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키를 기른다는 것(하) - 가족인가, 개인가
불과 20년 정도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도 반려 동물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과 현격하게 달랐다. 당시 '개'라는 존재는 일반적으로 현관문 밖 마당에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실내에서 인간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마치 서양에서나 있을 법한 신기한 생활 방식처럼 여겨지곤 했다. 어릴 적 집 마당에서 도베르만을 기르던 때만 해도 녀석을 집안에 들인다거나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거나 가족들과 함께 소파에 올라와 휴식을 취하는 등의 그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어른들과 이야기하면서, "서양에서는 개를 집안에도 들여보낸대요. 같이 잠도 자고, 밥도 먹고 말이에요."라며 마냥 딴 세상처럼 이야기하던 시절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았다.
'그런 시절이 있었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아파트나 공동주택에 사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개를 기르기 시작했다. 대략 90년대 중후반쯤부터였던 것 같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쯤부터다. 집에서 개를 기르는 친구들은 대부분 작은 개를 길렀다. 토이푸들, 몰티즈, 시츄 등 당시엔 그리 종의 수도 많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근처 공원만 나가도 웰시코기, 쉘티, 보더콜리, 허스키, 말라뮤트, 코카스패니얼, 리트리버, 불독, 심지어는 샤페이 등 온갖 종을 구경할 수 있는 요즘과는 사뭇 달랐다.
항상 현관 밖 마당에서 경비견 노릇을 하던 큰 개만을 알던 내게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실내에서 강아지를 기른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배변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며 위생이나 공존 방식 등 모든 방면에서 잘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내 발밑에는 지금 육중한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가 곤드레만드레 누워있다. 최근 며칠 새 너무 후텁지근해지는 바람에 서로의 평화를 위해 녀석이 방에 들어와 누워있지 못하게 했는데, 오늘 다시 날이 쌀쌀해지는 바람에 녀석을 꼬셔서 발등 위에 뉘여두었다. 푹신하고, 따스하다.
녀석이 어릴 적에는 야간작업 때마다 늘 내 작업실(서재) 책상 아래에 누워있곤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대한 컴퓨터에 몸을 기대고 한참 동안 잠을 자거나 틀어놓은 음악을 계속 듣다 보면 밤에 숙면을 잘 취하지 못하는 동시에 전자파에 지나치게 노출될 것만 같았다. 새벽에도 몇 번이나 물을 챙겨 먹이고, 선풍기와 동떨어진 곳에 누워있으면 선풍기도 돌려놓아주고, 어두울 때 돌아다니기 어렵지 않게 조명도 은은하게 맞춰주고. 어느새 개를 기르는 건지 모시는 건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느덧 녀석도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햇살이가 태어나기 전 제노 엄마와 나, 그리고 제노 셋이 살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밤마다 모여 영화나 드라마를 꼭 한편씩 보곤 했다(물론 제노는 영화감상 중인 엄마 아빠 발치의 카펫에 누워 코 잠들었다). 일이 많은 날엔 제노 엄마와 제노가 함께 굿나잇 인사를 하러 함께 방에 들어와 놀다 가곤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린 것인지 요즘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날엔 가끔 잠에서 깬 제노 엄마가 흰 멧돼지를 끌고 함께 방에 들어와 털뭉치를 만지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렇게 우리 셋만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치? 우리 원년멤버다~ 제노제노 오래오래 살아야 해. 꼭!"
물론 그러다가도, 엄마가 곁에 없으면 금방 눈치채고 잠에서 깨어 칭얼대는 햇살이 때문에 제노 엄마는 황급히 침실로 달려 굴러 복귀하곤 한다. 소주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자면, 제노는 단순히 개라고 표현하기엔 이제 너무나 우리 가족 깊숙하게 자리를 잡은 일원이다. '개를 기르던' 시절에는 반려견을 두고 현관문 밖을 지키는, 밥만 제 때 주면 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우리 가족이 무얼 하건 어딜 가건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우리에게 있어 제노는 다만 태생이 인간이 아닌 시베리아 출신의 털북숭이일 뿐 분명한 '가족'이다.
