래도 보고 우선순위를 주장도 해보고 신경질도 내보고 찬찬히 알아듣게 설명도 해 봤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결국엔 또 몇천 번은 했던 소리 "도대체 나 혼자 어쩌라고 이러는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곤 내 자리에 앉아있던 언니에게 전화로 상황 설명만 한 후 먹던 밥도 미처 먹지 못한 채 친정으로 달려가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딸을 포대기로 업고(정장을 입고 포대기로 업고 8cm 하이힐 구두를 신고 bag은 가로로 걸쳐 메고 기저귀 가방은 앞으로 배낭처럼 매서) 걸음걸이로 15분에서 20분을 걸어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도착한다.

내가 다시 복직해 다녔던 몇 년의 기간 동안 아이를 편하게 차에 태워 남편이 데려왔던 경우는 다 합해봐야 12번이 다였다.


지금은 영업을 하면서 '골프'로 많이 접대?를 하지만 예전 그 무렵에는 대부분이 술 접대였다.

의사들도 자기끼리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 있기는 했지만 개업의들 같은 경우에는 휴무시간이나 휴무하는 날짜가 다 달라 만나기가 어려워 오래도록 거래한 영업직원들과 회식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덕분에 남편은 일주일 중 일찍 들어오는 날은 하루나 이틀이면 다행이었고 술은 잘하지 못했어도 노는 것을 좋아했던 남편은 자기가 결혼한 유부남 인걸 깜박 잊기라도 한 듯 새벽이나 아침까지 안 들어오기 일쑤였고 그 시간까지 실컷 놀다 들어온 후에는 대리비까지 모자랄 정도로 돈을 탈탈 쓰고는 그 동네 어디쯤 에서 자고 있는 걸 부하직원들이 함께 데려와 내가 아파트 밑으로 대리비와 사우나 비용, 아침 식사 비용까지 준비해서 내려가 기다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속상하고 지치고 힘든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잘 참아 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로지 마음과 생각일 뿐 몸은 그걸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남편과의 갈등의 골이 깊어가던 어느 날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러 일어났는데 얼굴이 자꾸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나더니 출근 시간이 다 되어 갈수록 오른쪽 얼굴과 목이 오른쪽 위쪽으로 돌아가 목 전체의 근육이 팽팽해져서는 도저히 출근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몸이 약하기는 했어도 한 번도 심한 병에 걸린 적이 없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딸을 데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친정에 전화를 걸었다.

그 무렵부턴 입안에 침이 모두 마르더니 혀뿌리부터 안쪽으로 말려들어 가며 꼬이기 시작했다.

숨도 쉴 수 없고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혀가 목 안쪽부터 뽑혀 나갈 듯 너무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가 전화를 받으셨고 나는 엄마에게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지껄였다.

"어마... 혀가 마려서 뽀피커 가터. 너무 아프.

이거 어뜨께...."흐흐흑ㅜㅜ"(엄마 혀가 말려서 뽑힐 것 같아. 너무 아파 이거 어떻게 해)


이제 36개월을 갓 넘긴 지니는 영문도 모르고 내 다리에 매달려 울음을 터트렸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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