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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Mar 20. 2016

"다시 돌아갈 날을,"


   처음으로 온 것은 재작년 여름이었다. 그 여름에도, 그리고 이 초봄에도 활활 타오르는 화구 안쪽에서는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할아버지, 누군가의 귀중한 사랑이었던 존재가 이승이라 불리던 이 삶 속에서의 형상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 인간 존재의 근간인 육신이 모두 전소, 소멸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80분. 80년을 산 사람도, 안타깝게 30년밖에 살지 못한 사람도, 다행히 5년을 산 생명도 그렇게 각자의 사연이나 천수와는 무관히 80분을 통해 다시 흙으로, 그리고 기억으로 돌아간다.


죽음을 마주하는 곳에, 대면해야 하는 곳에 서 있을 때마다 느끼는 바가 있다. 우리는 삶이 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내일을 향하는 것이라며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지만, 실제로 과연 그런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이다.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씩 터득해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와 삶을 돌아보니 내가 터득해 온 것은 모두 죽어가는 방식이었다."라고.


 오늘 사랑하던 한 존재를 떠나보냈다. 그의 형상을 떠나보냈다. 육신을 연기로 올려보냈다. 그러나 어쩐지 기억만은 고스란히, 더욱 단단하게 여기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 남았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애도하고 눈물흘리는 모두가 이렇게 차례차례 떠나갈 것이란 생각을 하니 어쩐지 압도적인 허무감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삶에서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도, 고뇌도, 공포나 심지어는 슬픔에도 익숙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상실이다. 소중한 자리가 비어버린다는 사실은 아프다. 그러나 더 아픈 것은 우리네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이 상실의 사건에도 나머지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물 흐르듯 굴러간다는 사실이다. 어째서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거냐, 하는 표적 없는 원망과 함께.


 안녕하시길 기원하나 과연 땅을 딛고 있는 이곳의 우리가 그럴 수 있는 입장인 것일까. 어쩌면 번뇌롭고 시름 어린 땅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 아닐까.




관이 화로를 향해 밀려들어갔다. 나 역시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문 채 문을 밀고 나간다. 평소 흡연을 하지 않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끽연가였던 고인을 그린다는 핑계를 댄다. 큰 불길이 그를 품에 안아 올리는 동안 궐련에 작은 불길을 당긴다. 도대체 이런 텁텁함이 뭐 그리 맛있으셨던 건지.


어릴 적 나는 그의 담배가 보일 때마다 숨겨두었다. 때로는 물에 적셔두기도 했고 개비들을 다 꺼내어 몽당연필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나의 걱정어린 장난(실은 장난끼가 8할이었다)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역정을 내셨지만 적어도 그날 만큼은 흡연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날들이 모여 적어도 폐 질환이 찾아오는 것 만큼은 막아준 것 아닐까 하는 심심한 소회를 가져본다.




 오랜만이라서일까, 오늘따라 담배가 타들어가기를 서두른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타고 있는 개비에 한 개비를 더 꺼내어 중지와 약지 사이에 끼우고 불을 당긴다. 홀로 함께 두 개비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태우고 있는데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자그마한 남성 한 분이 길을 묻는다.


 그의 소중한 존재는 월남전 참전용사셨다고 했다. 처음으로 불편한 다리로 먼 길을 찾아왔다는 그는 쌀쌀한 초봄 날씨임에도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가야할 길에는 가파른 계단이 놓여있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실례가 되지 않으면 참배 올라가는 길 부축해줄 수 있는지를 내게 물어왔다. 오히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돕고 싶었던 나이기에 기꺼이 그를 참배 묘역으로 안내했다.


한참 담배를 태우고 있자 그분이 다시 다리를 절며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조문 잘 하셨어요?" 내 물음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제 다리가 불편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한 번은 직접 찾아와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왔는데, 정말 힘드네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 덕담을 나누며 헤어졌다. 글쎄,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과의 어색한 대화보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중한 존재를 기리는 낯선 이와의 대화가 어쩐지 가장 친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한 개비를 꺼내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다 잘 마쳤어?"

'응, 방금 막. 아가는 잘 놀고 있어?"

"오늘따라 얌전하게 잘 웃고 잘 노네. 이따 오면 아빠가 안고 좀 놀아줘. 우리랑 잘 놀긴 해도 아빠랑 노는 것만큼은 즐거워하지 않으니까."

"그래. 너무 늦지 않을게."


전화를 끊고 손에 들려 있는 마지막 개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화창한 햇살 아래 디스 한 갑, 입에 물려던 마지막 궐련 한 개비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미안해요 할아버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함께 할게요. 가서 아가랑 놀아줘야 할 것 같아요. 이제 편히 쉬세요. 이 한 개비는 어디 감추지 않고 여기 할아버지 옆에 두고 갈게요."


날이, 참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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