요즘에는 큰 개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보니 사실 제노가 덩치가 큰 편에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실제로 전에 살던 곳에서는 앞집에 살던 외국인 부부가 그레이트데인을 기르고 있었다(그레이트데인은 정말 크다. 내 가슴팍까지 닿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제노가 똥똥하고 자그마한 꼬꼬마처럼 보였다. 그런데 제노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엄청 큰 개다!"라며 놀라는 분들도 많으니, 결국 개의 크기란 사람에 따라 상대적인 것인가보다.
요즘 제노 엄마와 나는 제노를 두고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장 적당한] 사이즈라고 여기고 있다. 이제 갓 17개월인 햇살이는 늘 제노 오빠와 함께 자라서인지 산책을 나가 커다란 개들을 마주쳐도 무서워하거나 신기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으! 으! 하고 외치면서(아직 말을 못 하니..) 좋아한다. 아무래도 제노 오빠랑 비슷한 친구들이 있다고 흥분해서 외치는 것 아닐까.
말이 덩치 큰 반려견일 뿐 사실 덩치가 작은 반려견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소변의 양이 작은 녀석들의 다섯 배쯤 되고 대변의 크기와 양도 네댓 배라는 점 말고는 오히려 덩치가 큰 녀석들이 유순한 성격에 예민하지 않고 무던한 경우가 많다.
다만 함께할 종이 시베리안 허스키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이는 곧 '산책 = 운동' 공식이 성립하는 것을 의미하며, 함께 강도 높은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하루 중 상당히 긴 시간을 야외 산책에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 시베리안 허스키를 건강하게 그리고 녀석들의 천성대로 성격 좋은 녀석으로 기르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충분한 운동량이 충족되지 않으면 대부분의 개들은 스트레스와 불만이 가득 쌓인 시한폭탄과도 같아진다. 많은 활동량을 필요로 하는 허스키의 경우 그 스트레스의 강도가 더욱 심해서, 가족과 함께 실내 생활을 할 계획이라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 꾸준한 운동과 산책은 필수다.
새로운 가정을 찾은 시베리안 허스키들이 가장 많이 파양되는 시기가 생후 약 4~9개월 사이인데, 이갈이와 함께 급격한 성장, 그리고 활동량이 증가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상상해보자. 이는 간지럽고, 힘은 남아돌고, 밖에는 못 나가고, 심심한 강아지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도 의자에 앉아 좀이 쑤시면 단 10분, 30분도 견디지 못하는데 말도 못하는 어린 녀석들이 무슨 재주로 얌전하게 마음의 평정을 찾는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저 4~9개월을 시베리안 허스키 '악마의 시절'이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를 견주와 반려견이 서로, 그리고 함께 잘 보내야만 평화로운 시절이 도래한다. 훈육은 엄격하고 단호하게, 동시에 욕구는 최대한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물고 갉고자 하는 욕구, 먹고자 하는 욕구, 마시고자 하는 욕구, 냄새 맡고자 하는 욕구, 질주하고자 하는 욕구, 배변 욕구]로 인한 스트레스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온 가족이 약 5~6개월만 노력하면 시베리안 허스키는 어느 순간부터 사고똥뭉치에서 부드러운행복의털뭉치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자견 시절부터 허스키를 기르는 분들이라면 이 시기를 견뎌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로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있을지 여부가 갈리는 것이다.
제노와 우리 가족이 겪은 '악마의 시절'?..
난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외출했다 돌아오니 결혼 때 어른들이 선물해주신 원앙 한 쌍의 머리가 완전히 갉혀서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꽤 높은 선반 위에 장식해 둔 터였다. 그날 저녁 김제노의 대변에는 원앙 대가리가 두 알 박혀 있었다. 정말로, 그날만큼은 누군가 제노를 맡아서 더 잘 길러줄 수 있는 분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던 기억이 난다.
늑대같은 외모에 체중이 20킬로를 훌쩍 넘는 북방견과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를 함께 양육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기도 했다. 제노가 아무리 착해도 혹여나 아가를 향해 질투를 하지는 않을까, 아가에게 개 알레르기가 있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제노가 서열 정리 등의 사고방식으로 공격적이고 위압적인 영향력을 아가에게 행사하려 하지는 않을까, 아가가 제노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어른들이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실까, 등등등 제노 엄마와 나의 고민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다행히, 그리고 운이 좋게도 모든 고민은 기우였다. 햇살이는 엄마와 아빠보다도 오히려 개 알레르기가 전혀 없었고, 제노는 햇살이를 경쟁자나 아랫 서열의 존재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완연한 가족의 일원이라고 인식했다. 가끔 보면 제노는(그리고 어릴 적부터 가족들 틈에서 자란 반려견들의 경우) 자기 자신이 인간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 햇살이는 제노에게 있어 늘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당연한 존재가 되어갔고, 햇살이 역시 조금씩 성장할수록 제노를 향한 호기심이 관심으로, 관심이 애정으로, 애정이 다가감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종의 오랜 역사는 인간과 궤를 함께 했다. 북방의 벌판에서 유목민족과 수십 세기를 살아온 녀석들에게는 인간과의 근본적인 친화력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는 일견 사납고 날카로워 보이는 외형에서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오늘 아침에도 제노를 산책시키러 나가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 분은 "개가 참 멋진데 한 성질 하게 생겼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한 성질... 제노를 이제껏 기르면서 단 한 차례도 녀석이 이빨을 드러내거나 꼬리를 치켜들고 그르렁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허스키의 외모만으로 '위험한 개'라고 단정 짓는 분들의 이러한 오해를 접할 때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약간은 억울한 마음도 든다. 그럴 때마다 제노 엄마는 내게 말한다.
"제노가 우리 자식이 아니고 길에서 만난 개였다면 우리도 막상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을 걸?"
반박 불가. 난 항상 제노엄마 말에 끄덕이고 만다.
햇살이와 제노를 함께 데리고 산책을 나갈 때면 많은 분들이 '아가와 저런 큰 개를 기르는 게 괜찮으냐'라고 묻는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모든 개는 견종마다 성격이 다르고 같은 견종일지라도 개체에 따라 다르다. 아가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아가들은 작은 개도 함께하는 데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반면 큰 개와는 잘 지내도 고양이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는 아가들도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사납기로 유명한 핏불과 아가들을 함께 잘 기르는 집이 있는 반면 온순한 레트리버에게 아이가 공격을 당한 가정도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답변은 이렇다.
"다른 반려견이나 아가들의 경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가족은 제노와 햇살이가 서로를 정말 좋아하고 가족의 일원으로 인식을 하고 있어서 아무런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 제노 다리 피부에 트러블이 생겨서 하루에 두 차례씩 연고를 발라주는데 그때마다 햇살이는 항상 부리나케 달려와 아빠 무릎에 앉아 약을 발라주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이후 아빠가 출근한 뒤에 혼자서 연고가 담긴 통을 들고 누워있는 제노에게 달려가 다리의 상처에 마구 문질러댄다고 한다. 자기 나름대로 제노 오빠 다리가 아야 하니까 약을 발라주고 챙겨주고 싶은 예쁜 마음인 것이다. 마음이 찡했다. 염증 부위에 연고 튜브를 마구 문질러대는 햇살이의 만행과 그 착하고 기특한 마음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음은 딜레마에 빠진다. 일단 약을 햇살이의 팔이 닿지 않는 곳에 두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다. 또한 햇살이는 제노 오빠의 간식 주머니가 보일 때마다 주머니를 품에 안고 제노에게 달려가 하나라도 더 먹여주려고 난리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엄격한 아빠는 봄날을 맞이한 얼음처럼 마구 녹아간다.
[그래 , 먹어라 제노 한 개 더 먹어라 두 개 먹어라 그래 그냥 다 먹어라-
그리고 엉엉 햇살아 아빠를 가져요] - 굳이 표현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요즘.
정말 다행이다.
우리는 늘 이러한 행운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모든 관계의 근본은 정성, 그리고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책임감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는 비단 시베리안 허스키뿐만 아니라 함께 가기로 결정한 모든 존재를 대하는 태도이자 마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시베리안 허스키는 정말 많은 운동을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릴 적에는 훈육을 시키느라 크게 애를 먹을 것이고 그게 뜻대로 잘 흘러가지 않는 모양새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는 반려견에 관해 거의 보살 반열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제노 엄마와 나도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많이 준비하고, 고민하고, 또 각오를 했음에도 막상 일이 닥치면 각오나 다짐따윈 언제였냐는 듯 세상은 새로운 과제와 고민들을 산더미처럼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다. 제노 엄마와 나의 공통된, 매우 간단하고도 강력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으로 맞이하기로 결정한 이상, 우리 집 문지방을 넘어온 이상 제노는 우리 자식이다. 그리고 부모는 결코 자식을 저버리지 않는다.'
반려견을 기르는 분들의 수가 늘어감과 동시에 반려견을 버리는 분들도 늘어났다. 얼마 전에도 비닐에 담겨 유기된 병약한 강아지의 사연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견주들은 개를 하나의 '소유물', 혹은 '사물'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진심으로 가족, 반려할 존재를 그렇게 쓰레기 내놓듯 차에서 창밖으로 먼지를 털어내듯 내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는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낭만주의일지도, 너무 큰 기대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앞으로 시베리안 허스키든 다른 견종이든 새로이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분들에게 간곡하게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부디 그들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가족이 되어 보호하고 사랑을 베풀어달라고.
그저 한번 키워볼까?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한 소중한 생명과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례들이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꿈꾼다.
시베리안 허스키 남아 육견 1년과 불꽃같은 성정을 가진 딸내미의 육아 1년으로 지난 2년을 보냈다. 지난 2년간 사라진 것들이 참 많았다. 저녁 외출, 심야 영화(생각해보니 낮에도 못 봤다), 부부 둘만의 식사, 드라이브, 여유로운 독서 시간 등등 도저히 전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단 하루도 체력이 남아 잠이 오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제노 엄마도 나도 서투르기 이를 데 없는 육아 육견에 지쳐 매일같이 기절하듯 잠들다 보니 불면증 따윈 먼 나라 이야기였다(물론 지금도). 우리는 요즘도 아침마다 서로 얼마나 숙면했는지 이야기하며 서로를 놀린다. 내 별명은 숙면왕이고 제노 엄마의 별명은 숙면증 환자다 .
짊어지고 품을 존재들이 없던 나날들이 잠깐씩 생각날 때가 있다. 아내와 손잡고 심야영화를 보러 가서 핫도그를 배불리 먹고 새벽에 들어온다든지, 주말 저녁에 시샤모를 구워 맥주캔을 들고 함께 유쾌한 드라마를 보던 시간이라든지, 함께 책을 읽거나 글 작업을 한다거나 하던 일상들이 이따금씩 떠오른다. 이젠 다시 그럴 수 있기까지 한참 걸리겠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요즘은 아이를 갖지 않고 자기 삶의 질을 추구하는 딩크(DINK) 족도 많다. 여행을 다닌다거나 취미생활에 투자하면서 주어진 삶을 즐기는 스타일을 보면서 잠깐씩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두 가지 삶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백 번의 기회를 준다면 백 한번, 그리고 백 두 번째에도 지금의 삶을 다시 택할 것이다. 제노 엄마는 아마 천삼백 번째에도 지금을 택할 것 같다.
제노 엄마와 내가 전반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은 지금의 이 삶에 들어오면서부터 정말 많은 것을 희생하고 포기해야 했다는 점, 이젠 다시 되돌이킬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정말 힘들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크게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은 바로 우리 삶이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풍요로움'으로 가득해졌다는 사실이다.
밖에서 먹는 비싼 밥보다 햇살이가 남긴, 엄마가 정성 들여 좋은 재료로 만든 이유식을 아빠는 하이에나처럼 기다린다. 제노는 자기 맘마를 벌써 다 해치우고 간식은 언제 주나 아빠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제노 엄마는 식사를 마친 햇살이의 후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고 햇살이는 오늘도 아기용 의자를 탈출하려고 꿈틀대며 화를 낸다.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을 지켜본 햇살이 할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총체적 난국'이란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나 눈에 보이는 어떤 화려함과는 무관한, 우리를 둘러싼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예전에 비하면 여가시간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취미생활은 거의 전무, 주말의 늦잠이나 금요일 밤의 유흥따위는 꿈도 못 꾸지만 - 어쩐지 우리는 전보다 훨씬 많이 웃고, 대화하게 되었다.
제노, 햇살이, 제노 엄마, 제노 아빠가 한 공간에서 늘 서로가 서로를 찾고, 바라보고,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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